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이 말한 삼겹살 삼겹살이 슬픈 역사의 산물이었을까?
삼겹살이 과연 수출 잔여물이었을까? 아르헨티나 전통 쇠고기 바비큐요리인 아사도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산 쇠고기의 정육은 다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고 남은 갈비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걸 쓰레기 갈비라고 했다고 한다. 노동에 지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훌륭한 요리가 버려진 쓰레기 갈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을 수출하고 남은 슬픈 고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1(중략) 축우로 유명하던 우리나라는 고기구이요리가 발달했지마는 돼지고기 구이만은 발전을 못한 것 같다. 지금도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서 본전이 상식일 만큼 돼지고기 요리에는 서툴다,. 그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주점가에 늘어가던 삼겹살 집에도 여름이 시작되면서 사람의 발길은 눈에 띄게 뜸해졌다. 더위가 오면서 돼지고기 수요는 가정에서도 줄어들어 산지에서는 생돼지 600그램에 2백원으로 값이 폭락했다는 소식이다.지난해 우리나라 육류 섭취는 년간 1인당 쇠고기 2.73kg에 돼지고기 5.1kg이었다고 추산이다. (중략) 일본은 돼지 보유 800만두로는 부족해서 해마다 10%정도 수입하고 있는데 우리는 돼지고기 파동후 양돈에 힘쓴 결과 3백만두선에 달했다. 이것이 남아돌아 주체가 힘들게 되었으니 획기적인 대책이 있어야겠다. 작년초에는 돼지고기 부족파동이 있었고 지금은 남아서 걱정이니 쇠고기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이것은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1979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기사.
1979년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해서 난리가 나고 돼지고기를 더 먹으라고 동아일보 횡설수설에서 독려를 하는 내용의 기사다. 1979년이 우리 한돈 산업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시기라는 걸 이 기사가 알려 주고 있다. 우선 삼겹살 식당이 이미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 났다는 것, 1979년에도 돼지고기는 여름철 기피 식품이었다는 것, 돈가가 급락급등하는 돼지파동이 자주 있었는데 1979년 여름은 돈가가 폭락했다는 걸 알 수 있다.이 기사를 근거로 우리가 미치고 환장하는 삼겹살을 즐겨 먹은 시기가 1970년대 후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통설이다.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라는 2010년 이화여자대학교 이규진의 논문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언제부터 삼겹살 구이를 먹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난무한다.「세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일제시대 탄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목에 걸린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먹기 시작한 게 최초’(2001아울렛 축산담당 김성호 주임),‘보릿고개를 막 넘긴 1970년대 중반부터 삼겹살을 구워먹기 시작했다’(연세대 앞 먹자 숯불갈비 최복순 사장),‘80년대 말부터 삼겹살을 구워먹는 문화가 생겼다’(대한양돈협회 홍보부 조진현 과장)등 설에 따라 40년 이상 차이가 난다.432)「세계일보」(2005.6.3)30면 “삼겹살,진실 혹은 거짓” 이규진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이화여자 대학교 2002.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설보다는 1970년대 중반이라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배경에 대해서 2017년 6월 30일 오후 방송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5회에서는 경주의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경주에서 아침으로 베이컨을 먹던 중 김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삼겹살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키워야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것은 배변물 처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키우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안심, 등심을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삼겹살, 내장, 발, 껍데기 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뉴스 2017.6.30.
