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 부산물의 미활용 요인을 탐색한다
― 일본 육식문화사의 관점에서 ―
루이첸루(呂 惠眞)* · 고이즈미 세이이치(小泉聖一)** · 이시다 마사미(石田正美)***
서론
연구 방법
‘육식 금지령(肉食禁止令)’ 이전의 육식 문화와 그 수용
‘육식 금지령’과 육식 회피의 법제화 및 사회로의 침투
약초를 통한 한약(和漢본초학)의 독자적 발전
육식과 가죽(피혁) 취급 사이의 관계
금지령 하에서 한정적으로 행해진 육식
류큐(오키나와)에서의 육식 문화
총괄
축산 부산물의 미활용 원인을 탐색함:
일본 육식 문화사의 관점에서
Hui-Chen Lu, Seiichi Koizumi, Masami Ishida
유목 원주민의 식육문화 영향을 받은 중화·조선 요리에서는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활용하는 데 비해, 일본의 서민적 식문화에는 동물의 내장과 혈액을 그다지 먹지 않는 전통이 존재한다. 중화권에서 유학해 온 필자(呂)는 이 점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왜 동물의 내장을 버리고 일부만을 먹는가, 언제부터 먹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여러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본에서 야생 조류·야생동물(조수)의 고기 등을 식육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조수의 보호 및 사냥의 적정화에 관한 법률」 등 다양한 보호 관련 법률에 따른 제한이 존재한다. 또한 후생노동성이 마련한 지비에(야생 조수육)에 대한 위해요소중점관리점(Hazard Analysis Critical Control Point: HACCP) 방식의 위생관리 가이드라인(2022년)에 따라, 야생 조수의 식육 처리·가공 시설에서는 내장 전량 폐기 방향으로 운영이 이행되고 있다.
한편 필자는 도축장에서 가축의 부산물 부위가 어느 정도 폐기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식육 처리장(도축·가공장)에서 소·돼지 부산물의 폐기율과 이용 상황에 관한 설문조사를 2015~2016년과 2020~2021년에 실시하였다(유효 응답 수는 2015~2016년 22개사, 2020~2021년 11개사).
표 1은 그 결과의 개요를 제시한 것이다. 부산물의 활용률을 보면, 동일 부위에서 소보다 돼지의 활용률이 더 높다. 또한 “소 부산물”에 대해서는 2015~2016년 조사에서도 2020~2021년 조사에서도, 소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문제 발생 이후 특정위험부위(Specified Risk Material: SRM) 가운데 소의 뇌가 100% 폐기되고 있다.
다음으로 2020~2021년 조사에서는 소의 혈액 폐기율이 95.0%로 가장 높았고, 위험부위인 척수와 외비(코의 바깥 부분)의 폐기율이 90.0%로 뒤를 이었다.
이어 두개(頭蓋, 85.0%), 이개(耳介, 80.0%), 정소·담낭·태반(각 70.0%), 음경·담즙·부신(각 60.0%), 췌장(40.0%), 발(30.0%) 순으로 나타났다. “돼지 부산물의 폐기율”에 관해서는 돼지 혈액이 가장 많이 폐기되었고(94.4%), 다음으로 정소·담낭·담즙·태반(각 66.7%), 뇌·부신·음경(각 55.6%), 척수(44.4%), 췌장(33.3%), 외비(11.1%)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혈액의 폐기율은 5년 전과 비교해 소가 92.1%에서 95.0%로, 돼지가 92.5%에서 94.4%로 양자 모두 상승하였다.
한편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월까지 실시한 대만·중국의 도축장 현지 청취조사에서는, 돼지에서 폐기되는 부위가 돼지털이나 담낭, 하악골(下顎骨), 견갑골 정도에 불과하였다. “육품시장”(도축장이 병설된 공영 시설)이나 민영 육가공 업체에 있어 돼지의 혈액과 내장 등은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는 점이 일본과 크게 달랐다. 대만·중국에서는 정육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은 돼지 간·신장이나 소의 아킬레스건 등이 가정식 약선요리로 섭취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정육 선호가 강하며, 내장 활용은 돼지의 식용 간과 췌장, 소의 담즙을 의약품 원료로 출하하는 사례가 일부 존재하긴 하지만, 오키나와 등을 제외하면 혈액과 내장의 비식용 부위는 거의 폐기되고 있는 것이 현상이다.
일본과 중국·대만 사이에서 동물의 내장 및 혈액 활용에 이처럼 큰 차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 차이를 해명하기 위해, 식육 및 내장 등의 이용과 관련된 일본의 역사를 조사해 왔다. 역사적 경위를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식육이 금지되었고 메이지 이후 서양화로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식육문화사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거쳐 전개되어 왔다. 이하에서는 역사적 흐름에 따라 본고의 여섯 가지 물음을 항목 형태로 제시하고자 한다.
(1) 675년의 「육식 금지령의 조(詔, みことのり)」 이전에도 식육은 행해졌는가. 또한 그 식육문화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2) 둘째, 동물을 만지는 행위, 동물을 먹는 행위, 나아가 도축과 같은 행위에 대한 ‘더러움(穢れ)’의 관념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이 ‘더러움’ 관념의 대상이 되었는가.
(3) 약초와 더불어 동물의 혈액과 내장도 약으로 삼는 ‘의식동원(醫食同源)’의 중국에서 전래된 ‘본초학’은 중국에서 어떻게 발전했으며, 그것이 일본에 수입된 이후에는 어떻게 발전했는가.
(4) 도축하여 피혁을 다루는 산업은 어떠한 필요성에서 발생하여 성립하였는가. 생성되는 고기 등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또한 피혁을 다루는 장인은 무가 사회에서 어떻게 위치 지워졌는가.
(5) 동물을 사냥하여 약 대신 먹는 일을 ‘약렵(薬猟, くすりがり)’이라 하는데, 약렵을 포함하여 육식 금지령 아래에서의 식육은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가.
(6)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키나와에는 대만·중국과 유사하게 동물의 내장과 혈액을 먹는 문화가 존재하나, 어떤 역사를 거쳐 다른 도도부현과 다른 문화가 형성되었는가.
이와 같이 (1)~(6)의 물음에 답해 가는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왜 동물의 내장과 혈액을 활용하지 않고 폐기하게 되었는가”라는 본고의 근원적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본고의 구성을 밝히면, 2장에서는 연구 방법을 기술한다. 3장에서는 위 (1)의 물음에, 4장에서는 (2)의 물음에 답하는 식으로, 8장에서는 (6)의 물음에 각각 답한다. 그리고 9장의 총괄에서는 (1)~(6)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지금까지 정리한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날 일본에서 동물의 내장과 혈액을 먹지 않는 식육문화가 형성된 요인을 검토한다.
'머리말'에서도 기술했듯이, 본고는 제1저자가 대만과 일본의 육식 문화를 비교하는 한편, 돼지와 소의 부산물 부위 활용 및 폐기 현황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일본에서는 너무나 많은 부산물 부위를 폐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에 감안하여, '일본에서는 왜 부산물 부위를 폐기하고 있는가'라는 연구상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일본의 육식 문화사에서 찾고자 하며, 기존의 일본 및 중국의 문헌과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을 진행한다.
나아가 육식이 금지되기 이전의 시대부터, 육식이 금지되었던 아스카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육식에 관한 제도적인 변천과 귀족·무가 등의 지배 계층 및 일반 서민의 육식 실태에 대해 기술하고 고찰하고자 한다.
