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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의 시작 도축

삼국 및 고려 시대의 도축

삼국 및 고려 시대의 도축    

원시시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 사냥을 해서 잡아 온 짐승을 해체하고 나누어 먹는 일은 단백질과 지방의 중요한 공급방식이었다. 부족의 청년들이 사냥해서 잡아 온 짐승을 나누는 일은 부족의 원로만의 특권이었고 모닥불 앞에 모여서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나누어 먹는 일은 생존이고 행복이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고조선 시대까지는 육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고조선의 유적지에서 온갖 집짐승과 산짐승의 뼈가 출토되고 부여나 고구려, 신라, 백제 사람들 모두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가축은 초원이나 섬에서 대규모로 풀어서 길렀다. 중요한 먹거리인 고기를 제공해 주는 도축업자를 과연 천대했을까? 또 가죽은 갑옷이나 옷, 모자, 가죽신을 만들 때 요긴하게 쓰이는 짐승을 잡고 해체하는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자원을 대주는 고마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84년 백제 침류왕 1년,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 등 삼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고기에 대한 관념이 달라진다. 살생하지 말고, 동물을 제물로 바치지 말고, 고기를 먹지 말라고 가르치는 불교가 도입되면서 국가 자체에서 육식을 금지하게 된다.

한반도에 유입된 대승불교는 엄격하게 육식을 금지했다. 그러나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심 가는 것이 아니라면 먹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뿐, 적극적인 금지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음식을 수행의 중요한 실천으로 다루어, 수행자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고 성품을 거칠게 만드는 육식과 강한 자극을 주는 오신채를 철저히 금했다. 이는 한국불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일본불교 역시 아시아 대부분 불교국가와는 달리 스님의 대처를 허용하면서도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철저하게 육식을 금지했다. 

불교의 육식 금지는 고려 시대인 1219년 몽골과 형제맹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조약에서 고려는 몽골에 투항하면서 매년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몽골이 매년 10명 수준의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뒤부터 몽골은 빈번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어 군량 등 막대한 물자를 착취했고 고려도 사절을 몽골에 파견해 입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몽골과의 관계가 우리 육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다. 

양고기 등 육류가 주식인 유목민족인 몽골의 사신이 왔으니 당연히 고기를 대접해야 하는데 삼국시대 이후 육식이 금기시되었던 고려의 고기 다루는 수준은 형편없었다.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 제23권 잡속을 보면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육식이 금지된 나라이기 때문에 짐승을 잡는 도축 역시 기초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몽골이 고려를 지배하게 되면서 몽골의 육식 문화가 고려에 들어오게 된다. 당시 몽골의 유목민은 주식인 고기의 조리 방법이 나름대로 발달해 있었다. 

몽골의 영향으로 인해 맥적이나 설야멱적(雪夜覓炙), 설야적(雪夜炙) 등의 고기 요리가 다시 발달하기 시작했다. 맥적(貊炙)이란 말은 고구려 민족을 맥족이라 불렀고, 조미된 고기를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워 먹는다(炙)는 데서 생긴 말이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때 쓴 ‘수신기’에는 “맥적은 장과 마늘로 조리하여 불에 굽는다”라는 기록과 함께 “적(炙)은 이미 양념이 되어 있어 일부러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맥적이 고구려 이후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이 얼마나 고기에 대한 애정이 큰지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고기를 즐기던 우리 민족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가 국교가 된 이후 육식을 금지해 왔으나 13세기 몽골의 지배하에서 육식이 다시 하게 됐다. 이후 유교를 국교로 내세운 조선은 육식을 허용했지만 고기를 다루는 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유교의 양반 계급문화와 농경 중심 사상으로 인해 천대받는 일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도축하는 이들을 양수척이라고 하였는데 수척·화척, 무자리라고도 한다. 1425년(세종 7년)에 이들을 양민화하려는 정책에 따라 백정(白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백정은 고려의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굴복하지 않던 자들을 모아 압록강 밖으로 쫓아버린 무리라 하였으나,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으로서, 일반 백성과 융합되지 못하고 고리를 만들고 사냥을 하는 등 방랑 생활을 하며 가축을 잡고 고기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백정은 조선 시대 도살업, 유기제조업, 육류판매업 등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층이다. 고려 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고려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良民)·촌민(村民)·백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대신에 백정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살업·유기제조업·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을 지칭하는 데 사용됐다.

양수척 또는 백정에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설명으로 이는 백정에 대한 타민족유입설을 기초로 한 설명이다. 

백정의 유래에 대해서 두문동 설도 있다. 고려 왕건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던 이들이 양수척이 되었듯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에게 끝까지 충성하지 않았던 고려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지조를 지켰나 후손들이 조선 사회에 편입되면서 백정이 되었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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