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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양념(타레)

2 일본에서의 발전 과정

불고기・양념(타레) '고깃집 점원이 알아야 할 문화와 지식' page


2 일본에서의 발전 과정

(1) 전후 암시장과 야키니쿠 식당의 형성

① 암시장의 먹거리 가게

1945년, 일본의 패전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은 20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곡물, 육류는 자유롭게 매매할 수 없는 통제시대로 배급 대상이었으며, 조미료인 소금조차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육식 문화의 역사가 짧은 일본에서는 가축의 내장은 통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피차별 부락지에서는 오래전부터 주인에게 이용이 허용되었다.

필자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쇼와 20년, 일본의 패전과 도쿄제국대학이 불타버린 해, 경성제국대학도 불타버린 해, 아버지는 그 해에 '일본인'이 되었다. 새로운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한반도의 지배에서 해방된 상징적인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JR 교토역 앞 암시장, 지금의 신칸센 하치조(八条) 출구 부근에는 당시 점령군에 의해 블랙마켓의 '암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상은 통제 경제 시대였고, 물건을 자유롭게 살 수 없는 시대였지만, 이 시장에서는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암시장'인 것이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그 활기찬 곳에는 식욕을 채워주는 '먹거리 가게'가 있었다. 그 '먹거리 가게' 중 조선요리를 파는 곳이 눈에 띄었다. 이 시장 근처 '구조', '십조'라는 곳에 조선인 집단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고기 구이, 국밥, 김치, 나물, 미역국 등을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기 굽는 냄새는 배고픈 소년의 식욕을 자극했다.


② 돈짱과 고깃집

내가 살던 곳은 교토 역에서 남쪽에 있는 우지라는 곳이었다. 집에서는 전쟁 중에도 소의 내장을 사서 칠륜 철망 위에 구워 먹었다. 내장을 팔러 오는 사람은 피차별부락 지역의 사람으로, 암시장과 가까운 도조라는 도축장에서 사들였다.

조선인들은 가축의 내장을 '통창'이라고 불렀다. 조선어로 내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통창 요리는 구워 먹기도 하지만, 조림이나 국으로 끓여 먹기도 하는 등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 맛과 조리법을 살려 '음식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암시장의 막사 '고깃집'은 번창했고, 조선요리 애호가들이 퍼져나갔다고 한다. 김치 맛을 알고 도복 막걸리를 마시는 것은 식량 부족 시대에는 동경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고 한다.


③ 조선요리집의 탄생

세상이 안정되면서 암시장도 정리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점포로서의 조선요리점(당시에는 이렇게 불렀음), 즉 고기를 파는 가게가 전후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쇼와 23년경 간사이의 고베설, 도쿄의 신주쿠설 등이 있지만,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두 곳 모두 유명한 가게가 있었지만,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둘 다 재일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공통점만 있다.

당시 교토에 살았던 필자의 기억으로는 쇼와 25년경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에 훌륭한 조선요리집이 생겨서 가족들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가게는 지금처럼 고기를 파는 것이 아니라 국물, 조림, 김치, 냉면 등이 주 메뉴였다. 당시에는 '식당' 형태의 조선요리집은 거의 없었고, 교토의 이 가게처럼 극히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 후, 이 무렵에는 일부에서 식당 스타일에서 벗어나 격식을 갖춘 고기구이 냉면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요리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식당'이라고 하면 쇼와 21년에 도쿄 유라쿠초(有楽町)에서 창업하여 22년 오쿠보의 백일 전에 개업한 '식당원(食堂園)'이 유명했다.

고기를 굽는 냄새는 좋지만 연기가 옷에 묻고, 반찬인 김치 냄새도 나기 때문에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깃집은 번창했고, 장사로는 돈 잘 버는 인기 업종이 되어 경쟁도 치열해져 갔다.


(2) 고도성장기와 외식화

① 외식산업으로서의 고깃집

이러한 양상은 일본이 고도성장 경제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쇼와 30년 무렵을 기점으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 무렵부터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동쪽은 도쿄 신주쿠의 '명월관', 서쪽은 오사카 센니치마에의 '식당원'이 모범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지금은 오사카의 '식당원'이 체인화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메이게츠칸은 점포는 있지만 체인점 전개는 하지 않고 있다.

전국불고기협회 초대 회장이자 '식당원' 2대 사장인 에사키 마사오(江崎政雄)에 따르면 “쇼와 21년 도쿄에서 시작한 것은 선대인 아버지로, 공동 경영으로 장사가 잘 되었다.