오호십육국의 선비(鮮卑) 시대(107~385년)부터, 고대 인도 불교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치는 과정에서 불교의 여러 경전 또한 티베트를 경유하여 몽골 지역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티베트의 불교 사상이 몽골 유목민에게 침투하였다. 특히 티베트와 몽골에서 활발히 연구된 『섭대승론(摂大乗論, 400년)』에는, 중생이 살아가기 위해 이롭기만 하다면 가축을 죽여 먹는 행위는 「보살계(菩薩戒)」를 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설한다. 또한 도축을 통해 사람들에게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보살행이 된다고 한다. 곧 불교가 시작되던 시기에는 육식이 금지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内澤 2011, 156-159; ガントヤー 2012, 237-25).
자연의 대초원에 거주한 몽골 기마민족의 존재는 아시아의 살생·식육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특히 1231년부터 몽골제국이 고려 왕조에 대해 반복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약 100년(1259년~)에 걸쳐 고려를 지배하는 동안, 대량의 소를 ‘고기용 소’로 공출하도록 강요하였는데, 이로 인해 쇠고기 식문화가 고려와 중국에도 전파되었다. 또한 『하치만 구도훈(八幡愚童訓)』 등의 사료에 따르면, ‘몽골궁(蒙古弓)’에 우각(牛角)과 건(腱)을 이용하기 위해, 소의 도축과 이용을 더욱 공공연하게 추진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佐々木 2004, 354-355; 尹 2008, 192-204). 이 같은 사정으로 보아, 몽골에서는 도축에 종사하는 자가 살생계를 넘어, 오히려 경의를 담아 존중받는 존재로 위치 지워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육식을 중심으로 하는 유목민은 도축할 때 동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하여 칼로 즉사시키는 동시에, 내생(來生)을 기원하는 참회 축문(懺悔祝詞)까지 포함한 의례를 거행한다. 가축을 해체하는 행위는 금기시되지 않으며, 대지에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다고 한다. 해체 후에는 ‘피’를 창자에 채워 소시지를 만들고, 내장도 남김없이 모두 먹었다. 이처럼 희생된 가축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받아 나누어 가지며 살아간다”(内澤 2011, 146)라는 사고방식은 몽골 민족의 보살행적 도축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内澤 2011, 144-146).
고대 일본에서도 4세기 무렵 『하리마국풍토기(播磨国風土記)』에는, 비를 구하고 풍작을 기원하기 위해 신에게 동물을 희생으로 바치는 신기(神祇) 제사, 또는 동물을 죽여 그 ‘피’로 벼 종자를 씻으면 벼의 싹이 매우 빨리 났다는 이야기 등이 보인다. 아울러 “도살하다(屠る)”가 “이삭을 흔들다(穂振る)”로도 통하며, 그 어원에서 오곡풍양(五穀豊穣)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명을 통해, 주술(巫呪) 의례적 도축 사상을 엿볼 수 있다(中村 2011, 44; 辻本 1999, 152).
그리고 문명이 진전되어 국가 형성으로 나아가던 시기, 지배자의 사냥 활동은 정치적·군사적 목적과 결합하여 해석되었다. 예컨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4에는 인교(允恭) 천황(415년) 14년 9월조에 “천황이 아와지섬에서 사냥하셨다……(중략)……”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사료를 통해 경계 설정의 공간으로서 사냥터가 지닌 ‘신성성’이 부각된다. 이처럼 정치적·군사적 목적 아래 사슴을 몰고 사냥하는 행위는, 왕권적 도축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山下 2005, 107-111; 中澤 2008, 39).
불교 전래 이후, 덴무(天武) 천황에서 시작된 “육식 금지령의 조”(675년)에 따라 백성은 「소·말·개·원숭이·닭(牛馬犬猿鶏)」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西本 2008, 166-167). 7세기부터 덴표(天平)~엔랴쿠(延暦) 연간에 이르기까지 당(唐) 불교의 전성기가 도래하였고, 대승불교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불교가 보급됨에 따라 살생·식육 금지령이 거듭 논의되고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불교의 살생 금지에 더하여, 고대 신도 사상과 결합되면서 나라(奈良) 시대부터 헤이안(平安) 시대에 걸쳐 형성된 것이 이른바 「케가레(穢れ)」의 관념이다(佐々木 2004, 37)¹). 원래 고대 신도 사상에서는 “산하(山河)의 거친 신들(荒ぶる神々)”에 대한 경외의 감정이 일본인 사이에 형성되어, 그 신들이 거처하는 자연을 청정한 성역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신은 케가레를 싫어한다”는 관념이 고대 신도의 습속 속에 널리 침투해 갔다고 이해된다(村田 1986, 42-43).
“신이 싫어한다”고 여겨진 「케가레」의 대상이 무엇을 향하였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사료의 케가레 관련 서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죽음에 대한 케가레”이며, 그 근원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 혐오에 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뒤에서 언급할 「고닌식(弘仁式)」에서는, “죽음”과 함께 케가레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것이 “출산에 대한 케가레”인데, 여기서의 “죽음”과 “출산”은 사람에만 한정되지 않고 동물의 “죽음”과 “출산” 또한 케가레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井出・牛山 2016, 81-83).
“죽음” 및 “출산”과 함께 케가레의 대상으로 취급된 것이 “피에 대한 케가레”이다. 본래 고대 일본에서는 “피”가 “강한 힘”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었고, 앞서 언급한 『하리마국풍토기(播磨国風土記)』에 동물을 죽여 그 “피”로 벼 종자를 씻으면 벼의 싹이 매우 빨리 났다는 이야기는 이를 상징한다(中村 2011, 44; 辻本 1999, 152). 이 때문에 헤이안 귀족 사회에서 출혈은 곧바로 케가레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피” 그 자체가 케가레로 취급된 사례는 많지 않고, 월경이나 질병·상해와 결합하여 “부정(不浄)”을 띤다는 지적이 일정 부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부터 10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월경과 비교할 때 “피” 그 자체를 「케가레」로 보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는 “피”가 “죽음”을 강렬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井出・牛山 2016, 84).
701년 몬무(文武) 천황이 반포한 다이호(大宝) 율령에도 “예오(穢悪)”라는 문언이 포함되어 있다(大本 2013, 34-35 및 56-57). 또한 7세기에 편찬이 시작되어 712년에 완성된 『고지키(古事記)』에는 죽음의 케가레가 언급되어 있으며, “생박(生剥), 역박(逆剥), …… 마혼(馬婚), 우혼(牛婚), 계혼(鶏婚)의 죄의 무리를 여러모로 들추어 나라의 대바라이(大祓)로써……”라는 구절에서, 소와 말의 가죽을 벗기는 행위를 죄로 삼고 있다(辻本 1999, 30-32 및 199). 또한 케가레와 불교의 관련과 관련하여, 덴표 연간(729~766) 『다라니집경(陀羅尼集経)』 권9의 「우추슈마 해예법인(烏樞沙摩解穢法印) 제17」에는 “시체, 여인의 출산, 육축의 출산(‘피’)을 보는 것이 ‘케가레’이다”라고 하여(宮崎 1987, 19), “출산” 및 “동물의 피”에 대한 케가레 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이초(最澄)와 구카이(空海)는 불로써 부정을 전환해 청정으로 삼는다고 하는 『우추슈마경(烏樞沙摩経)』을 다루었다. 구카이가 834년 신천황(니묘(仁明) 천황)의 어의(御衣)에 대해 수법(修法: 가호·기도)을 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된 『속일본기(続日本紀)』(836년)에서는, 한 글자 명사로서의 「穢」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케가레」가 고정된 관념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 준다(大本 2013, 113-121).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 820년 『고닌식(弘仁式)』, 868년 『조간식(貞観式)』이 율령으로 편찬되었고, 이를 더 개정한 『엔기시키(延喜式)』가 927년에 편찬되었다. 『고닌식』의 일문(逸文) 가운데에는 “케가레에 닿으면 닿은 사람도 케가레가 된다”(川元 2009, 80)라고 하는 「촉예(触穢)」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触穢悪事応忌者、人死三十日、産七日、六畜死五日、産三日、其喫宍及弔喪、問疾三日”이라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사람의 죽음과 출산, 육축의 죽음과 출산, 그 고기를 먹는 일, 상을 조문하는 일, 병문안을 가는 일이 「촉예」로 규정되며, 각각에 대해 삼가야 할 일수가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고닌식』 단계에서 이미 앞서 말한 케가레에 대한 기피 의식이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大本 2013, 75-76).
