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     

요즘 블로그를 찾아보면 거의 전문가 수준의 포스팅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자기만의 독학으로 이미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지식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인터넷의 발달은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책의 공급이 늘었던 시대만큼 정보의 공유를 자유롭게 해 준다.

오래전에는 논문을 쓰고자 하면 국회 도서관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아주 오래된 신문이나 논문을 직접 찾거나 마이크로 필림으로 저장된 신문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과거의 기록들을 찾는 것에 상당한 노력과 어쩜 전문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요즘은 근대 100년의 신문을 네이버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삼겹살의 유행을 많은 맛칼럼니스트들이 80년대 초반 일본에 돼지고기 등심, 안심을 수출하고 남은 삼겹살등 잔여물이 국내에 부분육으로 값싸게 공급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에 미치고 환장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래서 친한 맛칼럼니스트에게 물어 봤다.

“삼겹살의 수출 잔여육 설은 어디서 나온 거니?”

그 역시 7,80년대 식육업에 종사하던 사람의 인터뷰를 근거로 한다고 했다.

아마 맛칼럼니스트들이 기자 출신이니 취재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거구 그걸 기정 사실화 해 버린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구도 삼겹살의 수출 잔여육설에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바쁜데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면 어떻고 왜? 우리가 맛있게 먹는지 별로 궁금한 일이 아닐 것이다.    

식육마케터인 난 좀 다르다. 아니 축산물 마케팅을 전공한 학자인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육류의 소비 패턴을 연구하고 식육산업 전반의 발전사를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돼지고기 유통이 부분육화되는 중요한 산업사 연구가 될 뿐 아니라 지난 산업사의 연구를 통해 미래 식육 산업의 발전 방향을 연구 할 수 있고 삼겹살의 소비사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식육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수도 있다.    

사실 맛칼럼니스트들이 방송이나 책에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다라고 말하기 전까지 돼지고기의 부분육 산업화의 역사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70년대 중반 어느날 우후 죽순처럼 삼겹살집들이 생겼나고 삼겹살의 소주 한잔이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산업화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민중의 마지막 종교의식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90년대 이후 정말 많은 논문에서 이야기 하지만 왜? 삼겹살을 좋아 하는지, 삼겹살이 어떻게 우리곁에 왔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 역시 논문에 선행연구들을 인용하면 윤영훈의 1999년 조사에 의하면 삼겹살을 51.2%로 가장 많이 구입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면 2001년 2월 서울 시내 주부들을 대상으로 대홍기획과 함께 조사시에는 삼겹살을 79%정도 구매 한다. 

삼겹살에 대한 이러한 소비선호의 증가는 브랜드 돈육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삼겹살에 대한 선호 현상은 돈육산업이 수출 주도형 산업으로 발전하면서 국내시장에서 돼지고기가 부분육으로 유통이 정착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부분육 시장의 발전은 대일 수출을 통해 등심, 안심, 후지 등이 부분육으로 수출되고 그 잔여육의 개념에서 삼겹, 목심, 갈비 등 국내 선호 부위육이 생산됨에 따라 이런 국내 선호 부위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해 대형 유통점에 냉장육으로 공급하는 체계가 구축되었다. 수출이 중단된 후에도 유통점에서는 필요한 삼겹, 목심을 선택적으로 구매함으로써 더욱더 돈육의 균형있는 소비를 저하하고 있다.

국내산 쇠고기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국내산 쇠고기는 아직도 마리 개념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는 쇠고기의 소비 역시 등심, 안심 등 구이용 특수 부위의 선호가 높아 우둔, 설도 등의 재고가 대량 발생함으로써 국내 시장의 소비형태로는 재고 부담을 생산, 가공업체가 감당할 수 없어 유통업체도 마리 당 구매를 통해 마리 당 판매를 위한 판촉을 강화하고 있다. 돈육은 이미 부분육의 개념이 도입되어 유통업체가 마리 당 판매의 재고 부담을 지지 않고 재고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은 가공업체가 감당해야 하는 유통상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이러한 재고 부담은 등심과 후지 등의 최대 소비처인 육가공시장이 2002년 년간 약 6천억원 수준의 규모로 이에 소요되는 원료인 후지와 등심은 전체 돈육 소비의 15%선에도 못 미치고 있다. 반면 돼지 한 마리에서 생산되는 후지, 등심, 그리고 소시지 원료인 잡육의 량은 전체 정육의 41.56%로 전체 정육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되는 량으로 육가공 소비량이 돈육 전체 시장의 30%이상이 되지 않는 한 육의 불균형에 의한 가공업체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다.

