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축산의 시작 농무 목축 시험장
2012년에 발간된 농촌진흥청 국립 축산 과학원의 축산연구 60년사를 보면 우리나라에 서구 개량종이 들어 온 것은 1903년 중요크셔종이 1905년에 버크셔종이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두수는 약 570천두 정도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강면희교수가 1975년 항문사에서 발행한 돈이라 책 14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아마도 2012년에 발간된 축산과학원의 축산연구 60년사의 내용은 고 강면희 교수의 돈이라는 책을 근거로 한 것이라 추측된다. 고 강면희교수는 그의 다른 저서 한국축산기술사에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축산업을 검색해 보면 과거의 쇄국정책에서 1876년 체결된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으로 모든 봉건적 제도가 무너지고 근대화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축산 분야가 실제로 근대화의 물결에 접하게 된 것은 이보다 늦은 1905년 이후가 된다.
가축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1902년 유우가 프랑스 사람에 의해 도입된 것을 비롯하여, 1903년 요크셔(Yorkshire) 등 돼지의 개량종이 들어오고, 1908년에는 에어셔(Ayrshire) 등의 소, 그리고 1909년 랑부예(Rambouillet) 등의 면양이 들어오는 등 각종 외국 개량종에 접하게 되고, 이들에 의한 재래종의 개량이 시도되었다.
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928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 보면 돼지속의 동물로, 고기를 이용할 목적으로 기른다.
영어로는 pig·hog·swine 등으로 쓰이고 수퇘지는 boar, 암퇘지는 sow로 표현한다. 한자어로는 저(猪)·시(豕)·돈(豚)·체·해(亥) 등으로 적고, 한국에서는 돝·도야지로도 불렀다. 돼지가 가축화된 시기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약 4800년 전, 유럽에서는 약 3500년 전이며, 한국에 개량종 돼지가 들어온 것은 1903년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돼지 [pig] (두산백과)
네이버등 모든 기록에 조선반도에 서구 개량종이 들어 온 것은 1903년 이라고 되어 있다.이는 아마도 조선농회에서 1944년 발행한 조선농업발달사 p286의 기록에 의한 것 같다.
반면 축산연구 60년사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농무목축시험장의 시설 (p67)1882년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1883년 9월부터 40여일간 미국을 순방하고 돌아온 민영익 일행은 미국의 발달된 교육제도와 농업기계 및 농법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 미국식 농장을 만들어 가축의 양종과 외국의 국물, 채소등의 재배법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들이 돌아와 청원한 결과 다음해인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농사시험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하고 보빙사의 일행으로 미국을 다녀온 최경석이 시험장의 관리관으로 임명되었다. (중략) 가축도 캘리포니아에서 말3두, 젖소 저지종 3두 조랑말 3두 돼지8마리 양 25두 등을 도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여기 분명 미국에서 1884년 돼지 8마리를 도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농무목축시험장에 대한 연구는 이방면 연구의 선학인 이광린이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설치에 대해」 ( 이광린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pp333-351 1969)를 발표함으로Tj 당시 까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농사시험연구의 기원을 밝히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농무목축시험장(1884-1906)의 기구변동과 운영 이라는 한국농업사학회 김영진 명예회장과 홍은미 경제 인문사회 연구회 기획팀장이 쓴 논문을 보면 농무목축시험장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들 역시 이광린의 기존 연구를 그대로 요약 인용하였다.
1883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40여 일간 보빙사 일행은 미국의 주요 도시를 역방하면서 각종 공장을 시찰하던 중 9월 19일과 20일 양일간 보스턴시를 방문하였는데 그때 그곳에서 개최중인 박람회에도 참가하여 그곳에 진열된 실용적인 각종 농기구를 보고 구입할 생각을 하였으며 다시, 왈콧 모범 농장(J .W.Walcott model farm)을 보고나서 한국농업의 개량을 위해서는 니러한 시험장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일행은 워싱턴에 돌아와 농무성으로부터 각종 농작물의 종자를 얻게 되었고 국무장관 후렐링휴텐 (F.T. Frelinghuysen) 에세 기술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던 바 모든 원조를 다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게 됨에 귀국한 뒤에 시험장을 설치하고 최경석 최경석(?~1886)
호를 미산이라 했고, 본명은 최도민, 구한말에 무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3년 훈련원 주부로 있다가 6월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조선 최초의 서양 방문단의 한 사람으로 미국에 갔다. 농장 등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보스톤의 박람회와 근처의 월코트 농장에서 크게 감명을 받아 미국 농기구와 농작물 등의 도입을 계약하고 귀국했다. 12월 귀국하자 이듬해부터 서울 교외에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워 근대 서양식 농사와 목축을 시작했다.
1886년 그가 갑자기 죽자 이 실험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시험장의 초대 관리로 임명 받게 되었다.
이 사업추진에 있어 미국인 훠크 (Geoge C. Foulk)와 후레이자(Evert Frazar)의 노력이 컸다. (중략)
일행은 돌아와 1883년 12월 20일 고종께 시찰결과를 보고 하고 그 결과로 1884년초에 시험장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때 고종은 광대한 토지를 하사할 뿐 아니라 풍부한 재정적 뒷받침가지 래 주게 되었다. 그 위치는 동적전이 위치하고 있는 인근의 망우리일대였던 것 같다.