또한 신기(神祇) 신앙에 기초한 공적 의례의 대강을 정한 『신기령(神祇令)』(868년 무렵)의 산사이조(散斎条) 세칙 규정에는 “不得弔喪、問病、食宍、亦不判刑殺、不決罰罪人、不作音楽、不預穢悪之事。致斎、唯為祀事得行、自余悉断、其致斎前後、兼為散斎”라고 하여, 식육(食宍)의 금지가 추가되었다(井出・牛山 2016, 81).
더 나아가 『엔기시키』에서는 “죽음, 출산, 피”가 케가레로서 더욱 강하게 의식되게 되었고, 케가레에 관한 여러 규정이 국가 차원에서 케가레에 접촉하는 일을 꺼리도록 하여, 「예게조(穢忌条)」, 「조우소조(弔喪条)」, 「촉예조(触穢条)」, 「시에조(司穢条)」, 「실화조(失火条)」가 법제화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엔기시키』에서 케가레가 어디까지나 신기 제사의 틀 안에 놓이면서도, 법제화를 통해 제도적으로는 신기 제사를 관장하는 조정 및 신사 바깥에 위치한 세속 사회로 ‘옮겨’지고 있다는 점이다(尾留川 2009, 57-59; 大本 2013, 76). 이러한 사실은, “식육 기피”를 포함한 케가레 의식이 헤이안 시대에 귀족과 신직(神職)뿐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천황제 국가 통치로서의 불교에 더하여, 귀족 계급과 일반 서민 사이에서 짐승고기 섭취를 죄악시하는 사상이 확산되면서, 일본 고유의 도축 사상관이 변화해 간다(佐々木 2004, 37).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음양도가 개입하였으므로, 흉작이 계속되는 원인을 살생의 횡행에서 찾게 되었고, 살생·식육을 부정하는 사상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러 귀족 사회에서 무가 사회로 이행하는 가운데, 상무(尚武) 문화의 영향으로 사냥에 의한 야생 짐승고기 섭취가 성행하였다. 예컨대 교토의 로카쿠 니시노토인(六角西洞院)에 사슴고기가 집적되어 이를 ‘육시(宍市)’라 부르며 많은 사람이 모여 먹었는데, 공가(公家)의 일기 등에서 발췌한 역사서 『햐쿠렌쇼(百錬抄)』에는 이를 두고 “낙중의 부정……(略)……”이라 탄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말기에는 남만무역이 시작되었고, 남만(南蛮) 식육문화가 도입되면서 사쓰마(薩摩), 분고(豊後), 히젠(肥前)은 물론 교토에서도 쇠고기 요리가 공공연히 등장하였다(宮崎 1987, 19). 그러나 다른 한편, 무로마치 시대 이후에는 여성의 여성 특유의 출혈로 인해 사후에 혈분지(血盆池, ‘피의 못’) 지옥에 떨어진다고 설하는 『혈분경(血盆経)』이 일본에 전해지면서(松岡 1989, 85-100), “피”의 케가레에 대한 사회의 부정관 의식이 강화되었다.
에도(江戸) 시대에 들어서도, 게이초(慶長) 17년(1612년)에 내려진 농민 단속 법령의 오개조(五箇条) 가운데 하나에 “소를 죽이는 일은 금지이다. 만일 죽이는 자가 있더라도 일체 팔아서는 안 된다(牛を殺す事御制禁也、自然殺すものにハ、一切不可売事)”라고 하여, 막부의 소 살생 금지령이 이 시점에 이미 내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방에서는 도도(藤堂) 가문이 이가(伊賀)국을 영유하기 시작한 게이초 13년(1608년), 이가 나바리 성터를 맡긴 우메하라 가쓰에몬(梅原勝右衛門)에게 보낸 성부 하토(城附法度) 21개조 중에 “사슴·멧돼지·소·개는 일체 먹지 말 것(鹿猪牛犬、一切喰申間敷事)”이라는 조항이 있어, 막부의 공포 이전부터 사슴, 멧돼지, 소, 개의 식육을 금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그 시기 각지에서 동물의 살생과 식육이 널리 이루어졌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根崎 2005, 3-4).
또한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시대부터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가 반포되어 여러 다이묘의 국정 등이 규정되었다. 이 무가제법도 역시,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 전란이 없는 태평한 세상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 시대에, 이에야스(家康) 정권의 “궁마의 도(弓馬之道)”보다 “충효”와 “예의”를 다이묘와 무사에게 요구하는 큰 방침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쓰나요시 시대에는 “죽음·출산·피의 케가레”에 대한 두려움과 생류(生類) 살생 금지의 사고에 근거하여, 「복기령(服忌令)」(1684년)과 「생류 아와레미의 령(生類憐みの令)」(1685년)이 반포되었고, 20여 년에 걸쳐 식육 기피 관념이 사회에 깊게 침투하였다(辻本 1999, 46-47).
복기령은 근친자의 사망에 즈음하여 상(喪)에 복하는 기간을 정한 것으로, “기(忌)”는 “죽음의 케가레”를 꺼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기간을, “복(服)”은 밖에 나가 일을 처리하더라도 여전히 삼가고 조심하는 기간을 뜻한다. 「복기령」의 채택은 조정 및 신기 관계의 제도를 무가 사회로 이입시키고, 더 나아가 민중에게까지 “죽음의 케가레” 의식을 침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복기령의 근거가 되는 규정은 그 이전부터 지방에도 존재하였는데, 예컨대 15세기 초 교토 기온사(祇園社, 현 야사카 신사)의 「복기령」에서는 다음과 같이, ① 멧돼지·사슴을 먹은 사람은 50일, ② 고기 및 가모시시(カモシカ, 일본영양)를 먹은 사람은 5일, ③ 네 발짐승을 먹은 사람은 7일, ④ 새를 먹은 사람은 3일, 그리고 ⑤ 육축의 ‘죽음의 케가레’는 5일, ⑥ 육축의 ‘출산의 케가레’는 3일로, 동물 종류에 따라 삼가야 할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辻本 1999, 46-47).
중국 역대의 본초학에서 한(漢)대에는 『신농본초경』, 『상한잡병론』, 『금궤요략(金匱要略)』이 편찬되었고, 진(晋) 왕조에는 『주후방(肘後方)』, 양(梁) 왕조에는 『명의별록(名医別録)』,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経集注)』, 『보결주후방(補缺肘後方)』 등으로 본초학이 진전하였다. 또한 당(唐)대에는 『식료본초』, 『천금식치(千金食治)』, 『천금방(千金方)』, 『당본초(唐本草)』(『신수본초(新修本草)』의 별칭), 『본초습유(本草拾遺)』, 『식의심경(食医心鏡)』, 『일화자제가본초(日華子諸家本草)』(출처 불명) 등이, 북송(北宋)대에는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恵民和剤局方)』, 『가우본초(嘉祐本草)』, 『본초도경(本草図経)』 등이, 원(元)대에는 『탕액본초(湯液本草)』 등이 편찬되었다. 더 나아가 명(明)대에는 『본초몽전(本草蒙筌)』, 『본초강목』, 『식물본초』가, 청(清)대에는 『본초종신(本草従新)』, 『의림찬요(医林纂要)』 등이 편찬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대에 이미 동물 조직과 내장 등이 호르몬 제제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叶苓・陳深 2004, 6).
