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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Dec 20. 2015

냉장고 없이 1.5일

냉장고의 뒷면

이번 주 월요일부터 새 식료품을 일절 사지 않았다.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연명하고, 약속 있으면 나가서 먹고, 시켜서 먹고, 어쨌든 조금이라도 남기는 음식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렇다 해도 냉장고를 모두 비우고 가는 것은 계획에 없었다. 조만간 우리집을 일정 기간 이용할 장기 투숙객이 들어올 예정이었으니, 그분이 쓰실 수 있는 건 쓰시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이 2월에야 이 집을 사용하실 예정이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친정 식구들과 송별회식은 우리 동네 중급의 중식당의 한 룸에서 진행했다. 그래도 이번엔 완전히 직계가족끼리, '식순'이나 '개회사' '송별사' '답사' 등이 없는 평범한 식사여서 마음이 비교적 편했다. 식사 후에 엄마는 집에서 내 냉장고를 비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가차없이 버리고 챙기는 과정에서 정리를 잘 못하는(잘 못 버리는) 우리 가족 특유의 특성이 큰 방해가 되지 않았던 까닭은, 시간이 급했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고 빨리 가야 한다! 라는 생각에 엄마는 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냉장고의 전원을 빼고, 곰팡이 방지를 위해 문을 열어둔 상태로 두니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이 일반형 냉장고를 2001년 결혼할 때 구입한 이래 이사하는 날을 포함하여 전원을 뺀 적이 없다. 항상 포장이사였고, 미리 물건을 모두 빼놓거나 한동안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불빛을 뿜지 않는 냉장고는 낯설었다.


엄마는 공항에 나오실 예정이기 때문에 비교적 담담하게 이별했는데, 나의 절친 올케와 헤어질 때에는 주책없이 눈물이 쏟아져나와서 어쩔 줄 몰랐다. 가까운 가족이자 소중한 친구인 언니에게 2, 3일에 한 번씩은 속을 털어놓으며 통화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며 농담하고 웃곤 했는데 그런 사람 없이 어떻게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 하나, 갑자기 혼자라는 것이 덜컥 다가와 무서워졌다.


저녁에는 퇴직한 회사 선배가 서울 모임을 마치고 내려가기 직전에 그야말로 잠깐 얼굴울 봤다. 선배가 기차에 타러 간 후에 나는 이마트에 가서 '냉장고가 없는 사람이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마음만은 회장님 기분으로 정용진 씨가 즐겨 먹는다는 피코크 디너를 위해 국물 떡볶이를 사고, 상온 보관 가능한 멸균 우유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프리미엄 팝콘 씨솔트 캐러멜은 또 매장에 없었다.


너무나 불안하다고, 남편에게 털어놓았더니 남편이 구체적인 이유를 물었다. 나는 "짐을 제대로 쌌는지 확신이 안 가서."라고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상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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