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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시작 - 도축4

해방 후 현대식 도축장의 탄생

해방 후 현대식 도축장 탄생    

해방 이후 1948년 서울시 인구는 160만명이었지만, 서울시는 신설동과 영등포에 있는 도수장 2곳을 시설 미비로 폐쇄한다. 이 시대에는 집에서도 도축이 이루어지는 등 도축이 현대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1957년 서울시 5개 도축장에서 소 6만5816두 돼지 1만8411두 도축됐지만, 서울시에서 하루에 밀도살되는 소가 20두, 돼지도 약 20두였다고 한다. 소는 약 10%, 돼지는 30%가 밀도살로 유통됐다고 볼 수 있다. 

현대적 개념의 도축장은 1959년에 설립된 마장동 시립도축장이다. 마장동 시립도축장은 차관으로 받은 1억5천만환과 ICA원조자재 7만2000달러를 투자해 지상 343평, 지하 14평 시간당 소 75두, 돼지 70두의 도축이 가능한 시설을 도입했다. 

1961년 9월 20일 마장동 제1동장이 개장하였는데 운영은 삼일축산(주)이 맡았다. 전국에 개설된 도축장 중 유일하게 냉동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1966년 미아리, 종암동, 응암동 도축장에 시설 개선 명령이 떨어졌다. 1966년 전국에는 770여개 도축장이 있었으면 일부 도시의 10여개소 도축장을 제외하면 박피용 칼이 아닌 재래식 농기구를 사용해 가죽을 벗겼을 정도로 시설이 작업 수준이 낮았다고 한다. 

1967년 서울 시내에는 650여개의 정육점이 있었다. 이는 18세기 조선 시대 한양 인구가 17만명이던 시절 24개소의 현방이 있어서 현방 1개소당 약 7000명의 한양 사람들에게 쇠고기를 공급했다면 1967년에는 650여개의 정육점은 1개소당 서울시민 2461명에게 쇠고기를 공급했다. 1968년 조사에 의하면 서울시민의 육류 소비 비율은 쇠고기 56% 돼지고기 24% 닭고기 15%였다. 1968년 소 한 마리가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다음과 같았다.                    

항목              금액

우시장입장료     120 

법정중개료     1,500 

비법정중개료   3,000 

교통비및 잡비  2,700 

중간이윤        2,400 

체중감모비     1,680

도축세           500

검사수수료       50

도장사용료      200

영업세         1,900 

운반비           500

포장비           100

인건비           650

동력수도료      300

점포세           500

기타잡비         500

계            16,600

1968년에는 서울 시내 800여 정육점 중 400여 곳에서 밀도살된 쇠고기 취급했으며 이는 연간 소고기 공급물량의 약 40% 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의 밀도축은 마장동, 하왕십리, 답십리, 성수동, 신사동 등 당시 서울 변두리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969년에는 마장동 시립도축장에 별도로 육류도매시장이 개설됐다. 마장동 시립도축장은 김남형 사장의 성풍산업이 맡아 운영을 했다. 시립도축장 개설과 함께 사설 도축장을 폐쇄 조치하게 된다. 이에 서울 성북도축장(대표 송휘림), 서대문도축장(이영근), 영등포 도축장(이영근)은 도축장 시설 사용 정지처분취소 소송을 서울고등법원에 낸다.

1969년 당시 서울에는 마장동 시립도축장, 송휘림 한국축산가공 사장이 경영하는 미아리 도축장, 재단법인 현대방 이영근 대표가 경영하는 응암동 도축장. 서울축산기업조합이 경영하는 신림동 도축장 그리고 영등포 도축장 5개의 도축장에서 서울시 894개 정육점에 고기를 공급했다.

도축장은 계속 늘어난 1971년 전국에 750개가 생겼고 서울에서는 농협중앙회가 1억원의 예산을 들여 도축장 설립계획을 세운다. 농협중앙회는 당시 성동구였던 천호동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도축장을 대지 1만여평에 철근 콘크리트 지상 2층, 연건평 800여평의 규모로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설비로 도축장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1972년에는 돼지의 밀도살이 심했다. 남대문 시장에 하루에 영등포, 봉천동 등 변두리 지역에서 밀도살한 돼지 40여마리가 반입되어 판매됐다. 또 매일 새벽 열차 편으로 영호남에서 밀도살된 돼지고기가 들어왔는데 전북 익산, 김제 등 지방에는 돼지콜레라가 유행하고 있어 병든 돼지고기가 반입되어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1974년 성동구 마장동 우시장, 영등포구 독산동 139 성풍산업, 협진식품이 서울시의 주요 도축장이었으며 서울시의 정육점 수는 1769개소로 1969년에 비해 2배 늘어났지만 1975년 전국의 도축장수는 656개소로 1966년 770개소에서 114개 감소했다.

1979년에는 돼지가격 폭락으로 섬과 오지로만 한정되어 있던 ‘자가 도살 지구 허가권’을 도지사에게 이양하면서 1700개소에서 9073개소로 대폭 늘렸다. 또한, 돈육 가공소비 확대를 위해 롯데 축산, 한국냉장, 제일제당 등의 육가공장을 신설하기로 한다. 1979년이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축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롯데와 삼성 그룹의 육가공 산업 참여는 이후 한국 육가공의 상당한 변화를 주도하게 된다. 