이러한 동물성 생약에서 이른바 “동물본초”가 발전함에 따라, 송·원 시대부터 동물의 내장을 포함한 축산 부생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임상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이 확인된다(叶苓・陳深 2004, 7). 포유류 동물본초의 약용 부위는 구체적으로 내장(간, 폐, 비(脾), 신(腎), 위, 담, 췌(胰)), 골, 척수, 뇌, 치아, 혀, 굽(蹄), 발, 꼬리, 타액, 가죽, 지방, 젖, 태반, 고환, 혈액, 털, 분뇨(糞尿) 등 120종을 넘는 부위가 다종다양하게 사용되었다(叶・陳 2004, 9-10).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약 관련 기사로는, 불로장생을 지향하는 신선도적(神仙道的) 사유가 보이는 『산해경(山海経)』(기원전 5세기~3세기 추정)을 중심으로 한 의약 사상이 동양의학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森田 1985, 425-427 및 572). 『산해경』에서 약물이 될 수 있는 것을 초(草), 목(木), 조(鳥), 수(獣), 충(虫), 어(魚), 광(鉱)으로 나누어 의약 사상을 분류하는 방식은, 아래에서 언급할 『신농본초경』(후한 25~220년)의 약물 분류 서술 형식과 전적으로 동일한 수법임을 엿볼 수 있다. 『산해경』의 약효적 해설에 따르면, 예컨대 추양(杻陽)산에는 “녹촉(鹿蜀)”이라는 동물이 신수(神獣)로서 “양(陽)의 촉진”을 가져오며, 그 피모(皮毛)를 허리에 매달고 있으면 자손이 번성하게 된다고 한다(森田 1985, 437, 492-494, 544, 592).
한방 사상은 『산해경』에서 계승되었고, 여기에 더해 장주(莊周) 시대의 궁정 약선(藥膳)에 기반한 “양생 사상”이 더해져 성립한 『신농본초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물학서이다. 정통 본초의 기반 본(基幹本)으로 여겨진 『신농본초경』에 이어, 3~4세기의 『명의별록』에는 730품종 이상의 한방 약이 기술되었다. 그리고 500년경 양(梁)의 도홍경(陶弘景)이 여러 전본(伝本)을 교정·확정하고, 유래 약물과 자주(自注)도 보태어 『신농본초경집주』를 작성하였다. 이후 역대의 교정·증보를 거쳐, 당(唐)의 소경(蘇敬) 등 의관(医官)은 『신수본초』를 편찬하여 본초학의 토대를 구축하였다(黄 2003; 許 1983, 82-110). 이들 약서에 실린 주요 포유류 동물 생약은, 도1과 같이 약 63종에 이른다.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의약 사상은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확산되었다. 아스카(飛鳥) 시대 이후의 의학은 한방의학의 계승과 전개에 따르면서도, 불교 전래와 더불어 불교와 융합하여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견당사(遣唐使) 등과 함께 왕래한 승려들에 의해 수·당(隋唐) 의학이 일본에 깊숙이 침투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약렵(薬猟)”의 연원을 살펴보면, 고대 중국 장강(長江) 중류 지역에서 5월 5일에 행해지던 약초 채취 민간행사와, 고구려 왕실이 3월 3일 낙랑(楽浪)의 언덕에서 사슴과 멧돼지를 사냥하던 행사가 존재하였다. 아스카 시대 스이코(推古) 조정에서는, 기원이 서로 다른 이 두 행사를 합쳐 장엄한 궁정 의례로 거행하였다고 한다(宇陀市ホームページ).
고대 일본의 약렵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는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2 스이코 천황기(推古天皇紀)에 “19년 여름 5월 5일, 우다노(菟田野)에서 약렵을 하였다……(중략)…… 이날 여러 신하는 복색을 모두 관색(冠色)에 따르고, 각자 상투에 꽃을 꽂았다……”라는 기재가 보인다. 해설에 따르면 “스이코 19년(611년) 여름 5월 5일, 우다노(우타노: 나라현 우다시)에서 거행된 약렵에서 참가자들은 각자의 색을 띤 사냥옷(狩衣)을 입고, 위계의 대소에 따라 관을 착용하였으며, 12관위에는 각각 장식을 달았다……”라고 설명된다. 이처럼 약렵은 그 기원과도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木村 2002, 55-85).
또한 당 제도에 따라, 몬무(文武) 천황 시대의 『다이호 율령(大宝律令)』(701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의사(医事) 제도에 해당하는 “의질령(医疾令)”이 규정되었고, 궁내성에 속한 전약료(典薬寮)를 중심으로 국가 의료 체제가 구축되었다. 나라 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불교 의학은 불교 정신에 근거하여 빈민과 병자를 구제하기 위해, 사찰을 중심으로 다수의 구료 시약원(救療施薬院) 설치를 촉진하였다(石原 1959, 16-17 및 21-23).
아스카 시대 말부터 나라 시대 중기 무렵,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이호 율령』이 시행되던 시대의 후지와라쿄(藤原京) 터 출토 약물 목간(木簡)에는 “용골(龍骨)”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한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납입된 “루샤나불(盧舎那仏)에게 바치는 갖가지 약장(種々薬帳)”(756년)에는 60종의 귀중한 수입 약재가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동물성 생약의 구체적 예로는, 사이카쿠키(犀角器)·사이카쿠(犀角: 인도산 검은코뿔소), 신라 양지(新羅羊脂), 사향(麝香: 수사슴의 향낭 분비물), 위피(猬皮: 고슴도치 가죽) 등이 확인된다(内藤記念くすり博物館ホームページ).
다이호 율령에 뒤이은 『요로 율령(養老律令)』(757년) 가운데 “구목령(廐牧令)”의 말·소 생산 체제에 관하여 “대체로 관(官)의 말·소가 죽으면 각각 가죽, 뇌, 뿔, 담을 취하라. 만일 우황(牛黄)을 얻으면 별도로 올리라(別に進れ)”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나라 시대의 의료 제도 확립과 더불어, 도1에서 음영 표시된 동물의 내장 등이 약물로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寺木 2014, 127-128).
헤이안 시대 엔기(延喜) 연간(901~923)에 들어, 약물학에서 당의 『신수본초』를 본떠 후카네 스케히토(深根輔仁)가 일본 현존 최고(最古)의 약물서 『본초화명(本草和名)』을 편찬하여 약물로서 동식물·광물을 수록하였다. 본초학은 후세 약물학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小曽戸 2014, 110 및 226).
한편 불교의 성쇠와 더불어 발전해 온 가마쿠라 무가 정치(1185년~) 하의 의료와 의학의 변천은, 전약료도 의관을 세습한 단바 야스요리(丹波康頼, 『의심방(医心方)』 저술) 등 각 씨족이 도급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의관의 몰락이 두드러지게 진행되었다. 도축 활동은 폐쇄적인 신불교 사상의 영향과 맞물려 위축되었고, 민간의(民間医)의 대두나 승려 의사(僧医)의 독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남북조에서 전국 초기로 이어지는 병란이 지속된 탓에 정통 의학 연구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고, 의학 전반은 상처 처치를 담당하는 금창의(金創医) 등 실지 구료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무로마치 시대 초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의 대륙 교류를 통해 중국 명(明) 의학이 유입되면서 의술 연구가 다시 성행하였다. 전국 오다·도요토미기(織豊期)에도 명 의학의 도입은 다시 활발해졌고(石原 1959, 16-17, 42, 53, 71 및 76; 新村 2006, 52 및 74), 이에 일본의 독자적인 식육 기피론이 호응하면서 『에쓰포 식물본초(閲甫食物本草)』, 『본조식감(本朝食鑑)』, 『야마토본초(大和本草)』, 『화한삼재(和漢三才)』 등, 식물을 주체로 한 일본적 화한 본초학이 추진되어 왔다(原田 2009, 149-151). 수·당 의학을 통해 헤이안 시대에 전해졌던 『신수본초』에 이어, 1596년 이시진(李時珍)이 저술한 『본초강목』은 본초학의 집대성이며, 일본에 전래된 이후 에도 시대를 통하여 일본 본초학이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石原 1959, 16-17, 71 및 76; 新村 2006, 52 및 74).