구제역에 의한 대일 수출의 중단은 삼겹 위주의 편중된 소비 성향과 육가공산업의 성장 둔화로 등심, 안심, 후지등의 부분육 내수 시장의 미개척 단계에서 수출 주도형으로 발달한 부분육 시장의 불균형을 가져 왔고 이러한 부분육 내수 시장의 불균형은 수출을 통한 부분육 시장의 활성화로 도입기를 지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던 우리나라의 브랜드 돈육 시장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쳤다.     

이는 2003년도 논문이다. 난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수출 작업장에서 생산된 수출 잔여육인 삼겹살이 국내 시장에 많이 공급되었다고 본다 아니 1995년을 기점으로 전국에 수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LPC 들에서 생산된 브랜드 삼겹살들을 수출 잔여육이라고 봤다.

 1995년이후 아니 어쩜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삼겹살은 수출 잔여육의 개념이 컸을지도 모르지만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의 삼겹살붐은 수출 잔여육만이었다고 하기에는 주장이 좀 빈약하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면 수출 잔여육이란 말 그대로 수출을 하고 남은 고기로 값싸게 물량이 많거나 값싸게 유통 되어야 한다. 아니 생산자 측면에서는 오직 수출을 하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수출 부위는 수출을 하고 남는 부위를 수출 잔여육이라고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의 아사도라는 요리가 있다. 소 갈비로 바비큐를 해 먹는 요리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맛있는 요리로 소문이 난 요리다.

얼마 전 바비큐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르헨티나의 아사도 역사학자 우리나라에는 삼겹살 역사학자가 없는데 하여간 아사도 역사학자가 나와서 아사도의 발생은 쓰레기 갈비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하는 걸 보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소를 사육해서 쇠고기 정육을 미국이나 유럽에 수출하고 남은 갈비를 쓰레기처럼 버려서 그걸 노동자들이 요리해 먹은 것이 아사도라고 한다.

아마도 수출 잔여육이라면 이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요리의 발생이 잔여육이 발생한 시점과 일치해야 하지 않을까?     

맛칼럼니스트들이  삼겹살의 유행을 수출잔여육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찾았다.

아니 1970년대 후반 서울의 삼겹살집이 우후죽순처럼 번져 나갔을까? 그 많은 삼겹살은 어디서 공급이 되었을까? 100% 이유는 아니지만 왜?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라고 그 당시 인터뷰가 있었을까?

분명한 건 1962년부터 돼지는 생돈이나 고기로 간간히 수출이 이루어졌다.

처음 수출은 일본이 아니라 홍콩이었다.

1960년대는 수출 기록을 살펴 보면 생돈이 돼지고기 보다 월등히 많았다. 1963년에는 114,643두나 생돈으로 수출 되었다. 일부 돼지고기도 수출 되었지만 정육이 아니라 지육으로 추정된다.    

문제의 1970년대의 수출을 살펴보자.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제법 많은 량의 돈육이 수출되었다. 69,209천불 이걸 대충 물량으로 추정해 보면 46천톤 정도 6년간 수출되었다. 이때 수출 된 돼지고기가 지육이었는지 1980년대 이후처럼 등심, 안심과 일부 뒷다리였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추정해 보면 1975년, 1976년, 1977년이 무렵부터 등심,안심만 수출 했을지도 모르겠다. 등심, 안심만 수출하였다고 해도  이 당시 수출은 지정 업체들이 있었지만 수집상이 있었다. 즉 자체 작업장에서 돼지를 가공처리해서 등심, 안심만 수출용으로 생산하여 수출 하고 나머지를 수출 잔여육으로 국내 유통시키는 것보다 일부 중소 육가공업체나 아니 그 당시는 지육처리들을 정육점에서 주로 하는 지육 유통 시대였으니 정육점을 돌아 다니면서 수출 부위를 수집해서 수출 하는 업체가 1990년대 초반 까지 있었다. 

