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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인기 육류는 개고기

후추는 고추가 유입되기 전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되었는데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1389년 류큐(오키나와)가 고려 정부에 후추 300근을 진정했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족의 한반도 지배는 130년 정도로 끝났으나 고기를 먹는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1392년 고려왕조의 멸망 후 성립한 조선왕조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배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살생과 육식이 허용되기 씨작하면서 육식문화가 한반도에 뿌리 깊게 정학하고 널리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후추 수입은 점차 늘어났고 사람들의 셍활 곳곳에 후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추의 주된 수입지는 일본이었다. 사실 후추는 원산지가 열대 아시아인 작물로 한반도나 일본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쪽에서 건너 온 후추는 일종의 무역품으로 네덜란드 배로 류큐를 거쳐 일본으로 유입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고기를 금기시하던 일본에서는 후추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어서 조선에 무역품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 무렵 한반도는 이미 육식을 금지하던 생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후추의 수입과 더불어 육식문화가 더욱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소나 돼지뿐만 아니라 말이나 개의 고기도 먹었으며, 그 내장도 식용으로 삼았다. 1894- 97년에 조선을 여행한 작가 이사벨라 비숍이 1898년에 간행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 묘사된 당시의 식사 형태를 살펴 보자.    

조선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먹는다. 개고기는 계절에 따라서 수요가 급격히 많아지며 식용을 위한 개들이 널리 사육되고 있다. 돼지고기와 쇠고기, 물고기, 동물장을 각각 날 것과 말린 것, 혹은 소금에 절인 상태로 먹는다. 모든 새와 사냥한 동물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먹는다.머리와 손톱, 내장을 있는 그대로 구워 가금은 뚱뚱한 송아지에 필적한다. 요리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한강에서 남자들이 낚은 물고기에서 낚싯바늘을 뽑은 후 뼈가 있는 채로 홍고추 소스를 찍어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선조가 어떤 고기를 먹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하면서 놀라운 건 우리민족이 쇠고기에 대한 선호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쇠고기에 대한 선호는 계층적 구분이 없었던 것 같다.

쇠고기는 탕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조미료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최고로 소비가 많은 돼지고기 소비는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안동 장씨의 음식디미방(1670년경)을 보면 돼지고기 요리법은 가제육과 야제육 두 개 뿐이다. 반명 개고기 요리법은 10여 가지가 넘는다. 이것으로 짐작해 봐도 17세기 조선에서는 돼지고기를 별로 즐기지 않았거나 특별한 음식으로 요리해 먹기 보다. 추렴을 통한 마을 잔치용이나 무당의 굿에 제물로 사용되어 공동체가 함께 삶아 먹는 고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개고기는 지금과는 달리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그리고 개고기 이들 4종류의 육류가 선조들의 단백질 주 공급원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여름철 천렵을 해서 잡아 먹던 물고기도 더운 여름철의 주요 단백질 공급원중 하나였다.

지금처럼 냉장, 냉동 시설이 없던 고려나 조선시대에 소 한 마리를 여름철에 잡아 먹는 건 상할 염려가 커서 무리한 일이었고 소는 농사에 장정 10인이상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농사철이 끝난 가을이나 겨울철이 주 소비철이었던 것 같다. 물론 제사 음식에 쇠고기는 중요한 몫을 차지 하고 있기 때문에 단오나 추석, 설의 소비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돼지는 여름철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듯 너무 빨리 상하는 관계로 여름철에는 먹는 것을 자제했던 것 같고  닭과 개고기가 여름철의 인기있는 육류였다.

조선시대 돼지는 생체가 30킬로 정도로 소형종이었지만 닭이나 개보다는 커서 일가가 한두끼에 먹기는 많은 량의 고기를 생산해서 고기의 보관상의 문제로 상할 염려가 컸으나 닭이나 개는 한 마리를 잡으면 일가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적은 량의 고기를 생산했으므로 인기가 높았던 것 같다.  돼지는 지방이 많아 썩는 시간이 쇠고기나 개고기보다 빨랐던 것도 우리 선조들이 돼지고기 소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혹자들은 돼지가 사람들이 먹는 곡물을 먹어서 기피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지만 이는 정설이 아닐 수도 있다.    

개고기 먹는 것에 대한 논쟁은 우리 민족의 음식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시작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선조들이 즐겨 드셨다고 해서 우리도 먹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남태평양의 식인부족이라면 선조들이 사람고기를 먹었다고 지금도 사람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지만 개는 엣부터 사냥이나 애완용으로 키우는 개와 먹기위해 키우는 개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아 주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페퍼로드 고추가 일으킨 식탁혁명 야마모토 노리오 지음 사계절 p172-173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670년(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가 쓴 조리서이다.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1],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궁체로 쓰인 필사본으로,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 이름붙여졌으며, 내용 첫머리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 써있다. 음식디미방은 한자어로 그중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제목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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