그러나 에도 중기 이후 역병의 유행과 대기근의 발생이 막부 재정을 압박하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약재·피제품·물산 등의 수입은 크게 감소하였다. 또한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정권 아래 “약종 국산화 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화산(和産) 약재 개발은 주로 식물성 생약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高橋 2014, 24-34, 91-92). 한편 최대 물자 집산지인 오사카를 중심으로 ‘유키후미(雪踏: 설용 신발)’ 경제권과 식육 경제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수입 당약(唐薬)을 대용하려는 화약종(和薬種)이 생산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고대로부터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약업은 당약종과 화약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대부분은 한방의 틀 안에서 사용되었다. 따라서 약종의 형태는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주로 하고, 일부 광물·동물을 포함하는 생약이다(吉田 1962, 20).
그 밖에 명력(明暦) 1655년부터 메이지 7년에 이르는 기간의 『오사카 약종업지(大阪薬種業誌)』, 『도야마 약업사(富山薬業史)』, 『오미(近江)의 피차별 민중사(被差別民衆史)』, 그리고 화약개회소(和薬改会所)에서의 처방 초록장 및 거래 기록을 검증한 결과, “수입 당약”의 국내 유통에서는 곰의 쓸개(熊の胆), 소·곰·호랑이의 쓸개, 우황, 사향, 아교(阿膠), 영양각(羚羊角), 서각(犀角), 호골(虎骨), 위피(猬皮), 용뇌(龍脳) 등이 자주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국산 화약”에서는 여우 간(狐肝), 소 담(牛胆), 우황, 멧돼지 기름(野猪油), 곰 간(熊肝) 등 생약의 종류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大阪薬種業誌刊行會 1936, 166; 富山県 1983; 滋賀県同和問題研究所 2005, 148; 渡辺 2006, 197 및 289). 이로 인해 도축 활동은 더욱 소극적으로 변하였고, 일본의 도축·축산업은 독자적인 역사를 걸어가게 되었다.
그림 1. 본초의학에서 주요 포유류 ‘동물 생약’의 분류
鹿角: 녹각(사슴뿔)
鹿腎: 사슴 신장
鹿角膠: 녹각교(사슴뿔 아교/젤라틴)
鹿胎: 사슴 태(태아/태반 계열로 취급되는 경우)
鹿尾: 사슴 꼬리
鹿角霜: 녹각상(사슴뿔 ‘서리’라 부르는 가공물)
鹿肚石: 녹두석(사슴 위석/위장 결석류로 이해됨)
麝香: 사향(향낭 분비물, ‘사향노루’ 계열)
鹿脚: 사슴 발/다리
鹿茸: 녹용(어린 뿔)
鹿骨: 사슴 뼈
鹿血: 사슴 피
鹿筋: 사슴 힘줄
鹿脳: 사슴 뇌
鹿鞭: 녹편(사슴 음경)
鹿肚草: (표에 이렇게 기재됨)
鹿皮: 사슴 가죽
薬脂: 약지(약용 지방)
兎糞: 토분(토끼 분변)
蝙蝠糞: 박쥐 분변
童尿: 동뇨(소년의 소변)
紫河車: 자하거(인태반, 인체 유래 생약)
羚羊角: 영양각(영양 뿔)
羊毛脂: 양모지(라놀린, 양털 지방)
羊睾丸: 양의 고환
羊脳: 양의 뇌
龍骨・龍歯: 용골·용치(화석화된 뼈·치아를 약용으로 부르는 전통 명칭)
穿山甲: 천산갑(천산갑/천산갑 비늘)
刺猬皮: 자미피(고슴도치 가죽)
牛角鰓: (표에 이렇게 기재됨—일반적으로는 ‘우각(牛角)’ 계열로 이해)
牛肚: 우두(소 위/양, 트라이프)
水牛角: 수우각(물소 뿔)
牛黄: 우황(소의 담석/결석류로 쓰는 생약)
牛胆: 우담(소 쓸개/담즙)
牛睾丸: 소의 고환
黄明膠: 황명교(동물성 아교/젤라틴 계열로 분류)
牛◯線: (이미지상 ‘牛…線’으로 보이며 글자 판독이 불명확)
犀角: 서각(코뿔소 뿔)
犀皮: 코뿔소 가죽
獏鞭: 맥편(獏의 ‘편’—전통적으로 음경을 뜻하는 경우가 많음)
馬茎: 마경(말의 음경)
馬賁: 마분(馬賁—부위 명칭으로 쓰이나 한글 대응은 문맥에 따라 달라져 원문 유지)
驢・阿膠: 나귀·아교(阿膠: 보통 ‘당나귀 가죽 아교’로 알려짐)
熊胆: 웅담(곰 쓸개/담즙)
熊掌: 웅장(곰 발바닥)
鼯鼠: 오서(날다람쥐) (이미지상 이 글자가 가장 그럴듯하나, 판독 오차 가능)
海狗腎: 해구신(바다표범/물개 신장)
猪脚: 돼지 발
新阿膠: 신아교(아교의 한 종류로 표기)
猪胆: 저담(돼지 쓸개)
猪腸: 돼지 창자
猪脂: 돼지 지방
猪睾丸: 돼지 고환
猪胰線: 저이선(돼지 췌장/관련 조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임)
猪肚: 돼지 위/배(트라이프)
猪脳: 돼지 뇌
狗骨: 구골(개 뼈)
虎脛骨: 호경골(호랑이 정강이뼈)
象皮: 상피(코끼리 가죽)
象牙: 상아(코끼리 상아)
水獺肝: 수달 간
霊猫香: 영묘향(사향고양이/사향고양이 향)
각주(표 아래 설명) 번역
자료: 『중약학(中薬学)』, 『약학논집(薬学論集)』을 바탕으로 필자가 편집·작성함.
주 1) 여기서 제시한 63종의 생약 가운데, ‘사슴·사람·양·소·코뿔소·말·곰·돼지·코끼리’처럼 여러 종(동물군)에 걸치는 항목은 **점선(耳線)**으로 묶어 정리하였다.
주 2) 진한 음영(검은 바탕에 흰 글자) 표시된 생약은,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에 봉납된 **『루샤나불(盧舎那仏)에 바치는 여러 약물 장부』(756년)**에 기록된 60종 안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옅은 음영(회색 바탕) 표시된 생약은, **『요로 율령(養老律令)』(757년) 「구목령(廐牧令)」**에 그 기재가 확인되는 것들이다. 즉, 이들은 모두 나라 시대(8세기 무렵) 일본에서도 ‘동물 생약’으로 실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표의 의미 설명(핵심 포인트)
이 표는 “동물성 생약”을 **동물(종)과 부위(뿔·뼈·내장·혈액·분비물·태반·분뇨 등)**로 정리한 목록입니다. 말 그대로 축산 부생물(내장·뼈·가죽·담즙 등)을 약재 자원으로 극대화하던 전통 지식의 압축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살생·식육 기피(케가레/금육령) 담론이 강해지는 시대에도, 한편으로는 국가 문서(율령)나 쇼소인 장부에 동물 부위 약재가 제도적으로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먹는 고기”와 “약으로 쓰는 동물 부위”가 서로 다른 경로로 사회에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표의 음영은 단순 강조가 아니라, **“문헌으로 사용 사실이 확인되는 항목”**을 표시한 장치입니다.