1990년대 브랜드 삼겹살이 유통되기 이전까지 돼지고기는 지금처럼 부위별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살코기와 비계, 족발등 부산물로 인식되었다. 소비자들은 정육점에서 “구이용 주세요, ”찌계용 주세요“ 라고 주문을 하던 시대다. 정육점에서 도매시장에서 돼지지육을 사가지고 와서 직접 골발해서 정육을 판매하던 시절이라 삼겹살과 등심이 붙은 등삽겹은 구이용으로 앞다리와 목심이 붙은 목전지는 찌개용으로 주로 팔렸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부위는 갈비였던 시절이다. 

1970년대에는 생산측면에도 가구당 한두마리를 키우는 부업농이 거의 전부였고 1979년 이전 까지 500두 이상 키우는 농가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1979년 총 사육두수가 2,843천두 사육 농가는 758,745 농가 호당 3.76두로 1970년 1.27두보다 많이 늘었지만 1979년 500두이상을 키우는 농가는 147호에서 331천두 사육하고 있었다. 대만처럼 일본 자본이 들어와서 형성된 돼지 농장은 없었다. 1960,70년대는 돼지가격이 폭등과 폭락은 거의 32개월정도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옥수수가격이 내려가면 돼지를 많이 키워 돼지가 출하되는 시기에는  돼지가격이 하락하는 현상을 콘호그 사이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옥수수가격이 아니라 돈가 자체만으로 돈가가 올라가면 겁 없이 너나 없이 돼지를 키워서 다 같은 시기에 출하하게 되어 출하량이 늘어나 가격이 하락하는 호그 사이클이 존재하던 시기다.

1970,80년대의 축산경영학의 주요 연구 주제가 이 롤러코스트 같은 축산물 가격의 안정화였다.

1970년대 1973년에 용인 자연 농원 양돈장이 생겨나서 국내 최초의 기업형 돼지농장에서 많은 품종 개량이 이었졌다. 이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사육되던 돼지는 지금과는 다른 요크셔 종이 주종이었다. 지금처럼 LYD 한종으로 거의 통일 되지 않고 각자의 농장에서 각자의 사료와 사육 방식으로 여러종의 다양한 돼지를 키웠고 거세도 잘 되지 않았고 사료도 잔반이 많아서 지금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와는 전혀 다른 맛과 지독한 돼지 냄새가 많이 발생하는 돼지였다.

이런 돼지고기를 단순히 구이용으로 소금만으로 구워 먹는 것보다 마늘 생강 된장등을 넣고 삶아서 먹는 방식이 주로 돼지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 수출을 살펴 보면

황교익이 1980년대 초 수출하고 남은 삼겹살을 먹을 거라고 수요미식회에서 했던 말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거의 수출이 없었으니 말이 안되는 소리다.

1978년에는 수출이 없었다.

1979년 324톤

1980년 252톤

1981년부터 1983년에는 수출 실적이 ZERO 다.

다시 수출이 시작된  1984년 296톤

1985년 226톤

1986년 892톤

1987년3,161톤 이때부터 진짜 대일 돈육 수출이 시작된다.

국제 경쟁력을 가진 유일한 축산물이 돼지고기였으니 얼마나 신들이 났을까?

지금도 이시절 대일 수출을 주도 하시던 분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애국적 행동에 무지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다. 난 이들에게서 고기를 배웠다.

 1980년대 수출 단가가 KG 당 3불이 넘었으니 냉동 등심, 안심이 수출되었다.

그럼 1970년대 후반부터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가는 삼겹살집에 삼겹살은 수출도 거의 없었는데 누가 공급해 주었을까? 

1979년 돼지가격이 폭락하자 정부는 롯데, 삼성 그리고 한냉에 육가공장 건설을 하게 한다. 롯데는 롯데 유업이 제일제당은 용인양돈장이 있어서 쉽게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롯데는 롯데 축산을 만들어 1980년 충북청주공단내에 약 130억원의 자금을 투입 일생산량 30톤의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을 1980년 8월부터 가동하였다, 제일제당은 75억원 투자 1980년11월부터 제품을 출시하였다.

