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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Jun 01. 2016

정 집사님과 만두

갑자기, 뜬금없이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을 하기도 전에 S가 주고 간 뿌셔뿌셔가 갑자기 충동을 일으켜서 그걸 한 봉지 먹고 아침에 남겨두었던 스무디를 하나 저어서 마시는 것으로 끼니를 성의 없게 해결하고 나서 또 폐인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내 문을 두드리던 S도 없고, 아마존에 배달시킨 물건도 없는데 문을 두드릴 사람은? 기껏해야 관리소의 소독하는 아저씨려나. 아니면 윗집에서 또 뭔가 먹을 게 있다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문밖을 내다보니, 푸근한 인상의 50대 한국인 아줌마가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한국이라면 절대로 문을 열지 않았겠지만 이곳에서 한국인에 대한 경계심은 많이 낮아진 상태라 문을 열었다. 그녀는 손에 김밥 두 줄과 빚어놓은 만두를 한 접시 들고 있었다. 내가 누구시냐고 묻기도 전에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졌다.


"아니, 보영이 엄마가 밑에도 한국사람이 산다고 해서, 같은 한국사람끼리 좀 알고 싶어서요. 교회 다니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잠깐만! 나 이것 좀 갖다줘야 해. 따라와요. 소개시켜줄게요."


뭐에 홀린 것처럼 달려나가는 그녀의 등을 따라나가자, 주차장에 세운 SUV에서 내가 신세졌던 선교센터의 교회 사모님이 내렸다. 서로 아는 얼굴이라 인사를 나누자, 그 낯선 아줌마가 오히려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신기해한다. 만두와 김밥을 사모님에게 건네주면서 또 아줌마는 랩을 시전한다.


"사모님! 우리 딸 아틀란타에서 집 팔아야 하는데 기도 좀 해주세요! 잘 되게 해달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사모님이 차를 몰고 떠나자, 또 바쁜 걸음으로 다시 아파트로 달려들어오면서 설명이 시작됐다.


"내가 시내 좀 바깥에서 밭을 크게 하거든요. 깻잎도 키우고 열무도 키우고 언제든지 와서 가져가도 돼. 오늘은 내가 만두를 좀 많이 만들려고 부추 다듬어서 준비를 다 해왔어요. 지금 보영이네에서 만들고 있는데..."


이쯤에서 나는 홀린 듯이 '아, 저 시간 많은데 가서 같이 빚을까요.' 하고 만다.


"일 시키려는 건 아니고, 같이 가요. 얘기도 하고."


보영이네(윗집) 문을 왈칵 열자, 앞집 범식이 엄마와 보영 엄마 K가 만두소가 담긴 커다란 양푼 앞에서 만두를 빚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그럭저럭 잘 아는 사이다. 우리 집 문을 무작정 두드린 이 아줌마만 빼고. 나는 서둘러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만두 제작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가 만두 빚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속도나 모양이 매우 만족스러워서 얼떨결에 온 것치고는 꽤나 도움이 됐다. 아줌마는 호들갑을 떨며 빚어진 만두를 삶으러 옮기기도 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의문의 여인 정 집사님은 미국에서 산 지 25년이 된 분으로, 미군 군속이었던 나이차 나는 미국인 남편과 한국에서 만나서 부모님 반대를 다 물리치고 결혼해서 미국으로 왔다고 한다. 외동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한 마디로 무지무지 한가하다고.


"엄마가 할머니 기차표를 사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 길로 서울 친구한테 놀러 올라와서 남편을 만났지. 사람이 정말 착하더라고. 다시 내려가서 한 몇 달 있다가 친구한테 놀러가겠다고 허락을 받아 다시 서울로 왔다가... 집에 안 갔어요"


"딸이 너무 착해. 지나치게 착해서 엄청 가난한 남자를 만나서 온갖 뒷바라지를 하고 걔를 먹여 살리는 거예요. 너무 갑갑해서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몰라. 한동안은 사람이 만나기 싫어서 야채에만 매달렸어요. 딸은 남자친구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미워하는 내가 진짜 신자는 맞느냐고 공격하고... 그 놈팽이가 딸을 이용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사랑한다나! 그러다가 결국 두 달 전에 그놈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일자리를 구해서 떠나면서 헤어졌어. 내 기도에 응답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 망할 놈이 딸이 산 집에 공동으로 명의를 해놔가지고 그 집을 팔려는데 변호사를 만나야 해요."


"원래는 밭 같은 데 흥미 없었어요. 남편이 좋아해서 그냥 구경만 했어. 블루베리나 서양 호박, 아스파라거스 그런 거 기르는 거 멀뚱히 보기만 하고, 토마토도 따기 귀찮아서 그냥 버리고 막 그랬는데, 남는 걸 가지고 교회에 갔더니 사람들이 너무나 좋아하며 받는 거야. 사람들이 받으며 기뻐하는 걸 보다가 보니 점점 재미가 나서 씨앗도 구해다가 싹 한국 야채로 갈아버렸어요. 상추, 깻잎, 고추 다 아주 많아요. 와서 따기만 하면 돼요."


"남동생네 아들이랑 딸, 여동생 딸이랑 셋이 와서 여기 사립학교 다니면서 우리 집에서 2년 넘게 살았어요. 애들이 비슷한 나이라서 많이 부딪치게 되잖아요, 공평하게 하려고 해도 애들이 영 억울해하고 그랬어요. 결국은 올케도 건너와서 1년 반 정도는 아예 같이 살았어요. 뭐가 힘들어? 방도 많이 남는데. 나는 할 일이 생겨서 좋고, 지금도 애들 보고 싶어요. 또 와서 공부하라고 꼬시는 중이에요."


"딸이랑 쌓인 마일리지로 여행하고 싶은데, 딸은 영 심드렁한 눈치야. 엄마가 가고 싶으면 가자고. 그래요? 엄마랑 여행하는 게 별로인 거예요? 나는 친구랑 여행하는 것보다 딸이랑 여행하는 게 좋은데. 지금 내 기도 제목은 딸이 아틀란타에서 집 팔고 나면 우리 집으로 다시 오는 거예요. 여기도 병원 많고 취직하기는 쉬울 텐데 거기가 좋다며..."


만두를 다 빚고 나서도 정 집사님은 목이 쉬도록 수다를 계속했다. 나이 어린 우리 셋은 집주인이 연신 내주는 과일과 과자를 먹으면서 네네, 웃고, 대답하고, 흘끗흘끗 시계를 봤다.


부추가 억세지는 한여름이 되기 전에 모든 부추를 만두로 만들어야 한다며, 사먹는 만두와는 비교할 수 없다며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오늘의 다음 일정을 향해 떠나는 정 집사님을 보면서 할 일 없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슈퍼마켓에나 갈까 했던 계획을 취소했다. 3시간 동안의 열렬한 수다에 충분히 지친 덕분이다.


만두는 간이 슴슴하고 정말 맛있다. 재료값 분배에도 빠졌는데 품삯으로 열 개나 넘게 받았다. 앉은 자리에서 연신 갓 삶은 만두를 먹었던 것까지 하면 분에 넘치는 삯이다.


"이렇게 삶은 걸 말야, 냉동시켜놨다가 살짝 해동해서 기름에 튀겨 먹어요. 그게 젤로 맛있어."


만두를 먹을 때엔 그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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