진한 음영: 756년 쇼소인 약물 장부에 등장
옅은 음영: 757년 요로율령 ‘구목령’에 등장
가마쿠라 무가 정권을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군수(軍需) 피혁을 확보하기 위해, 가마쿠라에 거주하는 가와즈쿠리(皮作, 가죽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간토 각지에 산재한 가와즈쿠리를 지배할 권능을 부여하였다. 요리토모 사후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로 이행하며 전국이 군웅할거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石井 1979, 242-243). 전국 혼란기를 거치면서 각지의 유력 무장 영주들은 무구 제조의 필요성 때문에, 각자의 지배 영역 내 ‘부중(府中)’에 「가와타(かわた)」를 정주시키고, 영내에서 피혁 생산에 전업하게 하였다(川元 2009, 46-47). 기나이(畿内) 지역에서는 가와타 숙촌이 각 유력 사사(寺社)의 관리하에 놓였다(三浦 1990, 284).
도요토미 정권 시기 무가 사회의 주종·계급 관계와 관련하여, 특히 경작지 생산고를 파악하기 위해 각 슈고다이묘의 영내에서 실시되어 작성된 검지장(検地帳, 토지 보유 상황)에는, 명청인(名請人)에게 예속된 사람으로 파악되는 「가와타」 백성들이 피혁 상납을 의무로 지는 대신, 저택지(屋敷地)를 부여받고 영내의 폐수(斃獣) 및 피혁 지배의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安達 1980, 5 및 63; 安良城 1986, 5; 中尾 1995, 16).
에도 시대 초기, 도호쿠 일본의 ‘히카타(皮田)’ 집락(가죽을 벗김: 皮剥)에서 처리된 우마(牛馬) 가죽은 기나이 지방의 제혁업 집락으로 보내져 태고(太鼓)와 마구(馬具) 등이 제작되었고, 남는 뼈는 비료로 이용되었다. 히카타 집락의 여러 유형으로는 피혁·각·조(角爪)의 군수 무기 활용 등이 관찰된다(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161-162)²). 또한 각지에 다음과 같이 피혁 가공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国男)가 “지방의 소영토가 무기·병기의 제작 원료로서 피혁·각·조류를 영내에서 제공한다”고 한 바와 같이, 전국 다이묘(후고호조, 이마가와, 다케다, 마에다 등)와의 관련이 시사된다(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161-162).
『가가번 사료(加賀藩史料)』 게이초 14년(1609) 조에는 「피다(皮多)의 일」 등, 하리마(播磨)에서 이주해 온 가죽장이가 가가·노토의 죽은 소·말을 취급할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이상, 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161-162).
기슈(紀州) 『나가군 가리야도무라(那賀郡狩宿村)』의 기원으로부터 “피다(皮田) 부락”의 원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광명사 유래기(光明寺由来記)』 수록)(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154).
「셋쓰국 도에(摂津国図絵)」에 제시된 「시모난바 노 우치 피다(下難波ノ内皮多)」에는 「가와타 저택(かわた屋敷)」이라는 기재가 있다(寺木 2014, p.88).
이즈미(和泉)국의 「아소지마무라(麻生嶋村)」 및 「미나미오지무라(南王子村)」에는 폐우마를 처리하는 단나바(旦那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三浦 1990, 285; 村崎編 1976, 46).
한편 제혁업 집락(피다)에서는 가마쿠라 막부 말기부터 “가죽 무두질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제혁업이 생업으로 확립되었고, 무로마치·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시대에 성행하였다(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162-164). 막부의 통제 권력하에서, 무명(無名)의 장리(長吏) 두목이었던 「단자에몬(弾左衛門)」은 피혁 납입의 책임자로서 가와즈쿠리로부터 피혁을 모아 들이고, 가공 또한 휘하 사람들에게 맡겼다.
「단자에몬 유서서(弾左衛門由緖書)」의 증문(証文)에 따르면, 마치부교(町奉行) 직속의 가신으로서 「에타두(穢多頭) 단자에몬」은 에도 막부로부터 아사쿠사(신마치)라는 특별한 지역을, 에도 ‘마치와리(町割)’ 과정에서 배정받았다. 또한 간토의 천민(賤民)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기반 위에서 값싼 노동력을 일방적으로 모을 수 있었고, 피혁·등심(灯心)·오사(筬)·약(薬) 등 각종 전매 산업을 독점함으로써, 단자에몬은 막대한 이익(3천 석 상당)을 거두었다(部落解放同盟東京都連合会 홈페이지 및 荒井 1979, 97).
단자에몬 지배하의 장리 소두(小頭)들에 의해, 제약·매약(売薬)을 업으로 삼는 부락에는 약방이 많은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무사시(武蔵)국 요코미군 와나무라(和名村, 사이타마현 히키군)를 관할하던 스즈키 가문(鈴木家, 甚右衛門)은 약의 제조·판매 업무도 수행하였다. 스즈키 가문이 취급한 각종 동식물 약 가운데 “나라(ならい)약”은 말의 내장으로 제조한 약종이었다(東日本部落研究所編 1994, 97 및 107).
또한 사가미(相模)국 나카군(中郡) 오이소마치(大磯町)의 하치로에몬(八郎右衛門)은 약방으로 유명하였다. 『신편 사가미 풍토기고(新編相模風土記稿)』에 실린 “셋운니(截雲丹)”, “쓰헤이산(通閉散)”은 동물의 내장으로 제조한 통경제·정력제 등으로, 에도성 오오쿠(大奥)와 여러 다이묘의 내실(奥)로부터도 자주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菊池 1966, 274-275).
이로부터 폐우마 가죽 만들기(斃牛馬皮作り) 장인 집단을 중심으로, 피혁은 물론 약종, 더 나아가 병량(兵糧)에도 쓰이는 동물의 가죽·육류·내장 등의 유통 루트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분세이 8년(1825)의 스케자에몬(助左衛門) 「간조노 히카에(勘定之控)」에 따르면, 폐우마는 가죽뿐 아니라 장주(場主)의 자유 처분에 맡겨진 꼬리·발톱·내장 등으로도 이익을 얻고 있었다(小丸編 1979, 273-274).
간사이에서는 「가와타」에 대한 군수 목적이 약화되는 가운데, 일상적 음식에 대한 양생·약선적 관심이 높아지는 한편, 「가와타」 마을의 피혁 관련 업이 발전하였다. 특히 신발류 피혁업은 수요 증가와 더불어 ‘유키후미(雪踏, 설용 신발)’ 경제권 등이 형성되며 상당 규모의 생산이 이루어졌다(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248-249).