22년에 이사해 오사카 센니치마에에서 시작한 가게는 고기와 냉면 가게였는데, 당시 소고기는 통제 품목으로 자유롭게 매매할 수 없어 닭고기를 사용했다.

이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가 번창했다. 그러던 중 소고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정통 고깃집으로 바뀌었고, 매장도 확장해 고급 요리점으로 발전했다. 돌아가신 진짜 상인께서도 그 이야기를 그대로 말씀하셨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② 전쟁 전의 조선요리점

외식산업으로서 고기를 주재료로 한 요리는 일본의 전후에 생겨난 것이지만, 전쟁 전에도 조선요리점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메이지 38년(1905) 도쿄 우에노 히로코지에 이인식 씨가 '한산루'라는 조선요리점을 개업했고, 훨씬 후에 코지마치 산노우시타에 '명월관'이라는 조선요리점이 생겼다. 전후 신주쿠에 생긴 '명월관'의 명칭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간사이에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선요리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요리점은 불고기 중심의 메뉴가 아니라 전골 요리(3장 사진 3 참조), 선불식 요리(5장 사진 5-2 참조), 냉면 등의 고급 메뉴 중심의 가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도 담그지 않았다. 만약 고기를 굽는 요리가 있었다면, 주방에서 양념을 해서 구워서 접시에 담아 식탁에 내놓는 '비어고'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오늘날 외식산업인 고깃집의 내용이 되는 점포의 발단은 전후부터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③ 식당에서 요리 전문점으로

이러한 대형화, 고급화 경향은 고도 경제 성장의 물결을 타고 탄력을 받으면서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변화를 보인다. 즉, 고기를 구울 때 가게 안에 발생하는 연기와 냄새 대책이다. 덕트 설치, 환풍기 돌리기, 앞치마 입히기, 식후 껌 제공 등 고기구이 요리의 취약점에 대한 대응책에 지혜를 짜내어 고기구이 요리의 수준을 높인 것이 쇼와 30년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식당' 시대에서 '요리점'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불고기 애호가층도 샐러리맨은 물론이고 특히 스포츠맨, 연예인, 탤런트들이 피로회복, 체력증진 또는 체력단련을 위해 불고기집을 이용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러브호텔 근처에 고깃집이 입점하는 것도, 번화가가 커지고 러브호텔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도 고도 경제성장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쇼와 30년을 기점으로 4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 가정요리 시대로

① 가정 요리화에 대한 니즈

1970년대 무렵부터 고기구이 요리가 일반 가정에서 관심을 갖는 음식이 되었다.

고깃집에서 맛을 알게 된 샐러리맨이나 주부층 사이에서 집에서 만들어 먹고 싶다는 니즈가 생겨났다. 가게에서 먹으면 가격이 비싸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크다. 좀 더 저렴하게 구워 먹으려면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것이다.

고깃집 손님들 중에는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고기구이 양념장만 팔아달라고 요청하는 손님이 생겨나는 것도 가정 요리화에 대한 니즈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고깃집의 조리장에서 사용하는 맛에 가까운 양념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는 손님에게 양념장만 판매해 달라는 요청은 야키니쿠를 가정 요리로 생활화하지 않는 당시 일본의 생활 트렌드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양념장만 따로 상품화하여 테이크아웃 상품으로 판매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한반도에서는 15세기 이후 생활문화 속에서 인류의 계란을 포함한 동물성 유지의 폭넓은 이용이 이루어져 왔다. 그 지식이 전해져 오늘날 일본에서도 이어져 오고 있다. 고기 요리의 맛의 매력이 양념류를 만드는 방법은 가정 요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 가정요리가 아닌 외식 점포 요리로 처음 맛본 것을 그대로 비슷한 맛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양념장만 어떻게든 사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어찌 보면 '안이한' 요구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 고깃집의 '양념 산업'의 시작과 그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②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양념의 맛

고기구이 요리의 맛은 양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리 재료의 육질이 좋아도 그것만으로는 맛을 낼 수 없다. 반대로 고기의 질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양념의 조미법으로 커버할 수 있다.

