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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Dec 02. 2015

가기 전에 만나자

비록 그동안 안 보고 살았을지라도

나의 '감당 못할 그분'에 대한 글의 조회수가 3천이 넘었다는 알람을 본 순간 두려워졌다. 그분은 스마트폰조차 쓰지 않는 원시인이시긴 한데 그래도 두렵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공유 한 번이 좀 심하게 조회수를 높여주셨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바라는 관심종자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를 사랑하라'라는 절대 명령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이 조회수가 매우, 아주 매우 부담스럽다. 페이스북이 아닌 브런치에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한 이유가 사실 이게 그다지 많은 유저가 없는 매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이지 나라는 관심종자의 아이러니는 답이 없다.


어쨌든 지금 나는 절친했던 사람들과 더 만나거나,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느라 바쁘다. 총 6개로 예정된 이민가방 중 다섯 개는 바라만 보면서 꾸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그들을 만날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 빌려온 1번 가방에 채운 것은 주말부부로 살던 남편이 들고 온 자신의 여름 옷가지, 개봉 전인 화장품과 일상 용품(비누, 치약, 각종 몸에 쓰는 세제), 아들의 중학교 과정 인터넷 교재가 끝이다. 작성해놓은 리스트는 대부분이 음식이고 식료품을 채우고 나서 남으면 옷을 싸자, 그런 생각으로 아주 막연하게 대기 중이다. 무엇보다 쌀과 김치를 소량 가져가려 하는데, 방금 남편의 막내이모가 선물로 김치를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다. 내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김치님이셔서 매우 걱정스럽다. 얼굴도 기억 못하는 어른에게 적절한 사교 멘트를 하는 것도 내 성격에는 고통 그 자체다. 가져갈 물건에 대해 생각날 때마다 메모를 하다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 쿠팡으로 뽁뽁이부터 사들였다. (6800원인데 무료 배송이라니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찝찝하다)


또 하나, 참으로 기구한 히스토리가 많은(사실은 11월에 진짜 큰 히스토리가 생겼음) 아들의 선생님과 며칠 전에 직접 만나 인정유학(의무교육 면제)에 관한 서류를 제출했는데 그것도 아직 마지막으로 결정해야 할 사항이 있다. (교육청의 유학에 대한 태도가 차라리 더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야기가 샜지만, 그래서 내가 만나고 가기로 한 사람 중에 거의 10년 동안 만나지 못한 고등학교 동창이 있다. 참으로 미숙했지만 내가 되게 성숙했다고 믿었던 그 무렵에 나는 우리 '그룹' 중 한 친구에게 실수를 해서 그 친구 A에게 절교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그 친구만큼이나 친했던 다른 친구 B와도 연락을 하기가 껄끄러워졌던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뭐에 홀린 듯이 B의 번호를 알아냈고, (페이스북이 정말 훌륭한 역할을 해줌) 전화번호를 알게 되자마자 10년의 망설임을 한칼에 털어내듯 아주 멋지게 전화를 걸었다. 그 친구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호탕하게 껄껄껄 웃어댔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동안 보고 싶었던 마음이 약간의 심술로 변질되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고, 나는 살짝 퉁명스럽게 "내가 누군 줄 알고 웃는 거야?"라고 물었다. 친구는 계속 웃으면서 정확하게 내 이름을 댔다. 그러자 이상스럽게도 그동안의 거리가 순간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났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B와 만난다.

전화를 끊기 전에 "화장 하고 와!" 했더니 "내가 널 만나는 데 웬 화장을 해?"라고 대꾸하길래

"늙었으니까 하고 와!"

라고 명령해주었다.


물론 그냥 해본 말이다. ㅋ 나도 물론 화장은 안 할 거다.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주어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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