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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Mar 16. 2016

노력이 보인다

처음으로 데이트한 날

요새 남편과 아들에게 나는 "노" 여사가 아닐까.

골프용품, 옷 사줘~ 노! 신발 메이커로 새로 사줘~ 노! 사줘사줘와 노로 반복되는 대화 속에서 나는 실로 유학생의 빈곤한 살림을 책임지는 여전사로 거듭나는 중이다. 당연히 두 사람에게 나는 별로 인기가 있을 리가 없다. 나도 살짝 구질구질한 나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기도 하지만, 청구서가 하나 올 때마다 뜨어~ 하면서 놀라다 보면 말이죠. (세금이 붙고 나면 어마어마해지는 각종 요금들;; 관리비에 해당하는 물과 전기세는 154불, 휴대폰 요금은 105불, 인터넷과 케이블 요금은 90불이 나왔다)


어쨌든 노노노노노! 아껴야 잘 살지! 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의 봄방학이 시작되자, 솔직히 좀 짜증스러웠다. 돈 아끼라고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는 내 심정은 아랑곳없이 남편은 입장료가 (데이라이트 세이빙 타임이 시작되며 여름 요금) 평일 10달러, 주말 15달러쯤 하는(미국 전역에서 가장 싸다고 함) 라운딩을 매일 나가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건강한 취미인 건 맞으니까 많이 제한하고 싶진 않은데, 연습장에 좀 가지 자꾸 라운딩을 하려고 하니까(연습장은 이미 1년간 회원이라 무료) 짜증짜증. 나는 몇 불 아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야속하게도 날씨는 겁나게 맑고.


그런데 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남편은 정말 엄청나게 노력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달래려는지 식사할 때마다 오버해서 정말 맛있다고 칭찬을 쏟아내고, 스킨십도 잘하려고 하고, 티가 나게 내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화요일에는 4총사의 라운딩이 잡혀 있었는데, 둘이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자고 하자 흔쾌히 그 약속을 취소했다(화요일에는 반값 할인을 하는 영화관이 있어서 반드시 화요일을 원함). 솔직히 21년간 얘를 알고 지내면서 내가 '순위가 밀리지 않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진짜 놀랐다. 대망의 화요일이 되고, 나는 아예 영화가 싸니까 오전에는 데드풀, 오후에는 (나는 봤지만 또 보고 싶은) 주토피아를 보자고 했다. 외출 전에는 공들여 화장을 하고 원피스에 핸드백에 하이힐을 꺼내 신었다. (미국 와서 처음)


날씨는 기가 막혔다. 나가서 공을 치고 싶을 날씨였다. 남편은 다정하게 내 옆에서 같이 영화를 봤다. 원래는 알뜰하게 근처 몰의 푸드코트에서 스티로폴 용기에 담긴 중국식 볶음밥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기분이 좋아져서 영화관 옆에 있는 바(낮에는 런치 영업)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9불짜리 런치 메뉴가 상당히 알차서 기분 좋게 식사를 즐기고 나서 오후 영화 대신 소원소원하던 옷을 사주러 갔다. 윈드브레이커와 티셔츠와 반바지를 할인하는 걸로 고르고 골라 사 입히니까 또 얼마나 좋아라 하던지, 진심으로 유명 브랜드로 못 사준 게 미안해질 정도였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나는 마법이 풀린 아줌마가 되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라운딩은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연습장은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동안 시니컬해지고 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에도 '사랑받고 싶은 아내'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다 '노력'해서 나온 행동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 '노력'이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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