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살린 조선 소의 근대사 page21~23
물자 운반 - 다재와 다발
다음으로 조선의 소가 물자를 운반하는 데 어떻게 쓰였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소에 견인장치를 달아 짐수레를 싣고, 소를 싣고 가는 다바(駄載)의 경우 하루에 한 마리로 '약 50관(일관은 약 3.75킬로그램)'을 싣고 6, 7리(약 24~28킬로미터)를 갔다(모리타의 『조선소』).
현재 산장 등에 물자를 짊어지고 운반하는 '도보 운반' 작업은 보통 40km에서 50km 정도의 짐을 운반한다고 하니, 조선 소는 두 사람 분에서 네 사람 분 정도의 일을 해냈다는 것이다.
또한 물자를 운반하는 '소달구지'의 적재량은 농산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이루어졌다. 요시다 요시다 『조선의 이출소』. 현재 경트럭의 최대 적재량이 350kg이니, 소달구지의 운반량은 그 이상인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을 피해 피난 온 피난민들의 긴 행렬 속에는 큰 짐을 등에 짊어진 소나 가재도구를 산더미처럼 실은 짐수레를 끌고 가는 소의 모습도 있었다. 농민들에게 소는 가족의 일원이다.
사람도 소도 함께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한우를 그린 화가, 이중섭
조선의 소 '한우'를 주제로 한 일련의 강렬한 작품을 그린 화가 이준섭에 대해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이준섭은 1916년 9월 평안남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1935년(20세 때) 미술 공부를 위해 도쿄의 미술학교에 유학했다. 체류 중 미술전 등에 출품한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아 귀국 후 직업 화가의 길을 걸었다,
직업 화가의 길을 걸었다. 일본의 패전, 조선 해방 직전에 원산(함경남도)에서 야마모토 방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를 일본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했다.
상륙 허가 기한 내에 불과 며칠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후 한국전쟁 중에 아내 방자가 병에 걸렸다,
1952년 조선의 소를 그린 작품을 연이어 그렸다.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노을에 물든 소'를 그린 그림은 한국에서 매우 잘 알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은 창작 의욕을 충만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륙 허가 기간 내 단 며칠간의 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준섭은 창작 의욕을 불태우며 1953년부터 54년까지 조선 소를 주제로 한 작품을 연이어 그렸다.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입을 벌리고 짖어대는 갈색 조선 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황소'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는 매우 잘 알려진 그림이다.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최석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준섭의 '고향 평원 소'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함께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벽과 더불어 한일 국교가 단절된 채 현해탄에 그어진 국경선도 그의 앞에 서 있다.
불타는 노을 속에서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는 그 소는 분명 이준섭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후 이준섭에게 가족과 재회할 기회는 오지 않았고, 1956년 9월 병환으로 서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39세였다.
최석태의 작품 '황소'에 대해 오른쪽에 인용한 글에 이어 “식민지 시대부터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소를 통해 한민족 ‘조선민족’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민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조선 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조선 사람들과 그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조선 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