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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Dec 28. 2015

거대한 숙제, 정착

사실 숙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님 ㅋ

엄청난 거리를 날아 떨어진 이곳은 서울과 열네 시간 시차를 자랑함과 동시에, 무엇보다 지금까지 일궈왔던 모든 터전이 사라진 이역만리의 타지다. 내 집에서 당연했던 내 명의의 모든 것(물론 그에 따르는 엄청난 비용을 물어야 했지만)이 사라져 있다. 내 계좌, 내 집, 내 휴대폰, 내 신용카드, 내 인터넷 서비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몇 벌의 옷과 일용품이 전부다. 나는 여권 말고는 나를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외국인이 되었다.


약 1주일 안쪽의 여행자일 때, 나는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외국인이라는 점이 굉장히 좋았다. 한없이 자유롭고 편안했다. 가지고 있는 돈을 쓰고, 가지고 있는 시간을 쓰고, 누구에게도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거나 규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1주일의 고작 50여 배의 시간을 머무르는 상황은 이렇게나 다르다. 우리 가족은 필사적으로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정은 시작됐다. 그야말로 백치 상태인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에게 집을 넘겨주시는 남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셨다. 차가 없으면 집귀신이 되어야 하는 이곳에서 발도 되어주셨다.


맨 먼저 우리는 우리가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우리가 입주할 아파트의 관리사무소에서 정식으로 입주 계약을 맺었다. 남편이 안드레아 양과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한국의 아파트에는 없는 '클럽 하우스'를 둘러보았다. 간단한 피트니스 시설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실(공짜 커피와 소파, 있음)이 있고 지하에는 주민들이 사용하는 유료 세탁실이 있다. 계약이 끝나고 클럽하우스에 출입할 수 있는 토큰키를 받아들고 나서 부지런히 엉덩이를 떼어 단지 입구에 있는 은행으로 갔다.

관리사무소가 참 이쁘네요~

개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은행


은행은 CHASE라는 곳이었는데, 특별히 이곳에서 계좌를 트기로 한 이유는 굳이 말하자면 지점이 흔해서... 옅은 갈색머리에 눈이 파란 호감형 은행직원 브랫의 응대는 그럭저럭 친절했다. 이곳에서 우리가 방금 만들어 온 계약서가 빛을 발했다. 집도 절도 없는 외국인에게 호락호락 계좌를 주지는 않더라는 거지. 체크카드(debit card)를 내 것도 만들려고 하자 아파트 계약서에 내 이름도 넣어야 한다고 해서 다시 사무소에 가서 내 이름을 넣은 계약서를 고쳐 만들었다. 카드는 휴일이 껴서 나오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고, 우리는 남 선생님이 타시던 카롤라를 물려받기 위해 부지런히 다음 퀘스트로 이동했다.


다음 퀘스트는 바로 자동차 보험 가입. 국제운전면허증은 준비해서 왔지만 보험 가입이 안 된 상태로 차를 몰다가는 어떤 흉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는 판이었다. 가장 지점도 많고 서비스도 평이 좋다는 AAA에 도착한 것까지는 순조로웠지만 거대한 태클이 걸렸다. 아직 미국 면허가 없어 가입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기준은 올해 바뀐 것이라 미안하다며, 여러 회사의 보험을 에이전시에서 중개하는 회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어디에 가나 주차공간이 남아돈다... 대박...


급하게 또 남 선생님 집밥을 얻어먹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소요돼서 미안함을 무릅쓰고;; 처음 갔던 트리플에이에서 기준에 적합해지면 위약금을 물고 이쪽으로 다시 보험을 옮기라고 하길래 웬 자신감? 딴 데 들면 그냥 쭉 가겠지... 하며 소개해준 에이전시로 갔더니 보험료가 풍문으로 들은 것보다 두 배! 첫 달에는 무려 거의 300불에 달했다. 아... 그래서... 설상가상 이 회사에서는 현금을 받지 않아서 전자계좌이체가 필요했는데 체이스 계좌에 부랴부랴 넣은 돈이 전산상으로 움직여지지 않아서 이 악물고 한국에서 갖고 온 신용카드 사용;;

가정집 같았던 에이전시 사무실


차량 이전을 위해 시청에도 들르고 인터넷과 케이블 명의 이전까지 쉴새없이 달린 후에 남편이 이제 완전히 우리 차를 몰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오후에는 시차 덕분에 미친 잠이 쏟아져서 뭐가 뭔지 알 수도 없었다.

인터넷과 케이블 티비 업무를 해결한 마지막 미션 포인트


아파트는 이사 나간 후 청소를 거쳐 입주하기로 되어 있지만 일단 문서상으로 집과 차가 생겼다. 미국 면허만 있으면 나는 매우 확실한 신분이 된다. 면허 따지 않고 버티려고 했는데 돈이 걸렸으니 선택의 여지 없음. ㅠ


정착 임무 중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애 학교 보내기 전에 건강 체크와 언어 능력 체크' 항목은 아직 텅텅 비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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