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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겹살 소금 구이 왜? .....

삽겹살 소금 구이 왜? 1970년대 후반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겼을까?

 개성 출신의 동화작가이자 미식가던 마해송이 1957년에 쓴 <요설록(饒舌錄)>에는 “개성산 삼층(三層) 제육이 제육으로 치는 것은 정평이 있는 일이지만 개성산이라고 모두 삼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양돼지 아닌 순종을 그것도 소위 양돈장 같은 대규모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과부 댁 같은 데서 집에서 기르는 것이다. 뜨물을 얻어다가 먹이는데 얼마 동안은 잘 먹이고 그 다음 며칠 동안은 뜨물을 주지 않는다. 잘 먹을 때에 그것이 살이 되고 못 먹을 때는 기름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 비계, 살 삼층 제육이 된다는 것이다. 고수하고 맛 좋은 품이 양돼지에 비할 바 아니다.”라고 해서 삼겹살이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비육(肥肉)의 결과임을 증언하고 있다.
 
삼겹살이야기를 하면 개성에서 삼겹살이 유명하다고 하면서 마해송 작가의 요설록에 나오는 이야기가 인용된다.
안타깝게도 마해송 선생의 이야기는 재래돼지와 버크샤의 교잡으로 키운 개량종 돼지를 보고 오해하셨던 것 같다.
마해송 선생의 글에서 개성산이라고 모두 삼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글은 이전에 돼지는 삼겹살을 형성 못하고 그냥 지방만  형성된 배밧지살이었다는 걸 말 해 준다. 
양돼지 아닌 순종을 그것도 소위 양돈장 같은 대규모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과부 댁 같은 데서 집에서 기르는 것이다. 이 부분은 해방이전에 개성에 대규모는 아니지만 전업적 양돈장이 있었다는 말일까? 1950년대에 남한에도 일반일들이 보기에 백여두만 키워도 대규모 양돈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제 강점기 돼지는 채비 동물이고 청소동물이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물론이고 개성 같은 도시의 민가에서도 돼지 사육이 많았다고 봐야 한다.
뜨물을 얻어다가 먹이는데 얼마 동안은 잘 먹이고 그 다음 며칠 동안은 뜨물을 주지 않는다. 잘 먹을 때에 그것이 살이 되고 못 먹을 때는 기름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 비계, 살 삼층 제육이 된다는 것이다. 이걸 교차 사육 방식이라고 모맛칼럼니스트가 이야기 하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쌀뜸물같은 열량이 많은 사료를 주었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과연 고열량의 먹이를 주었다 안주었다. 해서 맛있는 삼겹살이 형성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돼지를 180일정도 키우는데 돈사료 1,2,3호 사료 그다음 젖먹이(젖뗀)사료,육성돈,비육돈 그 사료 단계별로 뼈와 골격을 형성하고 그다음은 근육을 키우고 그다음은 살을 찌우는 방법이다. 성장과정에 따라 영양성분을 달리한 사료를 먹이고 각각의 기간 동안 역할이 조금씩은 다르다. 무조건 영양 많은 사료를 먹인다고 좋은 삼겹살을 만들 수는 없다.
개성지방의 위도 37.8도 북반구에서 가장 돼지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라고 대학 시절 배웠던 기억이 있지만 아마 지구 온난화를 온도에 의한 사육 환경이 좀 달라질 수도 있다. 
마해송 작가의 요설록의 삼겹살이야기는 돼지의 사육 방식에 대한 기록이여서 자주 인용되는 것 같다. 아니 삼겹살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꼭 인용되는 소중한 자료다.
한정된 근현대사의 자료들을 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인용하다 보니 작가의 이야기가 사실처럼 받아 들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삼겹살에 대해서 살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축산사나 식육산업사, 생산자의 시각으로 삼겹살을 이야기 하는 이는 찾아 보기 힘들다.
 흔히 근대 농업 근대 축산의 시작을 1906년 일제가 조선의 농업 기술의 시험, 조사 및 지도를 위해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창설할 때부터 라고 이야기 한다. 