이런 황교익의 주장이 사실일까?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농우확보를 위해 양돈업을 적극 장려하였다. 우리나라 농업에 있어 그 원동력이 될 농우가 해방후 엄청난 밀살로 인하여 그 수효가 격감의 일로를 걸어 이대로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농업 생산에 주는 영향이란 극히 막심 할뿐더러 언제 농우가 고갈 될런지도 모를 위경에 처하고 있는데 이러한 농촌의 비명을 묵과할 우없다하여 농우의 확보책이 광범하게 논의되고 있어 그 방법으로써는 양돈업을 널리 장려시켜 식육용으로 또 소고기대신에 도야지고기를 대용하자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경향신문 1948.3.5 워낙 소고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 해방이후 혼란기에 일하는 농우인 소를 마구 잡아 먹어 일할 소가 부족해졌다. 여기에 전쟁과 분단으로 남한내의 소의 사육두수가 1954년 688천두였다. 당시 농사를 짓기 위한 농우가 약 30만두 필요했다. 식용으로 도축되는 소 두수는 년간 약 20만두에서 30만두였다. 따라서 계속 소고기를 즐겨 먹으면 농사에 투입될 농우가 부족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돼지와 닭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해방이전 1941년 조선반도에서 키우던 소는 1,753,556두 였다. 돼지 역시 일제 강점기에 100만두이상 사육되고 있었다. 통계상으로는 1935년도에 1,616,408두로 가장 많이 키웠다. 해방되던 1945년도에는 195,291두, 1950년에는 156,400두를 키웠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이라는 거대한 금자탑이 완성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국토분단의 비극과 6.25의 참화를 입고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왔다. 그러나 부존자원 결핍에도 60년대 초를 기점으로 하여 민족적 각성과 자립의지를 일깨우고 온 국민이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총화 단결하여 땀 흘려 일한 결과 64년에 1억 불의 실적을 기록한 지 13년 그리고 70년에 10억 불의 실적을 올린 지 겨우 7년 만에 100억 불의 수출목표를 달성하여 아세아에서는 일본 다음가는 수출대국이 되었다.신발, 가발에서 선박, 전자시계에 이르는 각종 상품을 수출하여 세계도처에서 우리 상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가 만든 선박과 승용차가 오대양을 누비고 북미와 구주의 광활한 평원에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 만큼 중화학공업 건설로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획기적인 수출증대를 가져와 근대산업 국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땀 흘려 일해서 국력배양에 총매진 해야겠다.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5.16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만이 군사정부의 명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전 산업을 수출 주도형 계획 경제 체계로 만들어 간다.
여기에 양돈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62년 홍콩으로 생돈을 수출 하는 것을 시작으로 돼지와 돼지고기 수출을 하게 되는데 다른 농산물과는 성격이 좀 다른 면을 보인다. 1962년에는 전체 수출액 5,400만 달러에서 농산물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3%로 높아졌다. 여기에 수산물을 합치면 농수산물 수출 비중은 66%에 달했다. 이로써 60년대 들어 농산물이 광산물을 제치고 최대 수출 품목이 되었다. 주요 농산물 수출품목 순위는 생사, 쌀, 인삼, 담배잎, 한약재 순이었다. 그 뒤 양잠농가는 계속 불어나 1974년 약 50만 가구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양잠산물이 3억 달러이상 수출되어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조선pub 홍익희 세종대 교수생사, 인삼, 담배잎, 한약재등은 주요 먹거리가 아니어서 수출을 우선에 둘 수 있었지만 쌀과 돼지고기는 국내 물가 안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돼지고기 생산량이 많아서 가격이 하락하면 수출을 하고 생산량이 적어서 국내 가격이 높아지만 수출을 중단하고 국내 공급을 우선시 하였다. 이는 다른 농산물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라고 하겠다. 즉 돼지고기는 일본이라는 수출 시장이 있고 수출 경쟁력이 있는 주요 수출 품목이긴 했지만 국내의 육류 공급이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생사나 전복, 인삼등 당시에 수출이 되는 농수산물들은 수출이 되어 국내 가격이 높게 형성되어 일부 부유층만이 소비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돼지고기는 국내의 수급 조절과 가격 안정이 수출 보다 우선시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대규모 양돈 단지의 조성이 꼭 수출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라는 좋은 수출 시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가격의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던 돼지고기 수급 상황에서 기업형 양돈에 투자할 때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국내 가격이 하락하면 수출을 하면 되었으니 양돈업이 수익성이 높은 산업으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
1962년도에는 돼지고기는 39톤, 생돈으로는 40,535두가 수출되었다.1963년도에는 돼지고기는 398.1톤, 생돈으로는 114,643두가 수출되었다. 1960년대는 생돈 수출이 주라고 봐도 무관하다.1970년대 들어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일 돈육 수출은 1972년 3,802톤에 5,789천불의 수출실적을 기록한다.1973년 3,118천불 1974년 8,858천불1975년 22,031천불 1976년 14,145천불1977년 15,399천불1978년은 국내 돈가 상승으로 수출이 중단되고1979년 1,126천불 수출을 하였다.
