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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이전의 돼지고기

삼국시대와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의 돼지

삼국시대와 발해 및 통일신라시대의 돼지

고구려에서는 돼지를 관청에서 길렀고 개인들도 길렀다. 당시 봉건국가에서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는데 거기에 장생이라는 관리를 두었다.『삼국사기』 13권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1년 3월조에는 "교제(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쳤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령하여 이를 쫓아가게 하였다.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국내(성) 사람의 집에 가두어 두고 기르게 하였다"고 씌어 있다.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하는 돼지인 교시(郊豕)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 19년(기원전 1) 8월에 교시가 달아나므로 왕이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라는 자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더니 장옥택(長屋澤) 중에 이르러서 돼지를 찾아 다리 근육을 끊었는데 이 사실을 왕이 듣고 ‘제천(祭天)할 희생을 어찌 상하게 한 것이냐.’ 하며 두 사람을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희생물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따로 있었으며, 희생용 돼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2년 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이를 뒤쫓던 관리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이 지역이 수도로 삼기 좋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서기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게 된것이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근심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208년 교시가 달아나자 관리들이 쫓아가다가 주통촌(酒桶村)이란 곳에서 후녀(后女)라는 처녀의 도움으로 돼지를 붙잡게 되었다.관리들이 후녀에 대해 임금께 이야기하였고, 마침내 임금이 후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에 아들의 이름을 ‘교체(郊彘- 성밖의 돼지)’라 하였는데, 그가 곧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 된다.

수도를 새로 정해주고, 동천왕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고구려에서 돼지는 신성한 동물이라고 여길만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고기음식인 맥적(貊炙)은 멧돼지 또는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중국의 책 '수신기(搜神記)'에 "맥반(貊盤)이라는 식탁과 맥적(貊炙)이라는 고기구이 음식이 귀족 집안과 부잣집에서 즐겨 잔치에 나오는 그릇과 음식"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서 맥적은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불고기 음식이다.(멧)돼지를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 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굽는다. 이 요리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던 음식이다. 간이 깊게 배어 있고 구워낸 맛이 고소해서 이웃 중국에도 전해졌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노루, 소, 개 따위의 고기도 좋아했지만 돼지고기를 더욱 즐겨 먹었다.

중국 책 '수신기'에는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만큼 맥적은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음식이며 이웃 나라에도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에 맥은 고구려를 가리킨다고 맥은 그들로 봐서는 동이족이다. 그리고 적에 대하여 예기에서 설명하기를 ‘꼬챙이에 꽂아서 불위에 굽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의례에서 모든 적은 무장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미 조미해 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고기 요리는 전통적으로 미리 조미하지 않고 굽거나 삶아서 조미료레 묻혀 먹는데 비하여 적은 미리 조미하여 굽기 때문에 일부러 조미료에 묻혀 먹을 필요가 없으니 무장(無醬)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맥적이란 미리 조미하여 직접 구운 맥족의 고기 요리를 가리킨다.

맥적이란 고기에다 부추나 마늘을 풍성히 넣고 미리 조미하여 구워 먹는 것이니 미리 조미한다는 점에서 불고기의 원조라 봤으면 한다. 

고구려인이 육식을 즐겨했다는 것은 다음의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10대 산상왕(山上王)은 그의 형수였던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부인인 우씨 왕후의 방문을 받는다.산상왕은 왕후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하자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 손가락을 싸매준다.당(唐)나라 때의 역사가 장초금(張楚金)이 660년경에 편찬한 사류부(事類賦)인 한원(翰苑)에는 고구려인이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며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五子刀)를 패용한다"고 했다.안악3호 고분의 벽화에는 부엌 옆에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둔 육고(肉庫) 그림이 있는데, 꼬챙이에 걸린 사슴과 돼지고기를 볼 수 있다. 안악3호무덤의 벽화에 푸줏간과 거기에 걸려 있는 돼지고기는 개인들이 기른 돼지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45년 고구려가 당나라와 전쟁을 할 때, 안시성 안에서 닭과 돼지의 소리가 많이 들렸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고구려에서도 부여나 말갈에는 못 미친다 할지라도 상당한 숫자의 돼지를 사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 수도의 남쪽 교외에서 봄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고 북쪽교외에는 하지 제사에 쓸 돼지를 기르는 관청이 있었다. 이 관영돼지목장에서의 돼지사육 규모와 사양관리기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국가적으로 진행하는 제사에 쓸 것이었으므로 한 두 마리를 기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일정한 목장형태를 띠었을 것이며 사양관리도 일정한 수준에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후세에 봉건국가가 운영한 돼지목장의 원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개인들도 돼지를 길렀다는 것은 앞의 자료에서 위나암에 있는 어떤 집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이미부터 돼지를 기르던 우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개인집에서의 돼지기르기는 주인의 능력에 맞게 여러 가지 사료를 마련하여 길렀을 것이다.돼지를 백제와 신라, 발해에서도 많이 길렀다. 

일본 정창원(正倉院- 나라현 도다이사에 위치한 왕실 유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81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촌락문서 (新羅村落文書)에는 지금의 청주(淸州) 주변 4개 촌락의 인구, 토지, 나무와 함께 가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4개 촌락에 말 61마리, 소 53마리와 그 증감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돼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농민들과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소와 말에 비해 돼지 키우기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488년 신라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이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신라> 조에 ‘재상의 집에는 소, 말, 돼지가 많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도 귀족들의 육식 욕구를 충당시켜줄 돼지를 키웠음에 분명하다.    

백제는 [수서(隋書)] <백제> 조에 ‘백제에 소, 돼지, 닭이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할 뿐이어서, 돼지와 관련된 상황을 더 알 수가 없다.    

 발해에서도 막힐부의 돼지가 유명하였다. 발해는 겨울은 춥고,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나 짧으며, 봄·가을은 메마르고 건조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영토는 동쪽으로는 연해주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에 이르며,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니 아무래도 겨울이 길었다. 한겨울에는 오전 9시가 되어야 날이 밝고 오후 4시면 어두워졌으며, 기온도 매우 낮아 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갔다. 삼림은 무성하여 침엽수와 활엽수의 혼합림이 울창했다.그러므로 추위가 오래도록 길었다. 발해인이 즐겨 먹는 음식중 첫 번째는 돼지고기다. 대부분의 발해인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추위를 이겨내려면 지방섭취가 많아야 하고 그래서 돼지고기를 선호하게 된 것 같다.     

 통일신라에서도 관영으로 제사에 쓸 돼지를 길렀다.    

711년 신라의 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은 도살(屠殺)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의 도살은 가축을 함부로 죽여 육식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불교가 도입된 이후, 함부로 살생을 금지하는 법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육식 소비가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원광법사는 세속오계의 구범을 제시하였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신라 고유의 정신적 바탕에 불교와 유교 정신이 잘 융합 정리된 것으로 일반 국민들의 도의 표상이 되었고 화랑의 규범 정신이 되었다.

인도 일본은 불교의 나라가 됨에 따라 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살생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신라의 원광 법사는 불교의 가르침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고 있다. 신라의 땅에 살고 수초를 먹는 자기로서는 불교에 샆서는 것이 조국이라 하면서 살생 유택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생유택을 설명하였다. 육제일 즉 매월 8,14,15,23,29,30일의 6일과 춘하일 즉 동물 번식기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꼭 필요할 때만 죽이되 수많이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에겐 육식 엄금은 아니었던 것이다. 식물성 식품과 동물성 식품을 균형있게 섭취함으로써 건강한 신체로 삼국통일이란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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