제일제당과 롯데햄이 된 롯데축산 그리고 한냉은 우리나라 돼지고기 부분육 시장의 선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1980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부분육 생산 공장 시대가 시작된다. 햄소시지 원료육을 자체 공장에서 지육을 가져다 직접 정형 정육화 하기도 하였지만 놀라운 속도로 햄, 소시지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원료육을 가공 생산하는 부분육 공장을 외주화 할 수 밖에 없었고 롯데햄과 제일제당의 외주원료육 작업 업체가 1980년대 후반 대일 수출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푸줏간이라는 정육점에서 지육을 도축장에서 가져다 골반 정형하여 고기를 상품화하던 전통적인 방식이 공장에서 정선된 부분육 박스 미트로 유통이 활성화 된 건 1990년대 들어서다.  

우리나라 부분육 시장의 시작은 1970년대 부산지역에서 시작된 양고기 보세 가공 수출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프리마햄에서 한냉 묵호 공장에서 냉동 양고기를 보세 가공해서 수입해 갔다. 공장식 가공 방법을 모르던 시절이고 흔히 접해 보지 못한 양고기의 정선방법에 대해서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의 노동자들을 교육했으면 여기서 교육 받은 인력들이 롯데햄과 제일제당등 초기 육가공장 원료처리 부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술자들이 동영상 까지 상영하면서 교육을 했다는 증언이 있다. 

또 하나의 부분육 시장이 형성된 것이 수입 쇠고기 포장육이다. 1978년부터 시작된 수입 쇠고기 포장육 판매는 1981년 돼지고기로 확대되고 제일제당, 롯데햄, 진주햄등 대기업이 포장육 제고 판매에 참여 하게 된다. 

앞에서 그 당시 돈가는 폭락과 폭등을 주기적으로 겪고 있었다. 1980년대 역시 그런 주기적인 가격 변화가 있었다. 이에 롯데햄과 제일 제당의 경영층들은 원료육 비축 전략을 수립 가격이 낮은 시점에 최대한 냉동으로 비축하여 싼 가격의 원료육으로 햄 소시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원료육 협력업체의 수와 규모가 커져 나갔다. 

1980년대 롯데햄과 제일제당 그리고 한냉은 일본의 대형 육가공사와 기술 제휴를 하고 햄 소지기 가공 기술뿐 아니라 원료 처리 기술을 도입하였는데 이때 함께 도입된 것이 원료육 원가 계산 방식이었다.     

햄 소시지를 만드는 육가공장 입장에서는 살코기가 가치가 제일 크다.

소시지는 살코기에 적당량의 지방과 물을 혼합하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햄의 원가 계산식 도입해서 원가를 계산하던  롯데햄이나 제일제당의 경우 

뒷다리의 가치가 100이면 지방이 많은 삼겹살의 가치가 60 정도였다.

이는 지금시중에서는 뒷다리가 소매가격으로 8000원 삼겹살이 20000원지만 그 당시 롯데햄에서는 뒷다리가 10000원일 때 삼겹살이 6000원 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렇게 원가가 싸게 책정된 삼겹살로 포장육을 만들었으니 거의 A4 아니 B5 수준으로 정선된삼겹살이 포장육으로 값싸게 유통 되었다.     

1980년대 초반 수출이 중단 되어도 삼겹살이 시장에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 이 당시부터 서서히 롯데햄과 제일제당, 진주햄 그리고 남부햄등과 같은 돼지고기를 주 원료로 햄 소시지를 만드는 육가공장들이 늘었고 그들 원료육 공급 협력업체에서도 부분육 작업이 활성화 되기 시작했던 영향이 컸다. 이는 우리나라가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육류 소비가 늘었으면 기름기 많은 삼겹살이 맛이 좋아 우리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왜? 삼겹살에 환장했고 환장하는가는 다른 측면에서도 더 깊이 생각해 봐야겠지만 단순히 공급 측면에서 수출 잔여육이었다는 건 70년대 삼겹살의 시작시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급격히 활성화 되었다는 80년대 초반은 아니다.

