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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Sep 25. 2015

선생님, 글쎄요

잡무 추가가 싫으신 건 이해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학기초에 아무래도 담임에게 완전히 찍힌 모양이었다. 일단 주체할 수 없이 나서는 성격을 따라 3월에 임원이 되었고, 나는 반장이 아니니 다행이지 심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임원 엄마들 인사에도 빠졌고 상담을 갈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려 4월에 전화 상담을 요청드렸다.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담임은 내 아들에 대한 엄청난 견해들을 쏟아내셨다. (아들을 맡은 지 한 달 남짓 된 시점이었다) "항상 전쟁, 죽음을 생각한다." "항상 피씨방에 다닌다." 담임의 말에 의하면 아들은 곧바로 치료를 시작해야 할 이상한 애였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아이를 붙들고 살짝 격렬한 대화 시간을 가졌다. 아들은 담임을 좋아하지 않으며, 홧김에 국어 교과서 연습문제에 '선생님이 죽으면 기쁘다'라는 문장을 쓴 것이 사실이며, 몰래 피씨방에 간 것도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냥 그때의 기분이 그랬고 놀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이 다라고. 아들과의 일상이 가능할 정도가 되기까지 시간은 꽤 걸렸다. 그 사이 나는 아들의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 친한 엄마에게 의논을 해보았고, 상당히 고지식하고 한번 찍은 학생에게 집요하게 '관리'를 하는 타입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표적이 옮겨가기 전에는 숨만 쉬어도 지적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만하고 말 잘 안 듣는 남자애들이 그 대상이 된다고.

나는 슬프지만 아들에게 "세상에는 너와 안 맞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일정 시간을 함께 지내야 할 때가 있으니 그것을 견디는 것도 삶의 일부분이다."라고 얘기했다. 아들은 이미 13살, 자신이 생각하기에 공정하지 않은 어른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도록 하라기에는 머리가 굵어져 있었다.

가을이 되고 출국이라는 이벤트를 앞두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담임과 아들의 전학에 대해 의논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싫은 건 좀 피하고 싶은 연약한 사람이라 언제가 좋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아들이 학교에서 담임에게 12월 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날 오후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니 당황하신 건 이해하지만, 처음부터 다짜고짜 "초등학생이 외국에 나가는 것은 모든 경우가 불법입니다." (선생님, 제가 꼴랑 1년을 조기유학시키려고 무리수 두는 게 아닙니다...) "그쪽에서 1년 중학교를 다녀도 학력이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남은 수업일수는 전혀 인정되지 않을 것이고, 무단결석이기 때문에 출석 통지를 빈집으로 보내야 합니다." 이런 얘기뿐이었다. 아들의 미래나 곧 바뀌는 환경에 대한 배려, 축복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어머님께서 잘 알아보셔야 합니다."라고 할 뿐, 도와주겠다는 말 역시 없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울화가 치솟았다. 아들은 지금까지 욕설이나 폭력으로 사건을 일으키거나 학교 기물을 심각하게 파손한 적도 없고, 공부도 꽤 잘했다. 담임의 입으로도 "친구들과 매우 잘 지냅니다."라고 했으니 교우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이지 담임으로서 실격 아닌가.

내가 하소연하자, 남편은 자신이 직접 교육청에 전화해서 잘 문의하겠다며 나를 달랬다. 우리 둘 다 가능하면 (비협조적인) 담임의 도움은 최소한으로 받으면서 행정절차를 마무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교육청에 문의한 결과, 이 사람들 역시 "담임에게 문의하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학교에서 인정해야 하는 '면제신청서'라는 서류가 필요하다나. 한 마디로 학교에서는 교육청과 돌아와서 진학할 중학교에 물어보라고 했고 교육청은 학교 소관이라고 했다. 다 자기 일 아니라는 태도다. 매우 흥미진진한 시스템이다. 어떻게 풀릴지, 매우 기대가 된다. 좋은 나라다. 돌아오고 싶지 않아질 만큼 아름다운 천국 같은 나라.

남편이 휴가를 사용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청에 모두 투어를 하겠다고 또 나를 달랜다. 내가 담임과 싸우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난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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