1903년 함경북도에 중형 요크셔종이 최초로 도입된 이래 1905년 경기도와 전남지역에 버크샤종이 도입되면서 1908년 본격적으로 재래돼지와  버크샤종의 누진교배 개량이 되지 않은 종의 가축을 교배하여 개량종에 가깝게 만드는 육종법이다.
를 장려하면서 잡종화되었다. 
 안타깝게도 근대 축산은 1908년 버크샤와 요크셔 종이 들어와서 우리 재래 돼지와 누진 교배를 시작하고부터 라고 하는데 필자는 1884년 한국 최초의 농사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부터라고 이야기한다. 농우목축시험장은 존속기간은 1906년까지였으며 이 시험장의 소속기관은 갑오개혁후 농상공부의 외청으로 있다가 궁내부(宮{內府{)로 이관되었는데 이는 농사시험장이 고종의 근대화 사업 추진의 하나로 중요하게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험장은 개설이후 명칭이 바뀌었으나 작물 및 축산시험 사업의 내용은 변함이 없었고 1900-1902년 사이에는 농업기술직의 증원과 기구 확대를 하면서 대대적인 가축시범사육장을 재개설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불가항력 적인 가축의 질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래도 농사시험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지도층의 인식은 확고하여 이를 계기로 그 이후 잠상시험장, 원예모범장 등이 우리의 자주적 역량으로 잇달아 개설된 것이다. 따라서 일제총독부의 권업모범장 개설은 우리의 자주적 의사나 역량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침략전초기지로 개설한 것이다.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1884-1906)의 기구변동과 운영 김영진 홍은미
 따라서 자주적 능동적으로 서양의 농사시험 연구를 시행했던 농우목축시험장이 우리 근대 축산의 시작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무목축시험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견미사절인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1883년 귀국한 후 그 사절의 일원이었던 훈련원 첨정(僉正, 종4품) 최경석(崔景錫)이 1884년에 설치한 범농장이다. 최경석은 미국에서 각종 농작물의 종자와 종축을 들여와 품종개량과 아울러 낙농업을 으키고 개량농기구를 구입하여 근대적인 농법을 도입 코자 하였다
한편으로 가축은 1885년 7월에 캘리포니아산 말 3두(♂1, ♀2), 젖소(Jersey) 3두(♂1, ♀2), 조랑말(Shetland) 3두(♂1, ♀2), 돼지 8두, 양 25두 등이 도입되었으며 왕은 이들 가축을 위해 주위 약 8리(哩)의 땅을 하사하였다.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1884-1906)의 기구변동과 운영 김영진 홍은미
농무목축시험장에 1885년 서양종 돼지 8마리가 도입된 기록이 있다. 
1902년(명치35)경 농상공부 불란서인 기사(技師) 쇼트(M. Schott 한국명 蘇特)씨는 모범적인 사육장을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개설하고 세계적으로 우수한 젖소, 돼지, 면양, 기타 가축을 모았다. 그 설비는 당시의 관민이 경탄할 만큼 이상적이고도 완비된 모범사육장이었으나 얼마 안되어 우역(牛疫)이 발생, 20여두의 값비싼 젖소가 폐사한데다 돈역(豚疫)이 발생, 돼지도 전멸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대화정(大和町, 현 서울 중구필동)에서 우유판매업을 하고 있었는데 쇼트씨가 내 집에 찾아와 “어떻게 하든 한 마리라도 살리고 싶으니 적당한 방법이 없겠느냐”고 문의해 왔다. 나는 사육장에 동행하여가 본 결과 시기가 이미 늦어 살릴 가망이 없었다. 그 뜻을 그에게 전한바 쇼트씨는 대단히 “안타까워하면서 이와 같은 훌륭한 시설을 하고 가축사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못된 질병이 발생한 것은 참을 수 없이 원통한 일이다. 혹시 일본 정부가 누구에게 시켜 병독을 가져다가 깊은 밤에 내 목장에 던진 결과가 아닌지 모른다. 아니 던진 게 틀림없다. 나는 일본인들의 비열한 근성을 원망한다.” 小早川九郞, 1944, 朝鮮農業發達史(發達篇), pp.190-191.
