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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Jan 03. 2016

해피 뉴 이어

사교생활 희노애...

미국에서 새로 맞이하는 새해에 대해서 특별한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도착한 지 열흘 정도가 지났지만 그럭저럭 건방지게 이곳 생활에 대한 일종의 '판단'을 끝낸 상황인지라, 우리가 타임스퀘어에 가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고 나서 열렬하게 뉴이어 키스를 나누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12월 31일에 잡힌 남편 동료 가족과의 포트럭 파티는... 비관적이어서 기대치가 낮은 나에게도 참 실망스러운 이벤트였다.


다른 가족들이 속속 자신들이 만들어 가져오겠다는 음식 이름을 댔다. 김밥, 닭볶음탕, 해물 토마토 스파게티. 재료적 측면에서 꽤 노력이 필요한 아이템들이었다. 나는 엘에이 갈비를 할까 했지만 집에 있는 간장 양이 간당간당했고, 아시안마켓까지 두 번 장을 보는 게 엄청 귀찮았다. 그래서 나는 죄책감을 조금 느끼면서 디저트로 케이크와 과일을 맡았다.


내가 지금 죄책감이라고 했나요? 우리 가족이 먹는 과일 양과는 차원이 다른 다섯 종류 과일을 모두 씻고 껍질을 벗기고 잘라서 포장하는 데에 꼬박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나중에는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더라. 평소 팔 아픈 요리는 질색인데, 고추잡채를 만드는 게 덜 팔 아팠겠다.


파티를 하러 가는 남편의 발걸음은 마치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사람과 술을 좋아하는 그가 가족 얼굴만 보며 지낸 며칠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도 힘들었다) 파티 장소는 우리 중에서 가장 넓고 최근에 리뉴얼한 아파트에 정착한 모 부장님의 집이었다. 우리 동네보다 확실히 고급진 분위기가 멋졌다. 거실이 충분히 넓어서 파티를 하기에도 무리가 없었고 리뉴얼 덕분에 집의 디테일이 훨씬 편리하고 신식이었다. 정착 업무를 보면서 병원이나 관공서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처음으로 느긋하게 와이프들끼리 인사도 나눴다. 네 가족이 모두 아들만 있어서, 다섯 명의 애들이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았다.


사람을 몹시 가리는 나로서는 용띠 셋이 입을 모아 "언니~"라고 하는 상황이 쉽지 않았지만, 되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집 부부가 그렇게 대단한 주당만 아니었더라면 그날의 파티는 맛있는 음식(엄청 남았다;;)을 즐기며 재미있는 화제가 오가는 좋은 자리로 마무리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거의 페트병만한 잭 다니엘이 다 망쳤다. 오는 술을 사양하지 않고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내 남편은 폭탄주를 물처럼 마시다가 만취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취했으면 모 과장님처럼 쓰러져 잠이나 잤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속상해서 그만 쓰기로.


다음 날인 새해 첫날 아빠는 숙취로 쓰러져 있었고, 엄마는 앙금이 남아 이를 갈았고, 아들은 심심해서 몸을 꼬았다. 나가서 쇼핑을 할 가게도 열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하나 건진 게 있다면, 앞으로 적어도 보름 정도는 그가 '모임' 얘기를 입에 담지 않을 것이며, '여자들끼리 네트워크를 결성하고 네가 제일 연장자니까 책임을 맡아' 같은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새해 첫날 이불 빨래를 한국식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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