수출이 없었는데 수출 잔여육이 있었을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이후를 살펴 보면

나 자신도 2003년 논문에서 1990년대 2000년대 초반 생산되고 유통되는 삼겹살을 수출 잔여육이라고 썼으나 이 표현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앞아서도 아르헨티나에서 쓰레기 갈비로 아사도를 만들었고 아사도를 만들던 갈비는 수출 잔여물이라고 했다. 우선 가격이 수출품보다 확실히 저렴하게나 경제적 가치를 부여 하지 않았다. 또 소한마리에서 1997년 축산기술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황소기준으로 정육이 224.9KG 생산 되는데 이중 갈비는 35.1KG로 전체 정육생산량의 15.6%를 차지 한다. 따라서 수출 된 정육이 갈비 이외의 전부위라면 약 84.4%인 189.8KG 이 수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수출된 물량이 남는 물량보다 많아야 잔여육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수출을 살펴보자. 주로 등심 안심이 주 수출 품목이었다면 역시 1997년 축산기술연구소의 부위별 고기량 자료를 참고하면 전체 거세돼지 한 마리에서 정육이 47.29KG 생산되는데 수출용 안심 1.02KG, 등심 6.05KG 둘을 합쳐서 7.07KG 이면 전체 15% 만 수출 되고 나머지 85% 가 수출 잔여육이라는 개념은 도입할 수 없다. 만약 수출을 했던 15%의 안심,등심의 이익이 나머지 85%의 고기 전체 보다 많았다면 수출 잔여육이라는 개념 도입이 가능하겠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복합유기 생산체인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삼겹, 목심, 갈비는 비싸게 국내 유통을 시키고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안심, 등심등은 국내 유통시세 보다 조금더 비싸게 일본에 수출하여 돼지 한 마리 가공시 이익을 최대화하였다고 봐야 한다.     

물론 부분육 시장의 확대 측면에서 대일 돈육 수출이 기여한 바는 크다.

현대적 축산물 종합 처리장인 LPC 에 과감한 정부 투자가 가능했던 것과 기업의 참여는 수출을 통해 최대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기 한국 시장만을 상대로 부분육시장이 발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돼지고기 부분육시장이 발전하거나 한돈 산업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자신도 아무런 생각없이 수출 잔여육이라는 표현을 논문에 까지 사용했다.

이는 산업화의 잘못된 시각이라고 반성을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100억불 수출이 되면 부자가 될 것 같은 환상속에서 살던 낡은 생각이다.    

1990년대 이후 현대화된 부분육 생산 공장의 운영과 대형 마트의 등장 그리고 브랜드 삼겹살의 출현이 삼겹살 소비를 더 부축였다. 확실한 건 삼겹살이 가장 비싼 돼지고기 부위임에도 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되었다는 것은 생산 측면이 아니라 소비측면에서 삼겹살의 인기 비결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배경에 대해서 2017년 6월 30일 오후 방송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5회에서는 경주의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경주에서 아침으로 베이컨을 먹던 중 김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삼겹살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키워야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것은 배변물 처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키우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안심, 등심을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삼겹살, 내장, 발, 껍데기 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방송을 보면서 좀 논리와 과학적 근거를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의 대일 수출과 우리 한돈 산업의 부분육 시장 전개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지만 일부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불행한 역사라고 하기에는 그의 주장이 잘 못 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삼겹살을 좋아한 건 공급측면에서 공급이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맛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까지 아니 아직까지 삼겹살을 좋아하고 있을까?

일본이 고도성장을 하면서 3D 업종인 양돈산업에 인력난등으로 대만에 자신들의 양돈기지를 만든 건 사실이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에 대만과 한국을 자신들의 쌀 공급기지화했었던 것처럼 그러나 농업 발전 보다 공업화에 전념했던 한국을 자신들의 돼지공급 기지화 할 수 없었던 여러 이유 때문에 일본 자본이 한국에 들어와 우리 한돈산업에 투입된 것 제일교포 자본으로 만들어진 남부햄 한 곳뿐이 없고 이곳 역시 대만의 투자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압축 성장의 산업화 속에서 육류의 안정적 공급의 국가적인 문제였다. 쇠고기를 미치게 좋아하는 우리지만 해방후 역우인 한우를 잡아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의 육류 공급은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찾은 것이 돼지고기와 닭고기였다.  닭고기는 치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주요 육류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돼지고기는 사실 정말 우리 민족이 안 좋아하던 고기다. 사육 환경이 불량하여 냄새가 심하게 나는 지금의 돼지고기와는 많이 다른 고기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돼지는 채비 동물로 농가에서 한두마리 키우고 서울 인근 특히  지금의 일산 지역에서 서울시 음식점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키워져 독산동 도축장이나 마장동 도축장에서 도축되어 서울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잔반만으로 돼지를 키우기에는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고 육류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져서 사료 곡물을 수입 돼지를 사료로 키우기 시작하면서 고기의 맛이 많이 개선되어 돼지를 그냥 불판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즈음 프로판 가스의 보급이 활발해져 로스구이집이 활발하게 생겨나기 시작했고 로스구이 형태인 삼겹살집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우리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IMF 이후 쇠고기 로스구이집들은 급격히 자취를 감추고 값싼 수입 삼겹살을 구워파는 삼겹살 집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겠다.    

