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아이돌 음악도 여전히 사랑하오
사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관심이 깊은 편도 아니었다. 일단 '소녀형' 허영심이 좀 있는 우리 엄마 덕분에 어려서부터 가끔씩 음악회는 같이 가서 봤지만, 나를 그런 곳에 데리고 갔던 엄마도 클래식 애호가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특히 현악사중주 같은 걸 보러 가면 모녀가 사이 좋게 숙면 모드 취하기 일쑤...) 나이가 상당히 들고 나서는 댄스가수 수니질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더더욱 클래식하고는 멀었는데, 어쨌든 음악이 주된 테마가 되는 예술작품은 꽤 좋아했다. 특히 클래식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아리아. '가면 속의 아리아'라는 영화는 정말정말 좋아하는 영화고,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여주인공이 부르는 '꽃에서 꽃으로'는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랑한다.
그런데 일단 목소리가 안 나오는 음악 쪽으로 가면 걔가 얘 같고 얘가 걔 같고... 잠만 안 들면 정말 다행이다 싶은 정도의 평범한 음악 취향을 가지고 지냈는데, 30대 후반부터는 어렸을 때 배웠던 바하의 인벤션에 새삼 홀릭하기도 했다. 다시 피아노를 만지면서 시도도 해보고 ㅎㅎ(어렵습니다...) 어렸을 땐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졌던 바하가 너무나 오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 단정하고 조화로운 음악은 깨발랄한 천재형 모짜르트하고는 달리 내 범인(凡人) 콤플렉스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한 3년 전이지, 그림을 기차게 그리는 내 담당 작가를 데리고 새 작품 기획에 들어가게 됐다. 아름다운 남자의 선이 드러날 수 있는 작품으로 하자고 그 사람을 꼬셨다. 딱 두 가지 이미지가 마음에 있었다. 하나는 흰 셔츠를 입은 미남자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었고 하나는 발레리노였다. 사실 음악 만화 쪽이 더 당겼는데 다행히 그 사람도 그쪽으로 마음을 맞춰주었다. 둘이서 신나게 취재를 다녔다. 악기를 바이올린으로 정하고, 아는 인맥이나 인터넷 검색을 총동원해서 공방에도 가고 연주자도 만나 인터뷰도 진행했다. 작가도 나도 악기 연주나 음악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에 가까웠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지만, 몇 달 준비를 거쳐 드디어 그 만화 연재를 시작했을 땐 정말이지 나하고 그 사람을 한꺼번에 쓰다듬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람의 목소리가 없는 공연에 가도 졸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연주자가 활을 당기는 모습이나 각각의 자세나 버릇이 다른 점, 지휘자와 연주자가 나누는 신호 같은 것, 그런 걸 보는 것도 재미있어졌고 무엇보다 기계를 통해서 듣는 소리와 현장에서 직접 악기를 대면하고 듣는 소리가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연주의 수준을 논할 정도는 못 되고 티켓을 막 사들일 형편도 아니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료나 저가형 시민 대상 공연을 보는 정도지만 그게 참 좋아졌다.
미국에서도 공연이나 스포츠 관람 비용은 세다. 슬프게도... 대학농구 티켓도 50불이고 이 시골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오페라하우스에서 하는 뮤지컬 티켓은 100불이 넘는다. 한 번쯤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여기 와서 유학생 마누라 역할에 몰입하다 보니 나 자신에게 그런 돈을 쓰는 게 좀 마음 편하지 않아서(영화도 반값 할인하는 요일에만 본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 동네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대학교의 음악당에서 15년말에서 16년 초까지 정기적으로 6번의 음악회를 무료로 개최한다는 것을 참 늦게! 알았다. 그래서 시즌이 끝나기 전 두 번의 공연만 볼 수가 있었다. 중학생 아들은 분명하게 그 공연에 흥미가 없음을 밝혔기 때문에 나도 미련없이 혼자 갔다. 오케스트라는 대학교의 음악 학부 및 꽤 진지한 취미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하고, 객원 솔리스트가 1부 공연을 하고 2부에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하는 형식이었다.
무료 공연이다 보니(게다가 시골...) 아주 유명한 솔리스트가 오는 건 아니지만, 3월에 온 분은 한국계 미국인인 데이비드 킴이었다. 1부에서 솔리스트로 연주를 하고 나서는 2부에서는 오케스트라석에 같이 앉아서 연주를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4월의 피날레 공연의 마지막 레파토리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오오... 교향곡 중에서는 가장 핫하시다는 그분!! 3월 공연이 끝났을 때부터 한 달 동안 매우 두근거리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고 나는 나름대로 정중한 관객의 드레스코드를 맞춰 입고 공연장인 싱글터리 아트홀로 향했다. 이 시즌의 마지막 공연인 데다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에 출연하는 합창단이 대규모이다 보니 그 가족... 많이 오신 듯, 지난번엔 70퍼센트 정도 찼던 객석이 이번엔 완전히 만석이 되었다. 1부의 솔리스트 네이선 콜은 이 도시 출신인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역시 시즌 피날레에 부른 이유가 확실하달까.
사람은 많은데 냉방은 셌다. 7부 소매 원피스에 스타킹을 신고 갔는데 정말 엄청 추웠다. 게다가 갑자기 소화불량까지 와서 뱃속도 부글부글.... 관람을 즐기기에는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고 옆에 앉은 S씨 가족 구성원 중 어린 소년들은 온몸을 비비 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여리게 시작해서 씩씩해지는 9번의 1악장부터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느린 3악장은 약간 지루했지만, 1, 2, 4악장 모두 정말 짱이신 듯!! 유명한 환희의 노래(합창)가 들어가는 4악장이 시작되고 나서는 그 유명한 주제부가 굉장히 여러 번 반복되는데, 문득 베토벤 아저씨가 이 멜로디를 생각해내고 막 자기 연성에 흐뭇해가지고 좋아라 마구 변주와 반복을 하는 존잘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서 꽤 귀엽기까지 했다. ('전문용어' 죄송합니다. 저 트잉여에 덕후 맞아요. ..)
장엄하고 벅찬 베토벤 아저씨의 인생작을 잘 감상한 후에, 일어나서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인사하는 지휘자 및 기타 등등 여러분께 박수도 많이 쳐드리고(공짜로 봤으니 박수라도 많이 드리고 싶었음) S씨 가족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 말 집에 가기 전에 다음 시즌 시작 공연쯤은 볼 수 있지 않을까, 미리 기분이 들뜬다.
어느 음악가의 음악이더라, 이게 몇 번이더라, 항상 헛갈리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곡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음악이 좋다고 말해도 되겠지? 정말 좋으니까.
- 제가 위에서 얘기한 만화는 정설화 작가의 '더 콩쿠르'입니다. 아주 작은 아이디어가 멋진 작품이 되게 해주어서, 내 만화 편집 인생에서 손꼽을 뿌듯한 작품을 만들어줘서 작가님을 매우 애정합니다. 어쩌다 이거 들어와서 보신 분은 검색해서 온라인으로 함 봐주시고 혹시 마음에 들면 책으로도 나오고 있으니 구입해주세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