이때 도입된 농기구는 모두 18개 짐짝에 벼베는 기계, 재식기, 인분뿌리는 기계, 보습과 쇠시랑, 서양저울 등으로 그 가격은 모두 751불 33센트였다. 시험장에는 서양의 각종 농장물과 채소, 과수 이외에 일부 국내 종자도 재배하였는데 1885년 최경석이 작성한 재배 목록을 보면 344종이었고 이들 종자는 305개 군현에 재배법을 첨부하여 배부하였다.
한편으로 가축은 1885년 7월 캘리포니아산 말 3두( 수1, 암 2), 젖소(Jersey) 3두(수1 ,암2) 조랑말 (Shetland)3두(수1, 암2) 돼지 8두, 양 25두 등이 도입되었다.
여기까지가 이광린의 논문 요약이며 유사한 내용을 박성래가 1994년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 최경석”, 과학과 기술 11월호 pp26-27에서 다시 밝힌 바 있다.
관리관 최경석이1886년 갑자기 병사함에 농무목축 시험장의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1886년 8월 내무부 농무사 당상관이 전관하게 되었고 명칭도 농목국으로 바뀌었다.
1887년 9월1 일자로 영국인 기술자 제프리(R. Jaffray) 내무부 농무사에 고용되었다. 그는 농업교육을 위한 농업학교 개설을 위해 노력하다가 만 10개월뒤인 1888년7월에 그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이광린 1980 ,한국개화사연구 pp333-351
농무 목축시험장의 명칭 및 소관의 변천상황을 개설 당시부터 계도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김영진, 홍은미 농무목축시험장(1884-1906)의 기구변동과 운영
1900- 1902년에 신촌에 신설한 시범목장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일인 히라야마의 체험담을 일인 고바야가와가 1944년 조선농업발달사를 쓸 때 190쪽에 인용한 것이다. 1902년경 농상공부 불란서인 기사 쇼트씨는 모범적인 사육장을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개설하고 세계적으로 우수한 젖소, 돼지, 면양, 기타 가축을 모았다. 그 설비는 당시의 관민이 경탄할 만큼 이상적이고도 완비된 모범 사육장이었으나 얼마 안되어 우역이 발생 20여두의 값비싼 젖소가 폐사한데다 돈역이 발생 돼지도 전멸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대화정 (현 서울 중구 필동)에서 우유 판매업을 하고 있엇는데 쇼트씨가 내 집에 찾아와 “어떻게 하든 한 마리라도 살리고 싶으니 적당한 방법이 없겠느냐 고 문의해 왔다. 나는 사육장에 동행하여 가 본 결과 시기가 이미 늦어 살릴 가망이 없었다. 그 뜻을 그에게 전한바 쇼트시는 대단히 ”안타까워하면서 이와 같은 훌륭한 시설을 하고 가축사육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못된 질병이 발생한 것은 참을 수 없이 원통한 일이다. 혹시 일본 정부가 누구에게 시켜 병독을 가져다가 깊은 밤에 내 목장에 던진 결과가 아닌지 모르다. 아니 던진 게 틀림 없다. 나는 일본인들의 비열한 근성을 원망한다.“
이 기록중 일인들이 병독을 전염시켰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 기록으로 보아 갑오개혁 이전에 동종목국에서 하던 축산시범사업이 1902년 이저ᅟ곤의 어느 시기에 신촌역 부근으로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범사육장의 가축 총수는 최소한 100두 이상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보통 가축단위라 하여 소1두에 돼지 5두 양 10두로 환산하는 바 소 10두분의 돼지만 하더라도 50두가 되며 양은 100두가 되기 때문에 비록 우역과 돈역으로 젖소와 돼지가 모두 페사하였어도 이 사육장은 1906년까지 돈속하여 면양 사육만은 계속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문허 기록들로 보아 비록 1884년 도입된 돼지가 1902년 돈역으로 폐사하였지만 역사의 기록에 분명 조선반도의 서구 개량종 돼지가 도입된 건 1885년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서구 개량종이 들어 온 것은 1903년 중요크셔종이 1905년에 버크셔종이 처음 도입되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두수는 약 570천두 정도였다.다시 이 문장을 조선농업발달사를 쓴 일본인 고바야가와의 입장에서 읽어 보면 일본에 의해서 1902년 돈역으로 폐사한 돼지가 아닌 개량종 돼지가 조선에 보급된 것이다. 이건 식민사관에 의한 우리의 역사 기록이다. 대한제국이 자주적으로 개량종 소와 돼지를 도입 연구하고 사육하였던 기록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반도에 개량종 돼지등 가축이 도입되었다는 식민사관으로 쓰여진 것이다.불행하게도 과거 농업사를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과 정부 기관에서까지 이런 식민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외면 하고 있는거다.물론 돈역으로 폐사했으니 다시 도입된 해를 기점으로 했다고 해석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난 농무목축시험장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더욱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여담이지만 농대가 없는 연세대학교에서 연세 우유가 왜? 있을까? 아마도 1902년 신촌역 근처 사육장은 지금의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 대학교 캠퍼스에 사육장이 위치한 것이 아니였을까? 다른 논문에 의하면 목축장은 자양동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 문헌
김영진, 홍은미 농무목축시험장(1884-1906)의 기구변동과 운영
이광린 1969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설치에 대해」 ( 이광린 ,『김재원박사회갑기념논총(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pp333-351
이광린 1980 한국개화사 연구 PP220-233
김영진, 홍은미 개화기의 농학사상
이한기 개화기 및 일제시기의 농사시험연구와 지도
김영진, 김이교 개화기 한국의 구미 농업과학기술도입에 관한 종합 연구
염정섭 1880년대 고종의 권농책과 서양농법 도입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