1980년대는 롯데햄, 백설햄등 국내에서도 축육 소시지 시장이 형성되고 돈육 소비가 늘어 1985년까지 수출이 거의 없다가 1986년부터 비선호 부위인 등심, 안심에 대한 수출이 다시 시작된다. 1972년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월별 돈육 수출 실적을 살펴 보면 아마도 일본과 한국의 돈육 시장은 상호 보완적 관계가 커 보인다. 1972년말부터 국내 보유두수가 절대량의 부족으로 인해 돈육가의 급격하게 상승하자. 1973년 2월부터 정부가 국내 수요 충당과 국내 돈가 안정을 위하여 수출을 중단시켰다. (중략) 1973년 일본 수출가격은 부분육(cut emat)톤당 $1,650 –1750 (C&F) 로서 가공비등 비용을 고려 생체 근당가격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155원-165원이 손익 분기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당시 국내 돈가는 생체근당 200원이상이 형성되어 적자 수출이었다. 국내 생산 원가가 높고 일본의 수입 가격이 그렇게 높지 않아 한국 일본양 시장의 가격 형성을 잘 고려 하여 수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따라서 국내 돼지고기가 수요가 감소하여 가격이 낮아지는 여름철에 일본의 수출 실적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일본은 왜? 돼지고기를 수입하게 되었을까? 일본은 전후 눈부신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 소득의 향상으로 육류의 수요가 대폭 신장되었으면 주로 돼지고기, 닭고기를 중심으로 신장되었다. 이중 돼지고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였다. 1971년 일본 전체 육류 수급량의 42%가 돈육이었다. 1970년대 초반 일본내의 돈육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되고 있었으나 생산은 조금씩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앞에서 황교익이 지적했던 것처럼 축산폐수에 의한 공해 문제도 있었지만 더욱 심각한건 농촌의 인력난이었다. 취업기회가 많아져서 3D업종인 양돈업에 취업하는 젊은이들이 극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돈육 수입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입하였는데 이들 나라는 인건비 관계로 부분육으로 수입할 수 없고 지육상태로 수입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 일본의 인건비도 상당히 높아져서 일본내에서 지육을 정육을 처리가공하기가 곤란해졌다. 그래서 단가면어서도 인건비가 싼 후진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1960년대말부터 대만에서 수입을 늘렸다. 일본의 경우 지금도 호주에 우육시장에 직접 투자하여 생우를 생산 가공하여 쇠고기를 일본으로 수입한다. 이런 것처럼 대만에 자신들의 돈육 공급기지화를 위한 투자를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직접적인 투자가 없었다. 왜? 일본은 지리적으로 더 여건이 좋은 한국을 자신들의 돈육 거점화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한국의 산업화 속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다.이렇게 투자된 대만의 대일 양돈산업은 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다. 1997년대만의 구제역으로 급격히 철수하였다.1967년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 설립하고 1968년 332백만원을 투자하여 인천시 만수동에 양돈주산단지 조성했다. 양돈가공센타는 대지가 1만5천평에 건평 1,950평 년간 비육돈 1만두 출하에 총 1억 5천 8백만원의 매출을 목표로 했다. 비육돈사 8동(1650평) 모돈 732두 사육를 초기에 사육했다. 1차로 비육돈을 년간 만두 생산할 계획이며 2차로 뉴질란드와의 합작으로 시설자금 2억 1천만원을 투입 햄, 소시지, 베이컨등을 연간 약 6천톤 제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매일경제 1968.11.28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형 양돈장은 지금의 에버랜드 용인 자연농원 양돈장이었다.처음에는 경제조림단지를 비롯해 밤·호두단지, 묘포장, 축산단지, 가족단지 등으로 구성됐다. 용인자원농원에서 수확된 살구 밤 등은 생과와 가공품으로 시판했고, 일부 수출실적도 있다. 특히 삼성은 이곳에서 1973년부터 양돈사업을 벌여 30만평 부지의 5개 양돈장에서 6만두까지 돼지를 사육하는 당시 최대 양돈장으로 키웠다. 삼성의 양돈 사업은 계열사이던 제일제당으로 이어지다가 양돈업계의 대기업 진출 반대와 환경오염, 질병 문제 등으로 1989년 정리됐다.용인자연농원 양돈장은 살림개발을 위한 비료 퇴비 생산을 염두에 두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진행했다. “가만, 그럼 땅이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에는 거름이 필요할 텐데…. 거기에 양돈 단지(돼지를 기르는 곳)를 만들면 되겠군요.” 양돈은 퇴비를 공급하는 동시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곧 개량종 씨돼지 600마리를 수입하기 위해 비행기 3대를 동원했다. “비싼 소를 키워야지, 왜 하필 돼지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돼지가 소와 같은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이면서도 소보다 사육과 번식이 쉽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수출로 외화 획득도 가능했다. 