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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page16~21


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page16~21






업무용 소로서


소는 그 용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홀스타인종, 저지종 등의 젖소는 많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유방이 크게 발달하도록 개량이 거듭되어 왔다.


그 결과 유방이 있는 뒷골격만 발달해 몸의 균형이 깨져 역할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또한, 헤어포드종, 애버딘 앵거스종으로 대표되는 육용 소는 빨리 성장하고 살찌도록 개량된 것으로(조숙조비), 육질이 좋다. 반면, 역용으로 필요한 충분한 체격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단점이다.


반면, 조선소는 육용 소에 비해 늦게 성숙하지만 몸통이 길고 근골의 발달이 양호하며, 특히 견인에 중요한 앞다리(앞발)가 충분히 발달해 역용 소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1960년 전후를 기점으로 농업 인구의 감소와 동시에 기계화가 진행되어 현재는 역용우라는 범주에 해당하는 소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소도 농경이나 운반에 쓰이는 소로서 일정 연령(대부분 경운 능력의 정점을 지난 8세 이상)이 되면 육용 소로 비육되었기 때문에 '역용 소'와 '역육용 소'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조선 소는 기본적으로 이 '역(육)용 소'로서의 조선 소를 말한다.



조선 소의 일 - 논과 밭을 경작하는 일


“소가 하는 일(역이용)에는 경전(논과 밭을 경작하는 것)과 운반(짐을 싣고 운반하는 것)이 있다.” 츠다 토모유키(津田恒之)『소와 일본인』(2000년)에서. 축산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지만, 여기서는 알기 쉽게 조선의 소가 어떻게 쓰여졌는지, 그 실상을 조선 소 기본 문헌을 따라 살펴보기로 한다.


농경사회에서 소의 가장 큰 역할은 논과 밭을 경작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소의 분뇨를 깔짚에 섞어 비료(거름)를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조선의 농업은 현재의 휴경선을 대략적인 기준으로 볼 때, 북쪽과 남쪽의 농업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물론 산간부인지 평야부인지 등의 조건에 따라 영농 형태는 달라지지만, 크게 보면 건조지대인 조선 북부에서는 면적당 인구밀도도 낮고 주로 조방적인 밭농사가 이루어졌고, 습윤지대인 조선 남부에서는 반대로 주로 집약적인 벼농사가 이루어졌다(조선총독부 식산국 『조선의 농업 사정』1930년).


북부 지역에서는 농가 한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헥타르(2마지기)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농업 노동력 부족은 가축의 힘으로 보충할 필요도 있었는데, 황해도의 광활한 평야지대 '벼농사도 혼재'한 곳에서는 소 '세 마리가 나란히 서서 한 마리가 쟁기를 끌고 논밭을 경운'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그림 21 참조).


모리타는 농민과 조선 소와 '한 마리 소'가 하나가 되어 특히 경작의 묘기에 이르러서는 완급을 조절하고, 회전(일방향 전환)을 신속히 하며,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목숨을 걸고 순교할 각오를 하고, 순교자망(殉敎者網)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리타 『조선소』)


조선소의 체격은 경작지가 넓고 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북부 지역의 것이 다소 큰 편으로, 수소의 경우 몸길이는 약 300cm, 몸무게는 약 370kg 정도이다.


반면, 남부 지역의 수소는 체고 약 210cm 이상, 체중은 약 300kg 정도로, 목 중간 부분(견갑골과 척추가 교차하는 부분(견갑부)까지의 길이)이 과거 조선 소의 1.5배에서 2배 정도이다.


이에 비해 당시 조선 소는 키도 다소 작고 몸무게도 절반 정도였지만, 그만큼 견인력과 민첩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농작업에 적합했던 것이다.



물론 산간부인지 평야부인지 등의 조건에 따라 영농 형태는 달라지지만, 크게 보면 건조지대인 조선 북부에서는 면적당 인구밀도도 낮고 주로 조방적인 밭농사가 이루어졌고, 습윤지대인 조선 남부에서는 반대로 주로 집약적인 벼농사가 이루어졌다(조선총독부 식산국 『조선의 농업 사정』1930년).


북부 지역에서는 농가 한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헥타르(2마지기)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농업 노동력 부족은 가축의 힘으로 보충할 필요도 있었는데, 황해도의 광활한 평야지대 '벼농사도 혼재'한 곳에서는 소 '세 마리가 나란히 서서 한 마리가 쟁기를 끌고 논밭을 경운'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그림 21 참조).


모리타는 농민과 조선 소와 '한 마리 소'가 하나가 되어 특히 경작의 묘기에 이르러서는 완급을 조절하고, 회전(일방향 전환)을 신속히 하며,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목숨을 걸고 순교할 각오를 하고, 순교자망(殉敎者網)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리타 『조선소』)


조선소의 체격은 경작지가 넓고 더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북부 지역의 것이 다소 큰 편으로, 수소의 경우 몸길이는 약 300cm, 몸무게는 약 370kg 정도이다.


반면, 남부 지역의 수소는 체고 약 210cm 이상, 체중은 약 300kg 정도로, 목 중간 부분(견갑골과 척추가 교차하는 부분(견갑부)까지의 길이)이 과거 조선 소의 1.5배에서 2배 정도이다.


이에 비해 당시 조선 소는 키도 다소 작고 몸무게도 절반 정도였지만, 그만큼 견인력과 민첩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농작업에 적합했던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조선 각지에서 소를 이용한 농경인 ' 우경(牛耕)'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논과 밭의 면적을 '일경(一耕)'이라 하여 며칠이 걸리는지 일수로 표시하는 관행도 생겼다. 이 면적 표시법은 해방(1945년) 전후까지 농민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물론 논인지 밭인지 등 농지나 토양의 성질에도 차이가 있고, 소의 능력 차이도 있기 때문에 '1일 경작'의 면적은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조국(일본)의 3반보에서 5반보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강대한 황소'는 하루 동안 논 3반보를 경작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肥塚『朝鮮之産牛』) 1반은 약 10아르(1백 미터 평)이다.


이 '하루 경작'이라는 척도가 조선 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은 조선의 농업에서 소가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옛날 조선 소를 이용한 경운 작업의 광경은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의 『경주는 어머니의 부름 나의 고향』(1984년)에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 귀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어 인용하고자 한다.



소에 삽을 메고 밭두렁을 오가는 아부지(아버지)의 모습이다. 삽은 무거운 삽처럼 생겼고, 흙을 갈아엎는다. 소는 침을 흘리며 입을 씰룩거리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소가 손을 멈추고 혀를 세게 차며 움직이라고 명령한다. 아부가 삽을 밀고 움직이지 않는 소와 함께 잡고 있는 그물로 소를 사정없이 때린다. 소는 아프지 않게 몸을 구부리기도 한다. 아부가 가끔 삽을 내밀면 어린 아이가 맨몸으로 서서 삽을 바라보는 나를, 밭둑길에 배를 내밀고 바라본다.


농부들이 소에게 쟁기를 끌고 경작하는 이런 광경은 조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 광경을 단순히 '목가적인 시골 풍경'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소녀가 풀을 뜯어 소쿠리에 담는 모습이다.


소녀는 꽃이 아니라 풀을 뽑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나중에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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