나아가 식육촌의 형성은 교와(享和) 연간(1801~1804)에 나카카와치(中河内)에서 발생하였다. 「가와치(河内)국 단보쿠군 사라이케무라(丹北郡更池村)에서 날마다 사카이(堺)의 마치와 미나미오지무라로 쇠고기를 판매하러 나가는 모습이 근세 후기 식육업의 양상으로 묘사되어 있다(のび 2009, 101; のび 2007, 35-57; のび 1998). 또한 폐우마에 관한 가와치국 호조무라(北条村) 『가에이 4년(嘉永四年) 우마 이름할당 기록장(牛馬名前割方記録帳)』 문서에 따르면, 발·가죽·힘줄뿐 아니라 센마이(胃)·오비(腸) 등 내장도 식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된다(佐々木 2004, 292-293).」
에도 말기부터 식육·피혁·약종 등 축산물 유통은, 개별 영주적 형태로 독자적으로 전개되어 갔다(部落問題研究所編 1978, 253-255). 예컨대 히코네번(彦根藩) 이이(井伊) 가문은, 에도 후다이(譜代) 다이묘의 필두로서, 소의 도살과 쇠고기 생산을 유일하게 공인받고 있었다. 오미(近江)국의 흑화우(黒和牛)는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과 깊은 관련을 지니며, 옛 조선계의 황우였다고 한다. 이이 가문은 쇼군가와 유력 다이묘에게 ‘양생육(御養生肉)’으로 쇠고기 된장절임을 헌상하였고, 공가 귀족과 무사들 사이에서도 “약먹이(薬喰い)”(반본환/へんぽんがん) 및 약종(소의 고환, 소 담의 우황)으로서 소의 고기와 내장 등이 섭취되었다. 또한 생산된 피혁은 진다이코(陣太鼓)용으로 막부에 헌상되었고, 타 번에도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福原 1956, 32-36).
나라 시대에 들어 「육식 금지령의 조(詔)」가 내려진 뒤에도, 멧돼지를 사육하는 부서인 이카이베(猪飼部)나 도축(と畜) 등이 존재하였다(加茂 1976, 107). 또한 짐승고기 섭취를 죄악시하는 사상이 귀족 계층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확산된 뒤에도, 케가레 의식을 피하기 위해 약초 채취와 멧돼지·사슴(猪鹿) 사냥을 뜻하던 “약렵(薬猟)”이라는 말이(宇陀市 홈페이지) 야생 짐승의 포획이라는 의미로까지 확대되었고, 짐승고기의 식용을 “약식(薬食)”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민간에서는 여전히 ‘숨은 고기 먹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컨대 『곤자쿠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에는 승려가 병에 걸렸을 때 “약이(薬餌)”로 소·말 고기를 먹었던 사실이 나타난다(中村 2011, 41 및 49).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자에몬(弾左衛門)의 시대에는 동물의 가죽과 육류·내장 등의 유통 루트가 확립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의 내장 식용 기록을 보면, 동물의 종류에 따라 식육 기피의 정도가 서로 달랐음을 아래의 사실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소·말의 식육은 병량(兵糧)이나 약종(薬種)으로서 무가(武家) 사이에 확산되어, 때때로 섭취되어 왔다. 예컨대 가가(加賀)국의 말고기 섭취나, 우에스기번과 센다이번 번주에게 전해지는 쇠고기 요리가 기록되어 있다. 내장 식용에 관한 구체적 사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변방(異域)이었던 에조(蝦夷)와 류큐(琉球)의 식육 문화에 대해서는, “근년(近年) 소의 힘줄, 니노카와(にの皮: 미노), 호소하타(ほそハた), 고시(こし), 발톱(爪) 등, 즉 각각의 아킬레스건, 미노(센마이=위), 장, 비장 등”과 같은 내장 부위를 해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배할 권리가 확립되어 있었고, 식용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原田 2009, 43 및 48).
멧돼지·사슴의 짐승고기 섭취는 사냥과의 관계로 산촌 농민 및 무사·번사 계층에까지 미쳐, 고기와 내장이 섭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돼지·양의 식육은 특히 이른 시기부터 에조와 류큐에서 전통 식문화로 일반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류큐국이 밀무역을 하였던 점과 맞물려, 사쓰마(薩摩)는 예로부터 돼지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고도 하며, 막말(幕末)의 사쓰마번과 지사(志士)들 가운데 다수는 식육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초기의 유일한 외국 접점이 중국인과 조선인 거류지가 있던 나가사키였다고 한다(이상, 原田 2009, 40 및 42). 예컨대 에도 막부의 부엌(御台所)에서 이국의 사절에게 제공하는 향응 요리에 대해서도, 나가사키에서 오사카를 경유해 “생돼지(なま豚)”를 조달하였다고 전한다(高正 2010, 116).
분카·분세이(文化文政) 연간(1804~1829) 이후, 스페인·포르투갈계 남만(南蛮) 유래의 짐승고기 섭취 실태에 관하여, 농민이 조총으로 포획한 농해수(農害獣)를 에도에 운반하여 곰·늑대·너구리·족제비·키네즈미(来鼠)·원숭이·개·토끼·수달·고양이 등을 조리하는 “모몬지야(ももんじ屋)”와, 짐승고기 및 돼지전골(豕鍋) 가게가 다수 존재하였음이 확인된다(『모리사다만코(守貞謾稿)』 수록). 이들 짐승의 내장도 식용으로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石川編 2009, 119; 武光 2001, 195).
식육 기피 관념은 비교적 약화되어 있었으나, 아직 공공연히 도살하고 그 고기를 먹을 수는 없었으므로, 금기를 피하기 위해 이를 “약먹이(薬喰い)”라 하고, 멧돼지는 “산고래(山鯨)”라 칭하며, 사슴고기는 “단풍(紅葉)”이라 부르는 등 우회적 호칭이 사용되었다.
중세를 거치며 점차 침투한 근세 일본 사회의 식육관은, 다이묘의 규모를 영지의 쌀 수확량으로 표현하는 특이한 석고제(石高制) 사회 시스템과 결합하여, 다이묘 지배하의 폐우마(斃牛馬)가 케가레 의식에 근거한 차별로 직결되는 형태로, 식육이 부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금기와는 달리, 현실에서는 꽤 넓은 범위에서 고기가 섭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原田 2009, 165).
이는 교호(享保, 1732년), 덴메이(天明, 1782년), 덴포(天保, 1833년) 대기근 시기에, 기근 대응책으로서 짐승고기 섭취 풍조가 전개되었다는 배경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다만 어떠한 경우이든, 짐승고기를 먹는 문화는 케가레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이(薬餌)”나 “약먹이(薬喰い)” 등 직접적 호칭을 피하는 방식으로, 제한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오키나와에서는 1429년 류큐 왕국 성립 이전, 군웅할거의 전국 시대에 해당하는 중산(中山) 왕국이 명(明)나라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며, 중국(1374년)·조선(1389년)·동남아시아(1420년)를 잇는 중계무역을 기반으로 한 ‘대항해 시대’를 확립하고 있었다. 이 대항해 시대는 류큐 왕국 성립 이후에도 지속되어,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일본과의 관계를 확립한 16세기까지 류큐의 번영을 가져왔다(野村 2012).
또한 명과의 교류 이전에도, 함순(咸淳) 연간(1265~1274)에 일본 승려 선감(禅鑑)이 류큐에 건너와 극락사를 창건함으로써 불교를 전파하였고, 13세기에는 일본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오키나와의 식문화는 여러 나라와의 교류 속에서 류큐 왕조 시대에 중국의 책봉사(冊封使, 1404년 이후)나 사쓰마(薩摩)의 재번봉행(在番奉行, 1631년 이후) 등을 접대하기 위한 독특한 요리가 생겨났고, 조리 기술과 예법이 세련되어 궁정 요리로 확립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선감이 오키나와로 건너왔을 때에도, 일본 본토에서 나타난 식육 금지의 영향이 오키나와에 그대로 이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수리성 공원 관리센터 홈페이지 및 오키나와현청 홈페이지).
