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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시작 도축 3

일제 강점기의 도축

일제 강점기의 도축장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정이 관청에서 설치하는 도살장 설비비 지출을 결재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칭하면서 근대식 동물원을 개원하는 해인 1909년 최초의 현대식 도축장이 금화초등학교 자리인 천연동 13번지 설립 운영됐다.

의정부에서, ‘탁지부에서 청의한 것으로 인하여 한성부에 잡비로 줄 증가액 456원(圓), 외교 고문 스티븐스(須集雲 : Stevens, D.W.)의 관사 증축과 수리비 1만1,822원, 전라남도 관찰부의 경무 고문, 보좌원, 통역원의 거처소 수리비 100원 17전, 관청에서 설치하는 도살장 설비비 1만368원6전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사안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을 내리기를, "재가한다." 하였다. 
고종실록 47권 43년 4월 20일 대한 광무 10년(1906년)

서울역사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일제 경성부는 1917년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도축장을 현저동 도축장 하나로 통합해 경성부영 도축장을 설립하고 신설리와 아현리의 도살장은 폐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2,000원의 경비를 들여 도축장 건물을 증축했다. 근대 도축장이 중앙행정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된 것은 위생 담론의 확산과 동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도축장은 도심 부적격시설로 평가될 수 없는  필수시설이자 중요한 수익시설이었다.  
현재와 같은 운송 및 수도 시스템이 부재했던 당시에  도축장은 주민의 수요와 위생을 위해서 도시 내부 혹은 근교에 위치해야 했던  시설이었다. 또한, 도축장을 관리하는 단체에 수익이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  지방에서는 도축장과 우시장을 주민이 시가지 내에  설치해 달라고 청원하는 일도 많았다. 


1922년 경성지도를 보면 현저동의 서대문 감옥 남쪽에 ‘도수소’라는 표시를 확인할 수 있다. 독립문 거리를 따라 흐르는 하천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부지 안에 T형 평면을 한 큰 건물 한 채와 부속 건물로 보이는 11채가 있다. 이러한 부지 상황과 건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도축규칙시행세칙’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도살실 주위에는 14.4㎡ 이상의 부지를  확보하는 규칙이 있음을 고려하면 T형의 커다란 건물이 주위의 건물에서 특별히 떨어져  있어서 도살실로 생각된다.
이 도살실의 바닥은 콘크리트나 두꺼운 판재로 마감되고 적당한 경사를 줘서  오수배설구로 흐를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또 내벽의 허리벽은 1.2m 이상까지  돌이나 벽돌 또는 금속판으로 마감되어 있을 것이다.
위생관리의 필요 및 주민의 수요 그리고 거대한 경영 수익이라는 이유로  서울에서 도축장 그리고 가축시장은 일찍부터 행정관리하에 들어가 일본강점기 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부영의 형태로 유지됐다. 
경성부는 앞서 살핀 신설동과 아현동의 두 도축장을 폐쇄하는 동시에 부내  각 곳의 사설 도축장을 폐쇄해 1917년, 현저동 103번지에 ‘현저동 도축장’을 개장했다. 서대문형무소 남쪽에 있는 현저동 도축장은 1925년에 숭인동으로 이전 신축할 때까지 운영되었다. 자료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래 지도는 서울시 역사박물관에서 주장하는 1917년 현저동 103번지의 현저동 도축장의 위치다. 




