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시대의 돼지/ 고대시대의 돼지
고려 이전의 돼지고기
원시시대의 돼지
가축사육은 농사와 함께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고 생산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큰 전진의 하나이며 오랜 기간 사냥을 하는 과정에 축적된 경험에 기초하여 시작된 새로운 생산부문이었다.사람들이 짐승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사냥을 하여 얻고 있던 고기나 털가죽을 보다 쉽게 생산하려는 데 있었다.사람이 일찍부터 기른 짐승은 개와 돼지였다.돼지는 원시농업을 하던 사람들이 흔히 기른 짐승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곳에서 신석기시대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돼지를 기른 사실들이 밝혀졌다. 반면에 가축사육을 주되는 생업으로 삼고 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돼지를 기르지 않고 양이나 염소를 비롯한 그 밖의 짐승들을 기르고 있었다.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의 옛 유형 사람들이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경부터였다고 추정된다. 그것은 집돼지뼈가 신석기시대 전기의 유적들에서 발굴된 일이 없고 신석기시대 중기와 그 이후 시기 유적들에서 발굴되기 때문이다.집돼지가 발굴된 유적으로서는 서포항유적 4기층과 범의구석유적 1문화층, 곽가촌유적 1기층 및 2기층을 들 수 있다.돼지가 고기생산의 첫 가축으로 된 것은 돼지가 다음과 같은 생물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소나 말과는 달리 몸질이 중형이므로 산 채로 잡기가 헐하며 우리를 만들기가 쉽다. 그리고 성장발육속도가 빨라 10∼12달 기르면 잡아먹을 수 있고 한 배에 낳는 새끼수가 많으므로 쉽게 증식시켜 나갈 수 있다는 등 다른 짐승에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신석기시대에 가축을 작은 규모에서 부업적 형태로 길러왔다. 이 시기는 고기에 대한 수요를 아직도 야생짐승을 사냥하여 충족시켰다.
고대의 돼지
사냥한 짐승은 곧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가축은 필요에 따라 아무때나 소비할 수 있었으므로 저장된 식품과 같았으며 또 시일이 지남에 따라 늘어나는 식품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우월성으로 하여 가축사육은 빨리 보급되어 갔다. 특히 짐승먹이가 많은 북쪽의 초원지대에서는 일찍부터 가축사육이 발전하여 목축업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그런 곳에서 가축이 주요 식료자원이었다. 예를 들면 눈강 및 송화강 중하류 일대의 평원에서 생활한 부여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축사육은 중요한 생산부문의 하나였으며 그것은 마침내 목축업으로 발전되어 갔다.
서기 1세기 중국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는 부여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옛날 북방에 탁리국(槖離國)에서 왕의 시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아이를 죽이려고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탁리국의 돼지가 살려준 아이가 곧 부여(夫餘)를 건국한 동명(東明)이다. 부여의 건국신화와 유사한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부여국의 돼지가 등장한다. 부여는 돼지와 깊은 인연을 가진 나라였다.
부여는 말, 소, 개, 돼지 등의 이름을 따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저가(豬加)의 관명(官名)을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돼지 이름을 딴 저가(豬加)가 있었다.부여는 소, 양, 개, 말과 함께 돼지를 키웠고, 가축을 잘 기르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부여 관련 기록에 돼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부여 지역이 돼지를 키우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본래 숲지대나 그늘진 강둑에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나무열매, 과일, 식물뿌리 등을 먹으며 살 수가 있었다. 부여가 위치한 만주 지역은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많은 목재를 생산하는 드넓은 나무바다(樹海)가 펼쳐진 곳이다. 부여는 숲이 많았기에 돼지를 잘 키울 수 있었다.
644년에 편찬된 진(晉- 265~419)나라 역사를 기록한 [진서(晉書)]의 <숙신씨(肅愼氏)> 기록에는 “이 나라에는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고 하였다.이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말갈(靺鞨)> 기록에 “그 나라에는 가축으로 돼지가 많아 부유한 집은 수백 마리가 되며, 그 고기는 먹고 가죽으로는 옷을 지어 입는다.”는 내용과 거의 같다.
우리 선조들의 목축업은 가축먹이를 따라 가축떼를 끌고다니는 유목은 아니었다. 한 고장에 정착하면서 농업을 기본으로 하고 목축업도 중시한 정착적인 반농 반목축업을 한 주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기온이 따뜻하고 농업이 보다 적합한 평야와 언덕, 계곡과 분지가 전개되어 있는 길림, 장춘 지방의 송화강 중류와 요하 중하류 이남 지역들에서는 목축업을 발전시키는 것보다 농사를 짓는 것이 보다 유리하였다. 이 지역들에서의 가축사육에서는 돼지가 위주였다는 것은 유적들에서 나온 가축뼈의 압도적 다수가 돼지뼈였다는 사실에 의하여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유적에서 나온 돼지뼈를 보면 돼지 대가리의 주둥이가 짧아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것은 그 당시에 우리 나라에서 이미 돼지에 대한 종축 작업이 겉모양평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주둥이가 가늘고 길면 거친 사양관리조건에 적합하며 고기생산성이 떨어지므로 종축으로 고르지 않고 있다. 주둥이가 짧으면 성질이 온순하고 먹성이 좋으며 따라서 고기생산성이 높아서 종자돼지로 고르고 있다. 이상 내용은 청동기시대 말경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겉모양에 의한 돼지고르기를 실시하여 보다 생산성이 높은 돼지로 개량하는 공정들이 실시되었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돼지의 고르기, 이것은 그 당시 방목관리를 위주로 하고 유목민식 돼지관리가 아니라 돼지를 우리에 넣어서 집 주변에서 관리하는 형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