三城景明, 1930, 韓末を語ゐ(平山政十\ : 三昔前の北鮮武者修業の旅).
이 모범사육장의 가축 총수는 최소한 100두 이상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보통가축단위(家畜{單位)라 하여 소 1두에 돼지 5두,양 10두로 환산하는바 소 10두분의 돼지만 하더라도 50두가 되며, 양은 100두가 되기 때문 이다. 비록 우역과 돈역으로 젖소와 돼지가 모두 폐사하였어도 이 사육장은 1906년까지 존속하여 면양 사육만은 계속된 것으로 풀이된다.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으로 출발하여 1906년 3월까지 23년간 존속하였던 농목국 또는 종목과가 우리 축산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질병에 의해서 수입된 돼지들이 폐사하고 없지만 조선땅에 최초의 서양종의 돼지가 도입된 것은 1903년이 아니라 1885년부터 였다는 것이고 일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주적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31년 6월 29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소화 5년 1930년 돼지가 1,386,891두중 조선종이 150.96% 박샤(버크샤)35% 욕샤(요크샤) 0.09%, 중국종이 0.39% 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기사가 잘 못된 것 같다. 
조선총독부통계년보를 살펴보면 소화 5년인 1930년 1,386,891두의 돼지중 개량종 및 잡종이 560,445두 40.4%, 소화 6년 1931년 1,348,199두중 개량종 및 잡종이 590,518두 43.8% 소화 6년 1932년 전체 돼지 1,339,473두중 개량종 및 잡종이 638,982두 47.7%로 전체 사육두수의 40%이상이 개량종 및 잡종이다. 
대정 3년 1914년 전체 돼지 757,803두중 개량종 및 잡종이 10,400두로 1.4%에 불과했던 일제1914년에서 1932년까지 재래종 돼지의 숫자는 747,403두에서 700,491두로 약보합세로 보이는 반면 불과 만두에 불과했던 재래 돼지는 638천두로 60배이상 사육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즈음 삼겹살 부위가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세겹살이라는 단어가 이때 등장한다.


1927년 조선 총독부는 축우양돈양계등을 십개년계속 장려 
빈농의 구제겸 부업도 장려책을 진행하는데 말이 빈농의 구제 겸 부업의 장래이기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서 양돈 양계를 장려하고 조선우와 쌀을 강탈하여 가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런 계획으로 소화2년 1927년388,620두였던 개량종이 5년두의 소화7년 638,982두 164%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8년쯤 일본에서 검은돼지 버크샤종과 흰돼지 요크샤종을 도입하여 조선농가에 보급하려고 했다. 쇠고기를 좋아하고 쇠고기소비가 많았던 조선사람들이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많이 먹게 되면 일본으로 가져 갈 수 있는 조선우의 숫자를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 당시 조선 농민의 입장에서는 새로 도입되는 버크샤나 요크샤는 이미 키우고 있는 돼지의 두배 정도 큰 돼지였고 흰돼지를 본 적이 없던 조선 농민에게 흰돼지의 선호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그나마 검은 돼지인 버크샤와 조선 재래종의 누진 교배에 의해 개량종은 키울 만 했다.
단순히 털색깔도 문제가 되었겠지만 고기의 맛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돼지고기를 선호하지 않던 조선 사람들의 돼지 요리법은 주로 삶아서 수육을 먹거나 돼지 국밥 정도를 만들어 먹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어쩜 요크샤 돼지고기는 삶았을 때 국물 맛이 버크샤 보다 못했을 수도 있다. 최근 서울에서 유행하는 돼지국밥집들이 다들 버크샤나 듀록등 유색돈의 돼지고기를 이용하여 삼원교잡종과는 다른 감칠맛의 육수를 얻어내는 것을 보면 단순히 모색의 문제이외의 고기 맛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 본다.