1983년에는 천호 농협도축장, 성동 우성농력도축장, 영등포 협진식품 도축장 등 서울 3대 도축장 체제가 정립되었다. 

서울시 정육점은 1980년 3520개에서 1984년 5478개로 56% 증가하였는데 이는 서울의 인구 팽창과 육류 소비가 늘어난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초기 투자비가 적게 드는 정육점을 운영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 서울 등의 소비지에서의 도축보다는 산지에서의 도축이 늘어난다. 

1986년에는 성내동 축산물도매시장이 가락시장으로 이전했다. 가락시장으로 이전한 축산물도매시장은 대지 4198평, 건평 2288평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였다. 도축 처리능력은 1일 소 350두, 돼지 1000두였고 저장 능력은 소 800두, 돼지 1200두였으며 여기에 소 100두, 돼지 200두의 포장육 생산 설비를 완비했다. 

1988년 1/4분기에는 서울의 3개 도축장이 서울 전체 쇠고기 공급물량의 56.5% 41,355두를 공급하였다.

점점 소비지 도축이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통계이고 3개 도축장 중에서도 축협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1984년 젖소 중에는 비육용 수소도 있지만, 젖을 짜다 늙어서 도태된 암소들도 많이 섞여 있다. 서울의 3개 도축장에서 경매되는 소는 465마리다. 이 중 순수한 한우는 25%인 115마리, 수입 육우 및 교잡우가 151마리 32% 차지하고 있다. 젖소고기는 질에서도 차이가 있어 도축장의 경매가격도 일반한우보다 500-1000원 정도 낮은데도 시중 소매점이나 갈비집 등에서는 한우고기와 똑같은 값으로 팔리고 있어 사실상 중간상인들이 폭리 일반적으로 순수한 한우는 색깔이 진하고 윤기가 있지만, 젖소는 색깔이 다소 옅으며 늙어서 도태된 소의 경우 기름기가 많고 윤기가 없으며 근육이 질겨 보인다는 것이다. 또 검붉은 색을 많이 내는 것은 수입산 소고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같이 서울에서 판매되는 쇠고기 중 43%가 젖소였다고 한다.                                             

             축협  우성농역  협진식품    계

1988    17,952   14,104    9,299  41,355

           43.4%    34.1%   22.5%  100%

1987     36.7%    38.7%   24.7%


1989년 전국 도축장 현황    

       도축장수 소 도축능력

서울  4           1,156 

부산  3              600

대구  1              160

인천  1              300

광주  2              300

경기29            1,767

강원22              800

충북 7               475 

충남19              886 

전북18              940 

전남25              921

경북29              810

경남21            1,705 

제주 3                25 

 계184          0,845 


1991년 전국에는 군마다 1개소씩 총 171개소의 도축장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 도축장의 가동율은 평균 27%에 불과했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이 도축세를 걷기 위해 통폐합을 꺼리고 무리하게 운영을 강행했던 곳이 많았다. 85년 185개소, 89년 179개소, 90년 171개소였다. 

1989년 말 179개소 시군 등 행정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이 77개소 이들 중 냉장, 냉동시설을 갖춘 특급 도축장은 1곳에 불과 도축세 수입 목적 도축세가 지방세 총수입에 차지하는 비중80년 0.6% 1989년 0.3%에 불과 89년에는 소의 27% 돼지 57% 대도시 공판장과 도매시장에 딸린 도축장 9개소 제외 170개 도축장은 소 16.1%, 돼지 53.8% 가동율이 저조했다. 

1994년 6월 2일 협진식품이 10층 건물을 짓다가 자금압박으로 부도가 나자 같은 해 11월 토왕건설이 협진을 인수했다. 이때 협진은 서울시 소고기의 1% 돼지고기의 12% 정도를 공급하고 있었다. 

1993년 소 돼지 등급판정제가 시범운영되고 1995년 전국 도축장으로 확대되었다. 1995년 마장동 도축장 부지에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고 1998년 3월 이전에 도축장은 서울시 밖으로 이전하기로 했었다. 

1995년부터 현대식 축산물 종합 처리장인 LPC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95년 축산진흥공사 설립 안성군 민간과 공동 투자 안성축산공사 설립 안성군이 70% 민간업체인 안성축협, 신양양돈, 제일곡산이 각각 10% 총사업 118억원 일죽면 금산리 금산공단내 부지 8천평 하루 소 110두 돼지 2200두 처리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것이 지금은 도드람 LPC다.

1998년 3월 31일 마장동 도축장이 개장 35년만에 폐업했다. 2010년 9월 서울가락동축산물공판장이 충북 음성군 삼성면으로 이전하면서 600년 서울 도축장의 역사도 끝을 보게 되었다. 

1909년부터 근현대사 속에서 도축장 설립과 운영 과정이 단순히 수익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도축장은 고기 유통과 소비의 시작이고 위생문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도 도축장은 정부에 의해서 공공적인 성격으로 관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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