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방인 동지들
며칠 전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은 내 처지에서 유일하게 얼굴을 내밀던 프로그램인 컬처 커피 아워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제이미(담당 카운셀링 교직원)는 어지간히 이 동네가 싫은 티를 내더니, 마지막 시간인 그 날은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내버렸다. 주제를 보니까 '이 학교(도시)의 좋은 점과 나쁜 점, 극혐인 점, 그리고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제이미가 싫을 만도 하겠다. 욕을 랩처럼 할까 봐 자신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간인 그 날에는 평소에도 출석을 계속 하던 이 동네 미국인 1학년 니콜(얘는 대체 여기 왜 오는지 모르겠다...)도 왔고, 지난 시간에 처음 왔던 중국인 의사 선생 데이비드도 왔다. 매사 조금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는 루마니아 출신 아무개도 전에 본 얼굴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인 날에 아시아계 캐나다인 그레이스와 한국인 유학생 부인도 처음으로 참석을 했다. 중간에 들어오는 바람에 자기소개를 못한 남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터번을 감고 있었다.
땜방 진행자 크리스틴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진행을 보여줬는데, 감정 표현이 많던 제이미에 비하면 재미는 덜했다. 그리고 이 날따라 학교의 공사 소음이 너무 극심해서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기도 했다. 나는 이 동네의 푸른 잔디가 좋다고 했고, 쓰레기 문제와 젠틀하지 않은 운전이 싫다고 했다. 데이비드는 자기가 다른 도시 클리닉에서 근무할 때, 상사에게 생일선물로 총을 선물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식겁했다는 이야기를 공유했다. 외국인들은 모두 경악하는 분위기고 미국인(둘)들은 살짝 창피해하는 분위기. 매우 common하지는 않지만 acceptable하다는 것이 이 동네 미국인의 해설이었다.
누군가가 좋은 점 쪽에서 '사람들이 친절하다'라고 말을 했는데, 나쁜 점 파트에서 파란 터번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터번을 감고 사는 자기 생각은 다르다고. 사람들은 자신에겐 친절하지 않다고 매우 담담하게 얘기했다. 터번을 감았다는 이유로 자신은 무슬림으로 분류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차도 훼손되고 폭행을 당하는 일이 실제 많다고. 일단 자신은 터번을 감았지만 무슬림이 아니라고 했다. 무슬림에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사막 지역에서 실용적인 이유로 터번을 감으며, 종교적인 이유로 터번을 감는 자신들(시크교도)과는 감는 모양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파란 터번의 터번은 앞쪽이 매우 뾰족하게 솟아 있다) 그는 차분하게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인에게 중국인이냐고 묻는 경우를 봤다며, 그럴 때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경험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며, 서로를 많이 이해하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수업의 마지막 부분은 이 나쁜 점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였는데 솔직히 그건 웃겼다. 외국인인 우리가 쓰레기 정책이나 전선 매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란 소린가. 크리스틴은 겨우 'meet up'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며 역시 시간에 맞춰(제이미는 흥분해서 수다를 떨다가 시간을 10분 이상 넘기기 일쑤였다) 형식적으로 마지막 컬처 아워를 끝냈다. 아무리 땜방이라도 이 시간의 핵심인 커피도 안 가져오고, 쳇.
수업이 끝나고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그 유학생 부인과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신혼인 그녀는 남편이 한국사람이긴 하지만 이곳의 시민권자라는 점을 매우 강조하며, 새로 시작하는 미국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와서 1년 정도 산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아주 낯설지는 않다고 하며 매우 발랄하게 웃었다. 가끔 이렇게 미국이 맞춤옷처럼 맞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부러워졌다가(여기 생활이 신날 것 같아!) 이렇게 좋은데 여러 상황 때문에 눌러앉을 수 없다면 얼마나 슬펐을 것인가 안심하기도 한다.
어쨌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학교 구경을 하던 이벤트가 끝나서 좀 서운하기도 하다. 얼마 전엔 무료 음악회 이벤트 시즌도 끝나고... 학기말의 분위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가족끼리 보대끼다 지겨워서 기절하는 여름날이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