버크샤를 도입하여 재래종보다 체중이 배정도 커진 개량종은 생산성면에서 요크샤종보다 못 하여 일제강점기후반인 1930년대 말부터는 요크셔를 장려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돼지 품종별 사육두수 

출처: 조선총독부 통계년보
조선총독부 통계년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42년 버크샤와 잡종 개량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서 전체 사육두수에 64.5%를 높게 사육되고 있었다. 그러나 요크샤는 일제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보급하였으나 거의 보급을 하지 못하고 해방이 되었다. 
서울대 축산학과 교수였던 고 이영빈 교수의 1075년 월간 양계의 기고문을 보면 1920년대에는 토종(토산종) 1930년대는 버크샤종 1940년에는 중요크샤종 1950년에는 햄퓨샤, 듀록 1960년대에는 랜드레이스, 태요크샤 1970년대에는 각품종의 계통이 주로 사육되었으면 1980년대이후 3원 교잡종이 사육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다.


고 이영빈 교수의 분류나 조선총독부 통계자료를 보면 1920년대는 조선종 즉 재래돼지가 주를 이루고 있어 돼지 배바지살은 있어도 삼겹살이 형성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삼겹살이란 말도 나오지 않았을거다. 일본 역시 1900년대 초반 서양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했으니 삼겹살을 만난 건 우리랑 별 차이가 없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 버크샤를 주로 키우기 시작하면 서서히 삼겹살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 마해송이 요설록에서 개성산이라고 모두 삼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부분이 1930년대에도 일부 재래종 돼지는 비계만의 배바지살만 있었다. 일부 잘 사료 영양 관리를 잘 한 버크샤나 버큐샤 교잡종에서만 삼겹살이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1931년경에 세겹살이란 말이 처음 나오기 시작했다.


삼겹살 소금구이의 등장
그럼 왜? 우후죽순처럼 삼겹살 구이집들은 1970년대 중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일까? 
조선의 재래돼지는 삼겹살을 형성할 수 없었고 그냥 비계만 가득한 배바지살만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버크샤 돼지가 들어와 교잡종 즉 개량이 되면서 삼겹살이 서서히 형성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버크샤 계통의 돼지들이 전체 사육두수의 40%정도 되었던 1930년대에는 세겹살이라는 말이 쓰이고 삼겹살이 가장 맛있는 부위라고 칭찬을 받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도 요리책에는 삼겹살은 조리해서 먹는 부위지 그냥 구워 먹는 부위가 아니었다. 삼겹살은 돼지삼겹살전(1980년 한국의 가정요리), 삼겹살볶음(1982년 한국가정을 위한 가정의 기본요리), 삼겹살 감자찜(1983년 돼지고기 요리) 등 조리를 해서 먹었다. 1988년 윤서석의 요리책 <한국요리>에는 ‘삼겹살은 다진 고기요리나 조림으로 적당한 부위’로 나온다. 박정배 음식의 탄생 삼겹살  쿠켄 2014
1939년에 발행된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 (증보 9판)』중 ‘수육’에 관해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우육’의 부위에 대해서 “우설,등심,안심,사태,아롱사태,콩팟,업진,양지머리,고들개(양깃머리),홀데기,둔육”으로 자세히 나누어 설명한 것에 비해 ‘저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두 부분만 소개하고 있다.
비계 :가죽 밑에 잇는 기름
세겹살 (뱃바지):배에 있는 고기 (돈육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
따라서 이 당시 쇠고기에 비해 돼지고기는 부위 분화가 덜 되어 있었고 조리법도 다양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그리고 “돈육 중에 제일 맛있는 고기”로 세겹살을 꼽고 있어 현대의 ‘삼겹살’이 과거에는 ‘세겹살’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돼지고기를 지칭하는 명칭이 앞의 재료 소개는 ‘저육’으로,뒤에 나오는 조리법에는 ‘제육’으로 나와 두 단어가 공통적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규진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이화여자 대학교 2010
1947년 발행된 한글학회 지은 큰 사전에는 돼지는 등재되어 있으나 돼지고기는 없다.