재료의 고기, 특히 내장류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이러한 냄새를 커버하기 위해 조미료뿐만 아니라 향신료, 과즙 등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된장, 참깨를 단독 또는 병용하는 일식 요리의 양념에 익숙한 사람에게 참기름, 마늘, 고추 등을 섞어 양념장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본 가정 요리에는 없던 것으로, 생고기, 그것도 내장류에 맨손으로 양념을 바르는 작업은 익숙하지 않은 조리법으로 손이 잘 가지 않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야키니쿠 요리의 양념은 이 '모미타레' 「もみタレ」방식이었다.


③ 조미료 산업의 태동

한편으로 이 무렵은 복합조미료류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불고기용 양념이 상품화된 것은 불독소스가 처음이었다. 昭和37년(1962년)쯤으로 기억하는데, 판매는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돈까스 소스로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었으니 다음 상품으로 고기구이 양념으로 방향을 정한 것 같은데, 조금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목표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에바라 식품과 모모야 등이 쇼와 40년대 중반 무렵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양념장이 고기구이 요리의 가정화, 즉 내식화에 기여한 역할이 크다.

필자가 관여한 모란봉 양념장 개발 구상은 1974년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때였다.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구상이 구체화되었다. 이때 '소스 산업'이라는 분야가 반드시 성립할 것이라고 확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했다.

하나는 일본에서 육류 소비량이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일본인의 1인당 육류 소비량은 미국의 1/6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과 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2배, 3배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기의 요리 형태는 어떻게 될까? 스키야키일까, 비프테키일까, 아니면 불고기일까. 고기가 불고기 요리로 소비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왜 그럴까? 한창 자라나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생각한다면, 고기 요리를 먹는다면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비프테키보다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요리가 더 어울릴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먹기 편하고, 어느 쪽이 더 많이 먹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어느 쪽이 고기를 더 싸게 살 수 있을까. 종합해 보면 고기구이 요리가 성장기에 있는 젊은 층에게 더 어울릴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다른 하나는 굽는 정도를 자신의 취향에 맞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운 식탁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경제적인 문제도 논의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의 식생활에서 타레가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라는 식문화적인 관점에서의 논의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필자인 내가 특히 그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필자는 '식품개발에 있어서의 식문화적 관점'이라는 제목으로 각지의 식품 관련 회사, 단체 등에 초청받아 여러 차례 강연을 한 바 있다.

양념이 맛있다, 맛없다, 팔린다, 팔리지 않는다보다 어떤 필요성이 있느냐가 더 큰 상품 개발의 요소가 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강조하고 싶다.


④ ''모미다레'' 아니면 ''쓰케다레''?

이제 다음으로는 판매 방법의 문제가 당연히 검토될 것이다. 양념은 팔리겠지만, 이미 선발업체가 상품화하고 있다. 결과는 선점 상품과 형태를 바꾸는 것이었다. 선구자 제품은 병에 담긴 용기였기 때문에 슈퍼마켓 등의 판매장에서는 간장류 등과 같은 병류 상품 진열대에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다른 제조사가 양념장 제품을 넣는 것은 가격 경쟁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양념장 본연의 특징을 살리기로 했다.

본고장 가정에서의 고기구이 요리에서는 직접 만든 간장, 된장, 참기름, 향신료를 섞어 만든 양념을 만들어 고기에 버무리는데, 이른바 '생고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대량 생산으로 병에 담으면 반드시 살균 공정에서 가열 처리된다. 블렌딩한 것에 열을 가하지 않으면 보존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제 양념장의 특징을 살려 가열로 인한 풍미를 잃지 않도록 한다. 그것은 병 포장이 아닌 레토르트 포장이었다. 알루미늄 호일로 싸서 생 양념이 팽창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고, 저온의 장소에 두도록 생각했다. 너무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 맛 보장 기한을 정하고, 팔리면 그 만큼만 보충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고기를 파는 곳과 같은 곳에 놓을 수 있게 된다.

고기와 양념을 같은 매장에서 살 수 있는 새로운 '상품 형태'가 된 것이다.


이는 PR에서 '생팩'이라는 것을 강조할 수 있는 큰 장점이 되었다. '생팩짱'이라는 PR 로고는 꽤나 임팩트 있는 광고가 되었다.

