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멧돼지와 인간: 수렵 대상에서 생활 동물로의 전이
제1부 기원의 돼지 ― 가축화와 공진화
제1장 멧돼지와 인간: 수렵 대상에서 생활 동물로의 전이
1. 숲의 지배자, 공포와 경외의 대상
인류의 조상이 직립 보행을 시작하고 도구를 손에 쥐었을 때,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마주친 존재 중 하나는 거대한 송곳니를 치켜든 멧돼지(Sus scrofa)였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멧돼지는 단순한 식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압도적인 파괴력과 가공할 속도, 그리고 상처를 입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맹렬함을 지닌 ‘숲의 지배자’였다. 당시 인류에게 멧돼지를 사냥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단백질 확보인 동시에, 자연의 거대한 힘에 맞서는 숭고한 투쟁이자 전사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였다.
멧돼지는 영리했다. 그들은 후각이 예민했고, 무리 지어 이동하며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했다. 인간에게 멧돼지는 곰보다 영리하고 호랑이보다 끈질긴 적수였다. 그러나 이 치열한 대결 구도는 약 1만 2천 년 전,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온화해지며 인류가 정주 생활을 시작함에 따라 기묘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2. 쓰레기 더미에서 시작된 기묘한 동거
멧돼지가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이른바 '폐기물 공생설'이다. 농경을 시작한 인류의 정착지 주변에는 필연적으로 음식물 찌꺼기와 곡물 부산물이 쌓인 쓰레기 더미가 생겨났다. 야생의 멧돼지 중 유독 경계심이 낮고 적응력이 뛰어난 개체들이 이 풍요로운 '공짜 식탁'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정착지 주변을 맴돌며 인간이 버린 찌꺼기를 훔쳐 먹던 야생의 무리가 점차 인간의 체취와 소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인간 역시 자신들의 주변을 맴도는 이 짐승들이 뱀을 잡아먹거나 해로운 해충을 제거하며, 때로는 맹수의 접근을 미리 알려주는 경보 장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카로운 대립의 선이 무너지고, 서로의 존재를 묵인하는 느슨한 공생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렵의 대상이었던 멧돼지가 인류의 생활권으로 진입한 결정적 순간이다.
3. '길들임'이라는 유전적 도약
인간은 점차 이 동물을 가두어 기르기 시작했다. 야생의 멧돼지 중 순한 개체들을 선별하여 울타리 안에 가두고 번식시키는 과정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축화 신드롬(Domestication Syndrome)'이라 불리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그들의 거친 성정이었다. 공격성을 담당하는 부신 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뇌의 구조도 변화했다. 뾰족하던 송곳니는 퇴화하여 짧아졌고, 빳빳하던 털은 부드러워졌으며, 곧게 뻗어 있던 꼬리는 말려 올라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번식력이었다. 야생에서는 일 년에 한 번뿐이던 번식 주기가 인간의 관리 하에서 비약적으로 짧아졌고, 한 번에 낳는 새끼의 수 역시 늘어났다.
이러한 유전적 변화는 인간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 돼지는 사냥을 나가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걸어 다니는 단백질 저장고'가 되었다. 인간은 돼지에게 남은 음식을 주었고, 돼지는 인간에게 고기와 지방, 그리고 가죽을 내어주었다. 이는 인류 문명이 영양학적 안정을 기반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보이지 않는 동력이었다.
4. 돼지, 인간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다
고대 동아시아의 가옥 구조를 보여주는 한자 '집 가(家)' 자를 보면 지붕(宀) 아래 돼지(豕)가 살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다. 이는 돼지가 단순히 집 밖의 가축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 공간 바로 아래에서 공존하던 핵심적인 가족 구성원이었음을 증명한다. 제주의 '돗통시' 문화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배설물을 돼지가 처리하고 그 분뇨를 다시 거름으로 써서 밭을 일구는 농업적 순환 구조는 돼지가 인류 문명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멧돼지의 야생성을 억누르고 그들의 생명력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둔 이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생물학적 계약 중 하나였다. 인간은 돼지를 통해 식량 위기를 극복했고, 돼지는 인간을 통해 종의 번성이라는 진화적 승리를 거머쥐었다.
5. 문명의 요람에서 시작된 독립적 가축화
멧돼지의 가축화는 인류 역사상 어느 한 지점에서 발생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간 단일 사건이 아니었다. 유전자 분석 결과에 따르면, 돼지는 약 1만 년 전 서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Mesopotamia)와 동아시아의 황하 및 양쯔강 유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가축화되었다.