 돼지 창자찜 : 순대찜
비계: 짐승,특히 돼지의 가죽 안쪽에 두껍게 붙은 기름 조각
살코기 : 기름끼, 심줄, 뼈를 발라 내고 살로만 된 쇠고기나 돼지고기 따위
등심: 소의 등골뼈를 발라 낸 고기 기름기가 많고 매우 연함
큰 사전에는 살코기와 비계정도로 돼지고기를 설명라고 있으면 돼지고기도 등심이 있는데 등심을 쇠고기로 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산물품목제조보고에도 돼지고기를 지금처럼 부위별로 보고하기 시작한 건 1990년도 초였다.
실제로「중앙일보」1971년 12월 9일자의 “식품과 영양”에서는 삼겹살 부위 조리법으로 구이가 아닌 “제육 삼겹살 편육”을 소개하고 있다.그리고「동아일보」 1972년 9월 12일자에서도 각종 돼지고기 조리법을 소개하면서,삼겹살로 돼지고기 ‘조림’을 하였다.또한 「매일경제」1976년 1월 28일자에서도 삼겹살을 이용한 ‘편육’을 소개하는 등 1970년대 중반까지도 삼겹살은 구이보다는 편육,조림,찜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이규진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이화여자 대학교 2010
축우로 유명하던 우리나라는 고기구이 요리가 발달했지마는 돼지고기 구이만은 발전을 못한 것 같다.지금도 ‘여름돼지고기는 잘먹어서 본전’이 상식일만큼 돼지고기요리에는 서툴다.그간 우후죽순처럼 주점가에 늘어가던 삼겹살집에도 여름이 시작되면서 사람의 발길은 눈에 띄게 뜸해졌다, 동아일보(1979.8.25.)횡설수설
 1979년에야 지금의 익숙한 모습의 삼겹살 집이 나온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는 ‘ 그들은 한바탕 축하를 하고 잔디밭에 둘러 앉았다. 그들이 준비한 것은 다진 고추에 버무린 돼지고기 삼겹살과 맥주 그리고 김치였다. 돼지고기와 맥주는 모든 
한국 광부들이 최고로 치는 음식이었다.  중략 독일사람들이 매운 양념을 한 돼지고기 굽는 냄새를 너무 싫어해 밖으로 쫓겨나온 셈이었다. 조정래 한강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서 파독광부들이 삼겹살과 맥주 파티를 하는 장면에서는 돼지고기 삼겹살을 매운 양념을 한다. 아마 한국에서 먹었던 방법 그대로 요리했을 것이다. 파독광부는 1963년부터 1980년도까지 였으니 소설에 나오는 시점은 서울에 우후죽순처럼 삼겹살집이 생기기 이전에 독일로 간 광부들의 이야기일 거다. 한편 「경향신문」1980년 11월 4일과 5일에 실린 소설 '나신의 제단'에서는 초기 삼겹살구이 집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아주머니더러 돼지 삼겹살 한 접시와 뜨끈뜨끈한 순대국물 좀 달라고 해라.김치도 새것을 가져오고 소주 한 병,알겠지?”
연탄화덕 위에다 은박지를 깐 두꺼운 쇠판을 얹어놓았고 (중략)쇠판이 어느 정도 달구어졌는지 소녀는 돼지 삼겹살을 쇠판 위에 올려놓았다.기름이 지글지글 탁탁 소리를 내며 탔다.
70년대 후반 90년대 초중반까지 유행하던 냉동 삼겹살 구이의 모습이 나신의 제단에는 나온다. 