이 광고가 영향을 미쳐 이후 각종 상품군 홍보에 참고가 되어 맥주가 '생'을 강조한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음식에 '생'이라는 표현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전반기의 일이다. 모란봉이 처음 내놓은 양념장은 이른바 '모미다레'이었다. 생고기에 양념을 뿌려서 구워 먹는 것을 목적으로 한 가정용 조미료였다. 하지만 소비자들 중에는 양념을 작은 접시에 담아 구운 고기를 찍어 먹는 것으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쓰케다레'와 '모미다레'를 구분할 것인지, 아니면 겸용 양념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겸용 양념으로 결정되었다.

현재 쓰임새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생고기를 그대로 구운 뜨거운 고기를 '쓰케다레로 맛보고', 고기를 식히는 효과를 이용해 먹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하나의 일본 문화가 있는 것 같다. 스키야키를 필터링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우선 불을 사용하면서 나오는 연기는 자기 건물이라면 몰라도 세입자라면 건물주가 싫어한다. 자기 건물이라고 해도 이웃에서 민원이 들어온다.

또한,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냄새가 배어들어 곤란하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이를 싫어하는 직원들은 모이기 힘들다. 일해도 오래 일할 수 없다.

가게 내부를 봐도 인테리어가 오래가지 않아 고급스러운 느낌을 줄 수 없다. 칙칙한 분위기가 가게의 특징처럼 느껴진다. 일본식 일식집이나 중화요리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럽고 품격 있는 가게를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천장에서 연기를 빼내는 덕트 방식. 손님이 종이나 천으로 된 냄새 방지용 옷을 입는다. 천장에 프로펠러를 설치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우여곡절을 겪었다.

결국 연기를 내뿜지 않고 기본적으로 옆으로 빨아들이는 지금의 '무연식 고깃집'에 정착한 것은 1978년경 나고야의 제조업체 '신포'가 개발한 기종이 처음이다. 그 후 다른 여러 분야에 진출하여 연기가 나지 않고, 보다 위생적이고 고기 요리를 먹기 편한, 독창적이고 실용적인 형태를 지향했다. 처음 이 분야를 개척한 '심포'는 현재도 이 업계에서 가장 큰 업체다.


② 무연 로스터기가 가져온 변화

하지만 무연 로스터기에도 장단점이 있다. 고기구이 요리의 맛과 고기를 구울 때 나는 냄새는 서로 상반된 개념으로, 냄새를 없애는 데 힘을 쏟으면 고기의 맛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고기가 구워질 때 나오는 육즙의 육즙이 줄어들어 건조하고 바삭바삭한 느낌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초기 기종에 비해 최근의 제품은 그 면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하지만 연기와 냄새가 없다는 것의 장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무연 로스터가 이를 도입함으로써 업계에는 일종의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고깃집에서 무연 로스터를 도입하면 냄새가 나는 옷차림으로 손님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냄새가 나는 옷을 입으면, 손님이 좋아했다. 냄새나는 옷차림으로 클럽이나 안주 2차에 갈 수 없었던 것을 걱정 없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고깃집 이용객이 늘고 매출도 향상된다.

다음으로는 일하는 사람들이 기뻐했다. 냄새가 배어들지 않으니, 의상을 입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들고 일하는 곳으로 기피하지 않게 됐다. 의상을 입고 고급스러운 물건을 들고 일하는 장소로 기피하지 않게 되었다. 여성은 기모노로 치장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또한 가게를 일본식, 서양식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가게 안의 인테리어, 개인실 인테리어를 꾸밈으로써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는 것을 기피하는 일도 없어졌다.

연기와 냄새의 오염을 신경 쓰지 않는 가게 만들기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하니 건물을 빌려주지 않던 것이 '제발 이용해 달라'고 한다. 예전에는 연기로 인해 기피하는 일이 없어졌다. 오래전에는 연기로 인해 기피하는 일이 없어졌다. 이로 인해 신규 고깃집 창업이 쉬워졌고, 고깃집을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무연 로스터의 등장은 외식 산업으로서의 고깃집의 존재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급 고깃집의 출현일 것이다.


(5) 고급화되는 야키니쿠 전문점

무연 로스터가 아니더라도 식당 스타일에서 레스토랑 같은 느낌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연 로스터의 등장으로 고급 음식점으로서의 외관, 인테리어를 이러한 조정품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이용층의 확대가 큰 변화로 나타난다. 샐러리맨은 물론 운동선수, 연예인 등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까지 그 폭이 넓어졌고, 일반 기업, 정치인들의 접대 요리점으로 이용되는 업종이 되었다.

한 예로 당시 도쿄를 중심으로 체인점을 운영하던 '소류엔(叙々苑)을 예로 들어보자.