서아시아에서는 정주 마을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가축화가 가속화되었고, 중국에서는 쌀 농사의 발전과 함께 돼지가 비료 공급원으로서의 가치가 강조되며 사육되기 시작했다. 이는 인류가 농경이라는 새로운 생존 전략을 선택했을 때, 지구 곳곳에서 돼지라는 존재가 필연적인 동반자로 낙점되었음을 시사한다. 서로 다른 대륙에서 각기 다른 목적으로 시작된 동거였으나, 그 결과는 동일했다. 돼지는 인류의 정착지에 안정적인 단백질을 공급하며 고대 문명의 인구 부양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6. 돼지가 선택된 이유: 지능과 사회성이라는 열쇠
인간이 사슴이나 가젤이 아닌 멧돼지를 가축으로 선택한 데에는 그들의 뛰어난 지능과 사회적 위계 구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야생 멧돼지는 무리 내에서 명확한 서열을 지키며, 우두머리의 통제에 따르는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이들의 '서열 본능'을 이용하여 인간을 무리의 우두머리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대량 사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돼지는 개에 필적할 만큼 지능이 높다. 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인간의 신호나 규칙을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지능은 가두어 기르는 환경에서도 돼지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관리 체계 안으로 순응하도록 도왔다. 잡식성이라는 특성 또한 결정적이었다. 초식 가축처럼 넓은 목초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인간이 먹다 남은 찌꺼기만으로도 근육과 지방을 찌울 수 있는 돼지의 효율성은 인류에게 '가장 경제적인 단백질 공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7. 가축화 신드롬: 야생의 흔적을 지우는 진화
인간의 울타리 안에서 세대를 거듭하며 돼지의 신체에는 '가축화 신드롬(Domestication Syndrome)'이라 불리는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성격이 순해지는 것을 넘어 유전적, 해부학적 변형을 동반했다.
[Image comparing wild boar skull with domesticated pig skull showing shorter snout and smaller brain case]
뇌 용량의 감소: 천적의 위협이 사라지고 먹이가 보장되자, 경계와 생존에 필요한 뇌의 특정 부위가 퇴화하며 전체 뇌 용량이 야생 시절보다 약 20~30% 감소했다.
신체적 변형: 길고 날카롭던 주둥이는 짧아졌고, 빳빳하게 서 있던 귀는 아래로 늘어졌다. 이는 신경릉(Neural Crest) 세포의 발달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인간에게 친근함을 주는 외형으로의 진화이기도 했다.
지방 축적 능력의 극대화: 야생에서는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지만, 가축이 된 돼지는 섭취한 영양분을 체내 지방으로 저장하는 데 특화된 유전적 형질을 갖게 되었다. 이는 훗날 인류에게 고열량의 지방을 제공하는 핵심 자산이 된다.
8. '걸어 다니는 단백질 은행'과 사회 구조의 변화
돼지의 가축화는 인류의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수렵 시대에 고기는 사냥 성공 여부에 따른 '우연의 산물'이었으나, 가축화된 돼지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살아있는 자본'이 되었다.
돼지는 화폐가 발명되기 이전, 부를 저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잔치나 제사를 위해 돼지를 잡는 문화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 사회적 장치로 작용했다. 또한, 돼지 사육을 통해 확보된 잉여 식량은 인구 증가를 불러왔고, 이는 곧 노동력의 분화와 계급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즉, 돼지는 인류가 '문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영양학적 토대를 제공한 일등 공신이었다.
9. 수렵 대상에서 생활 동물로: 단절과 공진화의 결론
멧돼지가 인간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돼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과정은 일방적인 복종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생존을 위해 유전적, 문화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공진화(Co-evolution)의 과정이었다. 인류는 돼지에게 안전과 먹이를 제공했고, 돼지는 인간에게 문명을 지탱할 에너지를 제공했다.
숲속의 포식자에서 집안의 가축으로 변모한 돼지의 역사는 곧 인류가 자연을 어떻게 길들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다. 이 기묘한 동맹은 이제 단순한 식량을 넘어, 문명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주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돼지가 비추는 문명의 민낯
우리는 멧돼지라는 야생의 공포를 울타리 안에 가둠으로써 문명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돼지가 겪은 유전적 변화와 인간이 획득한 풍요 사이에는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다. 제2장에서는 이렇게 가축화된 돼지가 인류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전 세계로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각기 다른 문화적 금기와 욕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