필자가 앞에서 주장한 것처럼 1930년대 삼겹살이 형성되어 맛있는 부위로 인식되던 삼겹살을 아무 양념없이 생으로 구워 먹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후반인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테이블위에 프로판 불판을 설치할 수 있었고 냉동 육절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돼지고기 대일 수출을 통해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으로 남아 돌아서 라고 주장을 하지만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가 되지만 설명 못 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다. 프로판 가스와 냉동 육절기가 보급된 건 1960년대 부터였다. 1962년부터 시작된 돼지고기 수출은 처음에는 생돈으로 홍콩에 수출이 되었다. 다음에는 냉동 지육으로 일본에 수출되고 1970년대 초반부터 부분육으로 수출되었지만 돼지 한 마리가 거의 다 수출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거의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 못하다.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 개념으로 남기 시작한 건 1987년경부터 2000년도 구제역이전까지가 아니였을까? 
공급이 많이 되어 구워 먹기 시작했다는 말은 좀 어설픈 주장인 것 같고 돼지고기의 고질적 문제인 냄새가 나는 문제를 1970년대 와서 조금씩 해결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돼지고기를 향신료로 냄새를 잡는 요리법을 쓰지 않고 그냥 생으로 구워도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냄새가 잡힌 돼지고기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 후반 부터다.

고 이용빈 교수는 돼지는 잡식수이고 번식력이 강하며 또 고기 생산 능력이 유일한 목적인 관계로 동물성, 식물성, 광물성을 모두 이용한다. 경제적으로는 구입 사료, 자급 사료, 기초사료, 보충 사료등으로 상당히 사료의 이용범위가 넓다고 볼 수 있다. 과거부터 돼지의 사양형태를 드러보면 표와 같이 7단계로 구분이 된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7단계로 돼지 기초 사료를 중심으로 양돈을 살펴 보면 뜸물양돈 – 부산물 양돈 –곡류+부산물 양돈- 곡류+ 보충물 양돈 – 생활사적 배합사료 사료양돈 – 최소가격(컴퓨터)양돈으로 발달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도 이과정을 밝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반듯이 꼭 단계로 구별되어 발달되는 것이 아나라 서로 중복되는 경향이 많다. 이용빈 80년대를 향한 양돈 경영 월간 양계 1975
 


돼지고기에서 냄새가 나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사료에 의한 냄새가 나는 것과 거세하지 않은 수컷의 웅취가 대표적인 원인이라고 하겠는데 1970년들어 서서히 우리 양돈산업은 수입 곡물에 의한 배합 사료 이용율이 높아졌으면 거세를 하는 농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의 돈가스가 1872년(메이지5년) 경에 메이지 천황이 육식을 해금한 이후 돈가스가 출현한 것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인 1929년(쇼와4)이었다. 쇠고기전골이 스키야키로 바뀌던 무렵부터 육식에 대해 서민들이 느끼던 저항감이 차차 옅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60년에 걸친 노력 끝에 일본인의 취향에 맞는 돈가스가 탄생한다.  돈가스의 탄생 오카다 데쓰 뿌리와 이파리 2006.
일본의 국민음식인 돈가스가 지금을 모습으로 안착되기 까지 6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아마 한국의 삼겹살은 1884년 서양의 돼지가 이땅에 처음 들어 와서 아니 1908년 버크샤가 우리의 재래 돼지와 교배하기 시작한지 어언 70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우리만의 육식 문화인 삼겹살 구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1200년동안 육식을 금하고 살았던 일본인들처럼 육식에 대한 저항감은 아니었지만 우리 역시 한우쇠고기에 대한 그리움 정도는 가지고 돼지고기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은 조선우와 쌀을 강탈해 가기 위해 조선농민에게는 돼지와 닭의 사육을 장려했다. 해방이후 독재정권들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속에서 보다 값싼 고기의 공급을 위해 양돈을 장려하였다. 국민이 좋아하는 쇠고기를 공급할 방법도 시간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비료를 생산할 목적으로 사육되었던 채비동물인 돼지를 전국민이 좋아하기까지  7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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