이 가게의 오너인 아라이 요시미치(新井義道) 사장(현 전국야키니쿠협회 회장)은 요리 현장에서 수련을 쌓은 실력파 요리사 출신이다. 그는 업계에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는 가게를 만들기 위해 고급화를 기점으로 삼았다. 1976년 초에 롯폰기에 개점한 것은 무연 로스터였다. 좌석 예약제였지만, 1호점이 점과 개인실 양식이 개선되면서 쇼와 58년 한 점포에서는 기계 구이를 시도했다. 기념 손님을 위해 과감히 '샨氏'라는 주방장을 채용했지만, 이후 일본 불고기 시장의 분열이라는 불고기 업계의 상황 변화가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고급 요리점이라는 명예의 전당을 내건 상대를 찾는 친구, 지인, 즉 예약의 대부분은 지방에서 온 스테이크의 예약이 대부분이었다. 롯폰기라는 곳은 도쿄에서 주축이 된 신도시로, 스테이크의 개인실 수요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가정 내 '고급 스타일'이 필요한 조정이 필요했다. 이를 특징으로 하는 고깃집의 기본 조건은 '연기'였다.

이 야키니쿠의 접대 요리로의 '격상'은 많은 이용객들에게 도움이 되었고, 만족감을 주었다.

서리원 니시아자부점은 연예인들이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마음껏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가게다.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기 커플과 여배우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때 모델이 된 곳이 바로 이 고급 고깃집이었다고 한다. 인기 있는 두 사람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데이트와 요리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고깃집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더욱 맛있는 가게로 만들기 위한 서원 오너의 센스를 높이 평가하는 것인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무연 로스터기였다.

고급 접대 요리화는 아카사카의 요정가 일대를 새롭게 칠했다. 일본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아카사카의 요정 '나카가와'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그림자 영업을 했다.

그 일류지가 된 것일까? 실은 절반이 불고기 전문점 '소류엔・유카이(遊会)'의 매장으로 바뀌었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정-재계의 접대, 회동 및 유대관계도 대체한 것이 아닌가 하는 표현이 세상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 같다.

서리원은 또 '서리원컵 연예인 골프 챔피언 결정전'을 개최하고 있으며, 2011년으로 12회째를 맞았다.

이 대회에는 많은 연예인, 탤런트, 스포츠맨들이 참가하는 인기 대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외식업계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고깃집이 고급화되면서 이런 '연예인 골프 챔피언 결정전'이 10년 이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12년 도쿄에 오픈하는 초고층 빌딩인 스카이트리에 들어서는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 중 고깃집으로 서리엔의 오픈이 결정된 것 같다. 야키니쿠뿐만 아니라 외식업계의 일류 점포가 모이는 곳에 당연히 야키니쿠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생기는 것이다. 이는 곧 불고기 요리의 위치가 고급 요리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같은 시기 서울의 '강남'이라 불리는 고급 노선 지구에도 서리원이 오픈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들리는 바로는 그 건물에 400석 규모의 디럭스한 가게가 들어선다고 한다. 2011년 오픈 예정이었으나 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1년 연기되었다고 한다.

야키니쿠 전문점이 일본에서 고급 요리화되어 외식산업의 '왕좌'에 올랐다는 증거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일본 외식산업에서 고깃집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면, 전국에 고깃집은 약 2만1천여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출액은 약 1조 엔으로, 외식업계 9조 엔(2010년 총무성)의 12% 정도를 차지하는 매우 큰 업종이다.

'전국불고기협회(JY)'의 가맹점은 442개사, 1411개점, 농림수산성 인가 '전문업 협동조합'으로서 업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2011년 4월에 발생한 도야마현 등의 불고기 체인점에서 발생한 '육회'로 인한 집단 식중독 사건은 큰 문제가 되어 연일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보도되었다. 문제가 된 불고기 체인점은 JY에 가맹하지 않았지만, JY에 가맹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JY 가맹점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업무에서도 각종 정보를 전달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식품을 취급하는 만큼 위생적인 문제는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늦게 대처할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대처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정보 교류가 중요할 것이다. 고깃집 업계 특유의 정보는 조직화된 단체에 가입하면 빠르게 얻을 수 있다. 농림수산식품부 인가를 받은 JY는 그 점에서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가입 고깃집, 특히 체인점을 전개하고 있는 곳은 가입을 검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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