난 일본의 돈까스, 비프까스와 한국의 치킨과 삼겹살이 상당히 닮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1200년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인들에게 고기란 낯선 식재료였을 것이다.

그걸 자신들의 식습관에 최적화 시킨 음식이 기름에 튀긴 돈가스와 비프가스다.

한국 역시 닭은 계란을 공급해 주는 귀한 가축으로 고기를 먹을 일이 없고 오래 키워 질겨진 고기를 부드럽게 해 먹는 방법은 백숙처럼 오랜시간 삶아 먹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계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어린 닭은 우리 입맛에 탓 맞지는 않았을거다.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닭을 기름에 튀겼다. 뭘 튀겨서 맛 없는 것이 있을까?

돼지는 잔반이나 변을 처리하는 청소 동물, 퇴비를 생산하는 채비 동물로 키웠고 오래 키우다 쉽게 상하니 마을 잔치때 사람들이 다 모여 된장 풀고 마늘 생강 넣어서 삶아 먹거나 버크샤의 감칠맛 나는 국물 맛의 국밥 한 그릇 마리 먹는 것이 다였는데 조선시대 재래종은 30에서 40킬로그램이니 작아서 집집 마다 한 마리정도 키울 수 있었는데 이게 버크샤랑 교배시켜서 일제 시대에는 70에서 80KG 까지 크더니 일제 말부터는 흰 요크셔를 새끼수가 많다고 키우라고 해서 키웠다. 

 육수맛이 예전 같지 않아 고추장 듬뿍넣고 생강 마늘 양념 진하게 해서 두루치기로 먹었다.그런데 80년대 이후 전업농으로 키우는 농가들이 늘어나  수입 사료를 먹였더니 살코기는 맛이 예전맛 못해서 인기가 없는데 그나만 지방이 많은 삼겹살은 구운 건지 튀긴 건지 몰라도 고소하니 먹을 만 했다. 그래서 그냥 삼겹살 튀긴 건지 구운 건지 모르게 아직 먹고 있는 거다. 양반들이 먹던 고급술이 소주가 싸게 나왔는데 이게 막걸리보다 독해서 막걸리는 김치랑 두부만으로도 좋은 안주인데 독한 소주는 기름진한 삼겹살이 딱이지 않았을까?    

요즘 세상이 좋아져 근대 100년의 신문을 인터넷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돼지고기 일본 수출이 궁금해서 찾아 보니 1960년대부터 돼지고기 이야기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좀 웃긴 것이 수출 상담만 해도 신문에 난다. 계획만 해도 신문에 난다. 역시 박정희 정부는 수출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수출하려고 하면 돼지값이 뛴다 그래서 수출은 하지고 못했다. 그건 신문에 안 잘 안 보인다.

수출 양돈 단지도 계획만 수업시 발표하고 하나 만들고는 제대로 운영을 못하고 뭐 다 국민들 보여주기를 위한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들을 통계자료와 하나 하나 실행된 걸 확인해야 한다.

그 결과들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나 자신도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그 산업화의 수출 신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삼겹살에 대한 지나친 선호가 우리한돈산업에는 방해가 된다.

그래서 다수의 육가공장이 어려워지고 시장은 점점 몇몇 기업에 의해 과점화되고 있다.        

삼겹살의 인기를 생산측면에서 강력히 이야기했던 수출 잔여육설은 영향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육가공업체 공급설도 일부다. 

프로판 가스 도입을 통한 편리성도 일부고 대형마트의 마케팅 설도 일부다.

삼겹살의 인기를 소비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비자 육류 외식 성향 변천으로 본 삼겹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