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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시작 도축2

조선의 도축

조선의 도축    

조선 초기에는 백정 이외에도 거골장(去骨匠)이라 하는 양인 출신의 전문적 도살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이들 거골장이 사라지면서 도살업은 백정들이 도맡아 하게 되면서 최하층 천민의 신분이 되었다가 1894년의 백정이라는 신분에서 해방된다.

조선 시대 백정들이 잡은 고기는 푸줏간을 통해서 판매됐지만, 국가 차원에서 운영하는 현방이 있었다. 현방은 도사 또는 다림방이라고도 하며 오늘날의 푸줏간에 해당한다. 현방은 국가 제도상으로는 관인에게만 그 경영권이 허락됨으로써 관인의 독점적 생업이 되었다. 조선 시대 도축서, 사축서, 전생서에서 소를 공식적으로 도축했다. 한성 지금의 서울 백성들이 먹는 쇠고기의 공급은 성균관 근처의 반촌에 거주하는 재인이 현방에서 도축해 공급했다. 반촌에 거주하는 반인은 성균관 제사에 필요한 희생용 짐승을 잡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으며, 현방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도살업이 조선 중기 이후 반인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반인의 도움을 받은 성균관생이 관리로 출세하게 되면, 그 대가로 반인의 현방 영업을 지원했다.

조선 시대 한성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인 한경지략에는 현방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한경지락에는 “현방은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이다. 고기를 매달아서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고 한다. 도성 안팎에 모두 스물세 곳이 있다. 모두 반인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로 삼게 하고 세로 내는 고기로 태학생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서울 성곽 10리까지는 성저십리라 해서 한성부에 속하므로 서울에 23개의 정육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도축과 판매가 동일장소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조선 시대 한성부에서는 공식적인 23개의 도축장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24곳이라 했는데 한경지락에는 23곳이라 했으니 어떤 사정으로 한 곳이 줄어든 모양이다. 현방은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어떻게 고기를 팔았을까. 당시 자료를 보면 고기를 파는 곳을 현옥이라고 불렀고 경성에는 5개의 현옥이 존재했다. 구한말 경성에서 사용되는 말을 정리한 경성어록에는 “고기 파는 집을 수육 판매소 또는 관집이라 하지만 전일에는 다림방 이라고 하였다. 다림방은 한자로 현옥이니 그때에는 소를 매달아서 잡는 까닭에 현옥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경성에 다섯 곳의 현옥이 있었다는 것은 경성부의 근대식 도축장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기를 파는 현방, 다림방, 현옥, 푸줏간을 도축된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고(발골) 부위별로 정선(정육)해 판매를 하는 현대식 정육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조선 시대에는 살아 있는 가축의 도축, 발골, 정 판매 등 고기 유통의 모든 것이 현방에서 일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현방은 소만 전문적으로 도축, 발골, 정선 판매를 하였고 다른 육류들을 판매하지 않은 점도 살펴봐야 할 점이다. 

한성의 인문지리지인 한경지략에 소개된 서울 시내에서 고기를 판매하는 시전은 생치전. 건치전. 생선전이 병문에 있고 광통교에 닭전과 계란전이 있다고 나온다. 당연히 돼지고기를 파는 저육전도 여러 곳이 서술돼 있다.

생치는 산 꿩, 건치는 말린 꿩이다. 꿩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저육)가 한성에서 팔리고 있었다. 꿩을 제외하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저육전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꿩과 닭은 자급자족하여 유통량이 적었고 한성에서는 돼지는 제법 유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한성의 쇠고기 소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안의 24개 푸줏간, 3백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관영 도축장이 도축서, 사축서, 전생서 3개에 한성에 24개 현방 그리고 각 300여 고을에서 한곳씩 있었다고 추정하면 약 327개소의 관영 소 도축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하루 500여두의 소가 도축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 수치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근현대의 계절별 소 도축 추세를 살펴보면 추석 이후 3월 농번기 전까지 소의 도축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농번기에는 소의 도축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조선 시대의 소 도축도 같은 패턴으로 단순히 하루 500두를 약 300일간 도축한다면 연간 15만두를 도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요즘처럼 30개월 키워서 도축한다고 가정을 해 보면 상시 사육두수가 약 40만두 이상이고 일소였던 그 당시 조선의 역할을 고려하면 소는 6년 정도 길러서 일을 시키다가 잡았을 것으로 가정하면 조선 시대 90만두 이상의 소가 사육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제가가 북학의가 정조 2년(1778년)에 쓰인 것을 고려하면 18세기 조선의 소 사육두수가 50만에서 90만두 내외였을 것이고, 당시의 인구가 700만정도였다면 지금인 1인당 0.06두, 즉 18세기에는 1인당 0.7두의 소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소는 거의 고기를 먹기 위한 소이지만 조선 시대의 소는 중요한 노동력이었기에 사회 경제적으로의 위상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한양에서의 쇠고기 판매를 독점할 수 있었던 곳은 반촌이고 그곳에 사는 이들이 반인이었다. 반인이 백정은 아니었지만, 도축하는 반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기원 역시 정확하지 않다. 조선전기에는 유관 기록을 찾기 어렵고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반촌과 소의 도살에 관한 자료가 보인다. 

숙종실록 14년 1월 21일에 호조판서 이유가 2개월간 반인들의 도살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으니 적어도 숙종 대에 오면 반인이 국가의 공인을 얻어 소의 도살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촌인들의 도살은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 7년 10월 30일조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쇠고기를 반찬으로 제공한 것이 오랜 유래였는데 성균관에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학생들의 의견이 있어 회의를 열어 기숙사와 명륜당에서는 먹고 식당에서는 먹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 사료를 통해 오래전부터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에 쇠고기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반촌민들에게 소의 도살을 허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반촌인들이 한양의 쇠고기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한경지략 현방에서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 생계를 하게 하고 세금으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의 반찬을 하게 한다는 내용도 역시 이런 내력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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