서울역사박물관 등의 자료를 토대로 추적을 해보면 서울역사박물관의 주장과는 달리 1909년 최초의 현대식 도축장은 지금의 금화초등학교자리인 천연동 13번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도축장보다 1909년의 도축장이 더 도심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방 이후 서울시 시영 도축장의 위치를 계속 추적해 보면 도시의 팽창으로 인해 점점 도시 외곽으로 도축장이 이전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앞에서 현방을 증언한 자료에는 1929년 이전 서울에 현방이 5곳이 있었다는 것과 도축장 개수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909년과 1917년 사이 24개의 현방은 5개의 근현대식 도축장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현방에서 도축, 발골, 정선, 판매가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도축장은 아마도 도축만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미 1917년 이후 확립된 서울의 도축 체계는 가락동 도매시장이 폐쇄될 때까지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소비지 도축장 옆 가축시장으로 산지에서 살아있는 가축이 거래되어 이용도축 도축장을 직접 경영하는 도축장 경영자, 도축장 경영자는 아니지만, 도축장에 생축을 도축 의뢰해 지육을 가져가는 이용도축업자로 구분한다. 도축장 경영자가 도축업과 포장처리업 허가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 도축+포장처리까지 하는 업체가 있고 순수하게 도축만 하는 업체가 있다.
되는 경우가 주요한 유통 경로였고 교통과 냉장시설 등의 문제로 타지에서 육류가 유입되거나 유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면 1921년 경성부 기록에 나와 있는 도축 두수가 경성부의 소비량으로 가늠할 수 있다.
1923년에는 경성부영 도축장 개선 작업의 하나로 전기 도살을 실행했다. 당시 서대문 형무소와 도축장 사이에 있는 500평 크기의 연못으로 도축 폐수가 방류돼 심한 악취와 파리가 들끓었다고 한다. 
전기 도살을 도입한 경성부 도축장은 1923년 한 해 동안 소는 2만2260두 돼지는 8330두를 도축했다. 전국의 도축 두수는 소 27만5872두 돼지 13만9026두로 경성의 소 도축 두수는 전국 도축 두수의 8%, 돼지는 6%였다. 그 당시 경성인구는 30만명 전국 인구는 1700만명으로 전국의 1.7%가 경성에 살았다. 소비에서 소고기의 경우 전국 평균의 4.7배, 돼지고기 역시 약 3.5배 더 소비한 것으로 나타난다.
1924년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도축장은 1321개로 그 중 관설 도축장은 1개소 공설 도축장이 1275개소 사설 도축장이 45개소였고 경기도에는 128개 도축장이 있었다.
이 해의 전국 도축 두수는 소가 28만6711두로 1923년에 비해 3.9% 증가했고, 돼지가 21만773두로 돼지는 51.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돼지의 도축 두수가 급증한 이유는 이 시대에는 돼지의 경우 자가 도축이 성행하여 통계수치가 부정확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1930년 전국 가축 통계를 살펴보면 소는 161만1585두, 돼지는 138만6891두가 조선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이중 조선종이 59.6% 버크셔종이 35.4%, 요크셔종이 0.9% 중국종이 3.9%였다. 
소의 전국 사육두수가 160만두 이상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돼지 역시 조선종이 60%였고 다음으로 버크셔종 몸무게는 암컷 250∼300㎏, 수컷 270∼320㎏이다. 영국의 버크셔 원산으로, 목과 다리가 짧으며, 주둥이도 짧고 위로 많이 휘어 있다. 털은 검은색이고, 얼굴과 꼬리, 네 다리에 흰색 반점이 있다.

으로 35.4%가 사육됐다는 점에서 조선에서 흑돼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5년 현저동 도축장은 숭인동 242번지로 이전한다. 거기에는 기관고(보일러)를 설치 열탕 공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1931년 경성부 회의 안건으로 도수장터 현저동 102번지 3322평을 서대문 형무소에 매각하는 안건을 협의한 것으로 보아 1917년 현저동으로 이전되었던 경성부 도축장은 1925년 이미 숭인동으로 이전되었다는 걸 알 수 있고 도축장 부지의 평수가 3322평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932년 부산부영 도축장 월별 도축 두수로 추정해 본 도축 계절 지수

 
        소    돼지   소계절지수  돼지계절지수
1월    330   22      111%        74%
2월    323   32      108%        108%
3월    241   27        81%        91%
4월    208   25        70%        84%
5월    198   25        66%         84%
6월    210   14        70%         47%
7월    265   15        89%         50%
8월    303   25       102%         84%
9월    352   34       118%        114%
10월   308  34        103%        114%
11월   393  54        132%        182%
12월   450  50        151%        168%


1932년도 부산부영 도축장의 월별 도축 두수를 소와 돼지의 도축 계절 지수를 보면 소는 농한기와 농번기에 도축 마릿수의 변화가 크다. 반면 돼지는 여름철의 수요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소는 역우 즉, 일을 시키기 위해 키워졌음을 알 수 있다. 여름에 돼지 도축이 줄어드는 이유는 당시 냉장, 냉동시설이 열악해 여름철에는 돼지고기의 부패가 빨라 소비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쇠고기보다 돼지고기의 부패가 더 빠르게 진행된다. 1970년대까지도 여름철 식중독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가 돼지고기였다. 
1937년에는 경성부에서 숭인동에 있는 가축시장과 도살장을 마장동 이전 추진 계획을 세우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무산이 되고 해방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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