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계급과 고기
제7장 계급과 고기: 귀족의 고기였던 사슴, 민중의 단백질이었던 돼지
인류의 역사는 식탁 위에서 전개된 계급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무엇을 먹느냐는 단순히 생존의 문제를 넘어, 먹는 이가 사회적 위계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증명하는 강력한 기호였다. 특히 육류는 그 희소성과 획득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계급을 가르는 가장 선명한 기준점이 되었다. 숲의 주인이었던 사슴과 집 안의 동반자였던 돼지는 각각 ‘권력의 상징’과 ‘생존의 토대’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문화적 경로를 걸어왔다.
1. 사슴: 금지된 숲의 권력과 귀족적 정체성
중세 유럽부터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사슴은 가축화되지 않은 ‘야생성’ 그 자체였으며, 이를 소유하고 섭취하는 행위는 오직 지배 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수렵권과 토지 소유: 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에서 숲은 더 이상 공유지가 아니었다. 왕과 귀족들은 특정 숲을 ‘포레스트(Forest)’로 지정하고 사유화했다. 여기서의 포레스트는 단순히 나무가 우거진 곳이 아니라, 왕의 사냥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구역을 의미했다. 이곳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것은 단순한 식량 확보가 아니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잔혹한 금기, 산림법(Forest Laws): 노르만 정복 이후 영국에서는 사슴을 밀사냥한 평민에게 눈을 멀게 하거나 손을 자르는 엄벌을 내렸다. 사슴은 ‘왕의 짐승’이었으며, 평민이 사슴고기(Venison)를 맛보는 것은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사슴고기는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 오직 귀족들 사이의 선물이나 연회용으로만 유통되는 ‘권력의 화폐’였다.
스포츠로서의 사냥: 귀족들에게 사슴 사냥은 전쟁을 준비하는 훈련이자 품격을 증명하는 스포츠였다. 사슴의 흔적을 쫓고, 추격하고, 최후의 순간에 직접 숨통을 끊는 과정 전반에는 엄격한 에티켓과 절차가 존재했다. 사슴고기의 맛보다 그 고기를 획득하기까지의 ‘고귀한 과정’이 고기의 가치를 결정했다.
2. 돼지: 마당의 경제학, 민중을 버티게 한 생존의 단백질
사슴이 숲이라는 금기된 공간의 주인공이었다면, 돼지는 인간의 주거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민중의 삶을 지탱한 현실적인 동반자였다. 돼지는 계급적 권위 대신 생태적 효율성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뒤뜰의 저금통: 돼지는 사슴처럼 넓은 영지나 특별한 사냥 기술을 요구하지 않았다. 농가 마당이나 마을 공유지에서 인간이 먹고 남은 잔반이나 숲의 도토리를 먹고 자랐다. 적은 비용으로 가장 빠르게 살을 찌우는 돼지는 서민들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금융 자산’이었다.
저장성과 효율성의 극치: 사슴고기가 연회에서 즉시 소비되는 ‘사치재’였다면, 돼지고기는 염장과 훈제를 통해 일 년 내내 식탁을 지키는 ‘상비재’였다. 하몽, 베이컨, 소시지 등으로 변모한 돼지는 혹독한 겨울과 흉년을 견디게 하는 생명줄이었다. 버릴 것 하나 없이 내장부터 피, 발톱까지 모두 요리해 먹는 돼지 문화는 결핍의 시대를 건너온 민중들의 지혜가 응축된 결과였다.
낮은 곳으로 임한 고기: 많은 종교와 문화권에서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한 배경에는 그들의 잡식성과 불결한 환경에서의 적응력이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강인함 덕분에 돼지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육류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 있었다. 귀족들이 사슴의 ‘고결한 야생성’을 칭송할 때, 민중들은 돼지의 ‘비천한 생산성’에 기대어 생존을 이어갔다.
3. 언어 속에 박제된 계급의 흔적
육류 소비의 계급차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여전히 화석처럼 남아 있다. 영어에서 살아있는 동물과 그 고기를 지칭하는 단어가 다른 것은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형성된 계급 구조의 산물이다.
Pig와 Pork의 괴리: 들판에서 흙을 파헤치며 돼지를 키우던 피지배층인 색슨족은 이를 ‘Pig’라 불렀다. 그러나 식탁에 앉아 요리된 고기를 즐기던 프랑스어권 노르만 귀족들은 이를 ‘Porc(Pork)’라 칭했다.
Deer와 Venison: 사슴 역시 마찬가지다. 사냥터의 짐승은 ‘Deer’였으나, 은쟁반 위의 고기는 ‘Venison’이 되었다. ‘Venison’의 어원인 라틴어 ‘Venari’는 ‘사냥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즉, 고기 자체가 아니라 ‘귀족적 사냥의 결과물’임을 강조한 용어다.이러한 언어적 이원화는 육류 생산자와 소비자가 철저히 분리되었던 시대, 즉 ‘노동하는 자’와 ‘즐기는 자’의 계급적 경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4. 동아시아의 맥락: '가(家)'와 사슴 노(鹿)
동아시아에서도 돼지와 사슴의 대조적 위치는 선명하다. 다만 유럽이 법적 제한에 집중했다면, 동아시아는 정착 농경 문화와 제례 문화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했다.
정착의 돼지: 한자 ‘家’가 상징하듯 돼지는 집안의 안정과 재산을 의미했다. 돼지고기는 마을 공동체의 축제와 제례에서 모두가 나누어 먹는 공감의 음식이었다. 이는 돼지가 민중의 정서적, 경제적 중심이었음을 뜻한다.
상징의 사슴: 사슴은 십장생(十長生) 중 하나로 영생과 복을 상징했으며, 그 뿔인 녹용(鹿茸)은 왕실과 사대부의 기력을 보하는 귀한 약재였다. 사슴은 먹어서 배를 채우는 고기라기보다, 하늘의 기운을 담은 영물로 대접받았다. 이처럼 사슴은 현실 너머의 가치를, 돼지는 현실 안의 풍요를 대변했다.
5. 근대화와 계급의 전도: 대중화된 육류와 사라진 수렵 문화
산업혁명과 육류 생산의 기계화는 수천 년간 이어온 계급적 육류 소비 구조를 해체했다.
돼지의 승리: 공장식 축산의 도입으로 돼지고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육류가 되었다. 과거 민중의 애환이 서린 고기였던 돼지는 이제 대중적인 미식의 중심이자 거대한 글로벌 산업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희소해진 사슴: 반면 사슴 사냥은 현대에 이르러 환경 보호와 동물 복지의 관점에서 엄격히 제한되거나, 일부 지역의 특수한 취미로 남게 되었다. 귀족의 권위였던 사슴고기는 이제 대중적인 시장에서 사라진, 접근하기 어려운 ‘이색 육류(Exotic Meat)’가 되었다.
식탁 위에서 읽는 인간의 무늬
사슴과 돼지의 역사는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방식이 결코 생물학적 사실에만 기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슴은 인간의 권력욕과 명예를 투영한 거울이었고, 돼지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경제적 지혜를 투영한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