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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Dec 22. 2015

기나긴 여정

지구 반 바퀴

2005년에 독일에 갔던 때 이후로 기록 갱신이 되었다. 12시간+1시간 20분. 디트로이트를 거쳐 이 시골 도시까지 오는 데에는 공항 수속과 환승 대기 시간까지 더하면 20시간이 넘게 걸렸다. 교통수단에서 잘 졸지만 깊이 오래 자지 못하는 체질이라 국내선 한 시간 정도 수면이 다였다. 중간에 낮과 밤이 뒤바뀌고, 힘든 여정에 서로 살짝씩 짜증도 냈지만 제일 힘든 건 이동장 안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싸지도 않는 개를 걱정하는 일이었다.


검역도 싱거웠지만 이동장 크기 따위 짐 무게 따위 재지 않는 델타의 대인배 정신은 날 오히려 허탈하게 만들었다. ㅠ 검역소에서 광견병 항체 검사를 미리 하지 못했다고 하자 (귀국 때 필요) 자기들한테 문의했으면 방법을 알려줬을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미국에선 죄다 비싸고 힘들다)


개 때문에 셀프전자체크인을 할 수 없어 대기하는 중에 부모님이 배웅을 나오셨다. 엄마가 무신론자 딸에게 성경을 가져가라고 하셨다가 딸이 질색팔색을 하는 바람에 완전 빈정이 상하셨다. 하지만 "성경을 안 가져가면 성경 보고 싶을 때 어떡해?"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시면 저 빵 터지는데여;;


무식스럽게 큰 보잉 747 기내에는 개인이 영화를 맘껏 감상 가능한 기기가 붙어 있어서 아이패드와 보조 배터리 준비한 것이 살짝 허무했다. 중앙 네 자리 중 셋에 우리 가족이 앉고 오른쪽 끝에 혼자 이어폰을 끼고 게임에 열중한 청년이 있었는데 내내 "대화 시름"이란 느낌을 풍겨 가만 놔뒀다가 아롱이를 몰래 무릎 위에 올렸을 때 자기 반려견 얘기를 꺼내며 만져도 되냐고 묻길래 그 청년이 저스틴이며 한국 오산 공군기지에서 9달 복무 후 휴가를 받아 집에 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비행 9시간을 넘었을 때부터 시간은 멈춘 듯했고 뱃속에서 가스가 끓어올라 장이 꼬이는 통증이 시작되었는데 그때 나온 식사는 이게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애매할 뿐이었고 거의 손대지 못했다.


착륙 한 시간 전에 먹은 타이레놀은 전혀 효과가 없어서 이통에 몸부림치며 한 알을 더 삼켰다. 타자마자 비상용으로 가져온 수면 유도제나 먹는 거였는데... 변함없는 내 몸뚱이.


인천공항에서 델타항공 체크인을 진행할 때에도 정말 기다림이 길고 힘들었지만(꼬박 한 시간이 소요돼서 진짜 여유 하나도 없이 비행기에 오름) 제일 힘들었던 기다림은 디트로이트 공항에서 입국심사였다. 심사하는 창구가 꼴랑 다섯 개뿐이라 땀을 흘리며(그리고 개가 탈수&소변 참다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며) 여기서도 한 시간을 기다렸다. 렉싱턴으로 배기지 드롭을 해버리자 세관이 어영부영 생략됐는데 이건 통로 안내를 잘 받은 건지 잘못 받은 건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점은 디트로이트공항에서 정말 타 항공사 비행기를 못 봤다. 레알? 설마? https://ko.m.wikipedia.org/wiki/디트로이트_메트로폴리탄_웨인_카운티_공항 보니까 내가 이용한 터미널이 맥나마라였나 보다.


입국 절차의 변수를 생각해서 디트로이트에서 연결편 대기 시간을 길게 짰는데 그 대기 시간 동안 30분 간격으로 개를 산책 시켰다. 드디어 소변을 보긴 했는데 농축된 커피색. ㅠ 신장 안 좋은 개에게 정말 몹쓸짓 했다. 날씨는 가늘게 비가 왔고, 미국 사람들도 개를 보면 귀엽다고 좋아하더라. 그런데 이 하루 동안 아롱이에게 관심을 보인 미국 사람들한테서 발견한 특이점은 반드시 만져도 되는지를 내게 묻더라는 거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국내선으로 갈아탈 때 잊지 못할 보안 검색을 경험했다. 일단 차례가 되자 손바닥에 무슨 종이를 문대서 화약 반응을 보고(눈치챌 수있었던 건 십몇 년간 씨에스아이를 봤기 때문이긔) 겉옷뿐 아니라 신발도 벗어서 기계에 통과시킨다. 나는 아롱이를 꺼내서 안은 채로 검색대를 통과하게 했다. 예의 화약 반응은 남성만 보더니 검색대 나온 후에 내 손바닥에도 문댔다. (나 범죄형...?) 남편은 가방에 무념무상하게 넣었던 샴푸와 화장품을 모두 털렸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엄격하고 빡센 과정이라 무슬림들에게는 분명히 더 모멸감을 줄 것 같더라.


B19게이트를 찾아가는데 A쪽은 gate라고 잘 써놓고 나머지 B와 C는 표지판이 gate라는 표현이 아니라 concourse라고 되어 있어서 헷갈렸다. 게이트로 이동하는 넓은 중앙홀에서 노래방 이벤트가 있었는데 직원인 듯한 여자가 End of the road를 열창하는 바람에 시끄러워 죽는 줄.


디트로이트에 올 때 탔던 비행기와는 극과 극으로 다른 조그만 비행기(좌우 총 4개 좌석)를 타고 렉싱턴에 내릴 때에도 가느다란 빗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우리에게 집과 차와 가구를 물려줄 사람이 우리 차(다음 날짜로 명의 변경 예정)를 끌고 마중을 나와주었다. 또 별도로 학교에서 나온 밴에 무식하게 많고 큰 여섯 가방을 싣고 열흘 동안 머무를 "선교센터"로 출발했다.


이 선교센터에 대해서 상당히 할 말이 많으니 이건 다시 다른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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