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쓰기 개쉬움
미국 오면 아울렛이 예술이라며, 여기 오자마자 입에서 입으로 아울렛의 전설이 전해졌다. 다들 정착하고 나서 한 달 안에는 꼭 신시내티의 대형 아울렛이나 심슨빌 아울렛을 찍고 왔다. 넉 달이 되도록 그 개미지옥에 발을 들이지 않은 나는 나름 참 독한 년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나도 오늘 드디어 S씨와 함께 아울렛 데뷔를 해냈다. (사실 그동안 내가 돈이 남아나서 브랜드 정상제품을 사며 산 건 아니고, 시내에서 떨이를 찾아 나름대로 아끼며 사며 살았다)
신시내티보다 40분쯤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이 동네 사람들은 여길 많이 가는데,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이름난 여주 아울렛 상가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다 보니 나에겐 아주 대단히 신선한 관광지였다. 입점한 브랜드는 생각나는 대로 구찌, 마이클 코어스, 코치, 갭, 바나나 리퍼블릭, 아식스, 등등등이 있는데 확실히 샤넬이나 프라다 그런 류의 초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는 없다. 도착했을 때에는 아울렛이 막 문을 여는 10시였다.
나의 쇼핑 리스트 1순위는 크록스였다. 얼마 전에 티제이맥스에서 아주 단순한 모양과 색상을 발견하고 애아빠한테 18불 정도 주고 사다 줬는데(나와 애 사이즈 없었음) 그건 이런 거였다.
근데 오늘 간 크록스에는 정말로 다양한 신발이 있었다. 나는 솔직히 지금까지 크록스는 다 남편 것 같은 종류뿐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나 다양한 종류와 색상이 있었다. 그리고 아울렛 매장인데도 비쌌다. 미국 브랜드가 아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결국 가장 싼 것이 30불 정도, 30불 정도 선에서 고른 아이와 내 것이 합쳐서 48불 들었다. (두 켤레째는 50% 할인 받음) 실제 발은 235 정도인 내가 맨발에 딱 맞게 신으려고 여자 8사이즈로 구입, 아들은 좀 크게 남자 8로. 크록스는 남녀 사이즈를 병기해놓는다.
크록스에서는 솔직히 가격대가 다 비싸서, 아울렛에 왔다는 흥분과 행복은 잘 느끼지 못했다. 이번 여름에는 크록스 신겨준다고 약속한 것 때문에 지르긴 했지만... 오래오래 신어야지 다짐을 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 아들이 미쳐 있는 나이키로 갔다. 우리 아들이 최근에 그렇게 미친 쇼핑을 하지만 않았어도 거기서 놈이 좋아할 만한 티셔츠나 바지 등등을 관심 있게 봤을 텐데 그것은 모두 패스, 나는 나를 위한 러닝 팬츠를 봤다. 여기서 여자들이 정말 많이 입는 딱 붙고 무릎을 적당하게 넘어가는 요가팬츠 같은 건데, 전에 스포츠매장에서 봤을 때엔 아무리 싼 클리어런스 제품도 다 40불 정도 나가길래 여기서 좀 더 싼 걸 찾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봤다. 하지만 이 매장에서 발견한 20불짜리 클리어런스 팬츠는 너무나 색상과 무늬가 난해해서 도저히 어떻게 맞춰 입어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소녀 사이즈 중 가장 큰, 기본 중의 기본 까만색 팬츠를 샀다. 26불이었다.
그리고 나서 아디다스에 갔는데 클리어런스에서 6달러 싼 것을 발견하고 개흥분했만 안타깝게도 시착 결과 사이즈가 안 맞아서 클리어런스가 아니라 가격은 같고 무늬가 있지만 아까 산 것보다 길이가 살짝 짧아 마음에 드는 팬츠를 샀다. 160센티에 정상체중인 나는 M. 골프에 미친 남편이 필드에서 신으라고 골프 양말도 샀다.
그리고 아베크롬비에 들어갔다. 매장은 어둡고 직원은 기운 없었지만 겨울 제품 클리어런스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그렇지! 정가 120불이었던 보아털을 촘촘하게 댄 후드 집업이 단돈 21불에 팔리고 있었다. 재빨리 집었다. 애와 내가 같이 입을 수 있는 남자 XS 사이즈.
사실 예정에도 없던 이 아베크롬비 후드 재킷을 21불 주고 샀던 이때가 가장 하이해진 시점인 것 같다. 이미 오전에 산 것들은 차에 넣어두고 피자로 허기만 때웠다.
깔끔하게 나이키에서 환불을 마치고 폴로 랄프로렌을 사랑하는 S씨와 폴로 매장에 갔다. 애들 클리어런스에서 additional 40% off라는 사인을 보고 혼란에 빠졌는데 (가격표에 이미 할인 가격 표기가 있음) 진짜 행복하게도 할인된 가격에서 또 40%라는 얘기였다. 지금은 입을 옷 많으니까 아들놈 내년에 입을 만한 옷을 10불에 득템. boy 18~20으로 표기됐는데 지금 160센티에게 살짝 크다.
이때부터는 예정에 없던 건 사지 말자는 기특한 사상은 있었던가 없었던가... 내 발로 다운파카를 사냥하러 노페에 들어갔다. 다운 파카를 발견하고 매의 눈으로 가격표를 보니 가격이 170불 정도로 할인되어 있었다. 이 정도로 내 지름을 자극할 순 없지... 하며 매장에서 나오려는데 눈에 띄는 그 익숙한 멘트, additional... 50%! 그 순간 호흡이 거칠어졌다. 노페 구스다운을 10만원 정도에 장만해뒀다가 브랜드 파카를 사달라고 중학생이 진상 시전을 할 때 휙 던져주면 2년 정도의 겨울은 버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사이즈는 물론 미래를 내다본 남자 성인 M.
사실은 이거 말고도 한 달 후 남편 생일에 주고 조용히 만들기 위해 언더아머 골프티도 샀다. 약 42불. 아울렛에서 산 거치곤 비싸서 속쓰렸지만 미국 와서 제일 남자들이 좋아하는 비싼(나이키보다 비쌈) 브랜드라서... 180센티 키에 보통 체격 남편은 여기선 L.
결론; 이 모든 것을 사는 데 한화 약 30만원이 들었다. 그리고 아울렛은 강철 같은 나도 완전히 함락시켰다. 돈 쓸 때가 아닌데... 같은 합리적인 생각은 저멀리... 일부러 철없는 아들들을 떼놓고 갔는데도 무시무시한 지름이 찾아오더라. 여름에 한국에서 가족 방문이 있기 전까진 아울렛 절대로 안 가기로 결심했다. ㅠ
고작 한 번 가지고 건방지게 팁을 주자면, 쑥스러워도 시착은 야무지게 할 것(시착실 전담 직원이 없어서 누가 와서 문을 따줘야 하는 경우가 많음) 직원에게 문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돈 없으면 절대 얼씬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