자연농원은 한 단지에서 돼지 5만 마리를 기르는 국내 최초의 기업적 양돈을 시도했다. 여섯 종의 돼지 종자를 토대로 품종을 개량해서 기존보다 번식률을 20%나 높였고, 사육 기간을 5개월이나 단축했다. 덕분에 소비되는 사료를 3분의 1로 절감했다. 돼지는 훌륭한 수출 상품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이병철은 무척 기뻤다. NEWSIS 이병철이야기6 사카린 밀수사건 그리고 자연농원기업 양돈장을 조성하는데 있어 수출이 가능하다는 건 투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 아니었다. 대일수출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 5,000두이상 돼지를 키우는 양돈장이 한 곳도 없었다.1979년도에 500두 이상 키우는 농가가 147호였고 이들이 총 331,00두를 키웠으니 호당 평준 2,251두를 사육했다. 과연 농가의 사육두수가 증대된 것이 꼭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역시 급격한 산업화로 육류의 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도 양돈 산업 규모의 확대가 필요했다. 사육두수 5000두 규모를 기업농의 시작이라고 볼 때 1998년 전체 양돈농가 27,002호의 0.3%인 89개 농가가 5000두이상을 키웠다.규모는 점점 늘어 수출이 중단되던 무렵인 2010년 전체 사육농가 7,347호중 5000두이상 사육농가는 305호로 4.2% 2016년 전체 사육농가 4,406호중 5000두 이상의 농가는 438농가로 9.9%다. 이는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한돈은 지속적으로 두수가 늘어나고 농가수는 감소하여 점점 호당 사육두수는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대만과는 전혀 다른 일본에 돼지고기는 수출을 했지만 한돈산업 자체가 일본에 의해서 종속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생산적 협조 관계라고 해야 할까? 복합 유기 생산체인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중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국민이 선호하는 부위가 서로 달라서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등심과 안심의 수요가 많아 자국 생산분부터 보다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우리가 좋아하는 삼겹, 갈비 부위를 등심, 안심을 국내 유통시보다 비싸게 수출해서 이익을 본 만큼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는 상호 보완 이익 관계 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등심 안심이 일본에 수출이 안되고 국내에 유통 되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심, 안심을 일본 사람들처럼 좋아 했을까? 36년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돈가스가 아닌 걸 보면 등심, 안심이 귀해서 안 먹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과 갈비를 더 좋아해서 안 먹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참 수출이 되던 시절에도 등심, 안심이 삼겹살 보다 비쌌던 시절은 없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브랜드 삼겹살이 나오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돼지고기 부위별 개념은 거의 없이 그냥 살코기와 비계, 내장과 족발 정도의 구분과 아니면 찌개(국)거리와 구이용 이런 요리 방식에 의한 구분만 존재하던 시대를 살았다.1950년대 한글 사전을 살펴보면 소고기는 등심, 안심, 채끝 제비추리까지 단어가 수록되어 있지만 돼지고기는 살코기, 비계, 족발, 순대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위별로 세밀한 소비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과 같은 삼겹살구이 식당이 1970년대 후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건 황교익의 주장처럼 수출잔여육설보다는 그 당시 기업 양돈의 확대 냄새가 나지 않는 돼지고기가 생산 되어 삼겹살을 로스구이 형식인 지금의 소금만으로 구워 먹을 수 있어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민족의 돼지고기 요리 역사에 소금구이가 없었던 건 돼지고기를 잔반사육하고 거세하지 않으면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마늘, 생강등으로 돼지고기 냄새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이전에도 삼겹살을 먹었지만 다 양념한 두루치기 형식의 요리가 많았던 건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한우 쇠고기 중심의 로스구이가 돼지 삼겹살 로스구이로 육종이 변화하게 된 건 아마도 한우고기 가격의 인상도 큰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