그 후 1609년 사쓰마번의 침공을 받아 일본의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으나, 중국에 대한 조공은 계속되었다. 사쓰마번의 지배로 1697년 소와 말의 도살이 금지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책봉 관계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고, 책봉사가 빈번히 내류(来琉)하였으므로 이를 접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돼지와 염소의 육류 요리가 발달하였다. 이처럼 일본 본토와 달리 식육 금기(禁忌)의 영향이 거의 없었고 식육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특히 메이지 이후 돼지고기 식습은 더욱 뿌리 깊어졌다.
참고로 1883년(메이지 16년) 시점의 현내 가축 두수는 돼지 56,609두, 염소 36,507두, 소 20,153두, 말 14,581두였으며, 돼지와 염소라는 ‘두 큰 가축’이 중심을 이루어, 돼지 도살 두수는 전국 1위에 이르렀다(金城須美子 2015; 류큐대학 홈페이지).
다음으로 오키나와에 대한 본초학의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키나와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약식동원(薬食同源)”과,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전해졌다는 “의식동원(医食同源)”이라는 사고와 관습이 존재한다. 오키나와의 양생식이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오키나와 고유의 양생식으로 일상화된 것은, 식(食)에 대한 종교적 금제가 거의 없었고, 먹는 것에 대해 편견이나 차별 의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래 오키나와 양생식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식료(食療)·본초 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류큐의 본초서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고젠본초(御膳本草)』는 도카시키 페친(渡嘉敷親雲上) 쓰우칸(通寛)이 1832년(덴포 3년)에 편찬하여 왕부에 헌정한 것이다.
『고젠본초』를 들여다보면, 오키나와의 양생식이 중국의 식료·양생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도카시키 페친 쓰우칸은 1817년(가경 22년) 23세 때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베이징 대의원에서 중국 식의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장원(張垣)에게 배웠고, 이후 류큐 왕부의 시의두(侍医頭)가 되었다.
1824년(도광 4년)에는 다시 베이징에 유학하여 베이징대학 의원장 장수청(張水清)을 사사하였으며, 다시 오키나와로 돌아와 왕가 인물들의 치료를 맡았다. 특히 당시 병약하였던 제17대 쇼코왕(尚轣揄)의 치료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고젠본초』가 쓰인 1832년은 덴포 대기근의 시기였으므로, 본래 왕부에서만 활용되던 고젠본초의 지식이 당시 의사들을 매개로 서민 사회에까지 확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한방의 영향을 짙게 남긴 것으로 “이류보류(以類補類)”라는 개념이 있다. 곧 “유사한 것으로 유사한 것을 보한다”는 뜻으로, 동물(돼지)의 조직이나 기관으로 그와 유사한 인체의 조직·기관을 보할 수 있다는 사고이다(尚 2008; 오키나와현 축산진흥공사 홈페이지).
즉 오키나와의 돼지 식육 문화는 단지 돼지고기를 먹는 데에 그치지 않고, 버릴 곳이 없을 정도로 귀, 얼굴가죽(面皮), 갈비뼈(肋骨), 내장(위장·폐·간·췌장·신장 등)과 발, 혈액에 이르기까지 능숙하게 활용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原田 2009, 278). 『고젠본초』에는 염소에 대해서도 고기뿐 아니라 간·폐·신장·위·혈액으로 나누어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며, 개와 소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야생 동물류로는 멧돼지와 사슴이 확인된다(原田 2009, 283).
이상의 문헌 조사에 근거하여, 일본에서의 식육 문화 역사를 「1. 서론」에서 항목별로 제시한 여섯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아스카 시대의 육식 금지령 이전에도, 동물을 죽여 그 ‘피’로 벼 종자를 씻으면 벼의 싹이 빨리 난다는 이야기, 즉 “도살하다(屠る)” = “이삭을 흔들다(穂振る)”의 어원에서 “오곡풍양(五穀豊穣)”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바와 같이, 도축 사상은 궁중과 일반 서민의 생활에도 뿌리내리고 있었고, 식육도 행해졌다. 동시에 그 시기 ‘피’는 케가레의 대상이 아니었다.
(2) 불교의 살생 금지와 고대 신도 사상이 서로 결합함으로써 「케가레」의 관념이 형성되었고, 그 대상은 인간 및 동물의 “출산·죽음·피”로 향하였다. “육식 금지”와 “케가레”에 관한 규정이 법제화되는 한편, 그 의식은 점차 서민에게까지 침투하였으며, 그러한 상황은 에도 시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피”에 대한 케가레 의식이, 동물의 혈액을 먹지 않고 폐기하는 습관을 가져온 것으로 생각된다.
(3) 중국의 본초학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의 내장을 포함한 축산 부생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나, 일본에서는 식육이 금지되어 있었던 탓에 ‘화본초(和本草)’가 식물 본초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점이 부생물 부위가 약선(薬膳)으로 사용되는 것을 억제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무가 사회에서 피혁은 무구(武具)로서의 가공 필요성 때문에, 폐우마(斃牛馬) 처리를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조직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장리 두목 등에게는, 부생물로 생성되는 동물 유래 생약 및 육류의 제조·판매 권한이 부여되었고, 그 결과 일부 무가 및 귀족에게 육류와 내장 등이 흘러들어가는 유통 경로가 확립되었다.
(5) 식육이 공적으로 금지된 가운데서도, 숨기거나 “약식(薬食)”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케가레를 덮는 듯한 논리를 붙임으로써 식육은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기근 시기에 부득이하게 고기를 먹는 경우, 또는 무구 등에 쓰이는 가죽을 만들 필요성 때문에 부생물로 유통된 육류·내장은 섭취되었으나, 그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6) 류큐 및 류큐 이전의 중산국은 중국·조선·동남아시아를 잇는 중계무역 거점으로 발전하였고, 각지의 다양한 식문화를 수용한 결과, 오키나와에서는 돼지·염소 고기를 비롯하여 동물의 내장과 혈액까지 섭취하는, 고래의 일본 본토와는 다른 식문화가 형성되었다.
여기서 (1)~(6)의 답을 종합하면서 “일본에서는 왜 동물의 내장과 혈액을 활용하지 않고 폐기하게 되었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만 그에 앞서, 본고에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고 (1)~(6)의 물음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매우 중요한 점을 첫째로 짚어 두고자 한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의 육식 금지령(675) 이후 에도 시대 말기까지, 1,200년에 걸쳐 식육을 기피하는 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1)의 답에서 보았듯, 아스카 시대 이전에는 사냥이 사람들의 생활과 궁중에도 뿌리내리고 있었다. 또한 (5)의 답이 보여 주듯, 일본에서 동물의 내장을 먹는 습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식육 기피 문화가 강고했던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도 “약렵(薬猟)”의 명목 아래 제한적이나마 행해지고 있었다.
둘째로, 혈액을 먹지 않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2)의 답이 시사하듯, 혈액이 「케가레」 관념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이 『고닌식(弘仁式)』이나 『엔기시키(延喜式)』 등에서 법제화되는 과정 속에서, 귀족과 신직에서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침투해 갔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1)의 답에서 보았듯, 육식 금지령 이전에는 “피”가 케가레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은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셋째로, 동물의 내장을 폐기하게 된 이유이다. (3)의 답에서 보듯, 중국 본초학이 동물의 내장을 포함한 축산 부생물을 최대한 활용해 온 데 비해,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일본의 화본초가 식물 본초가 되었고, 이 점이 대만이나 중국처럼 동물 내장이 약선으로 사용되는 것을 억제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5)의 답이 시사하듯, 육식 금지령 아래에서도 육류뿐 아니라 내장 등이 유통되었다는 사료를 고려하면, 육식 금지령 자체가 곧바로 내장을 ‘폐기’하게 만든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결국 “왜 동물의 내장을 활용하지 않고 폐기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을 에도 시대까지의 식육 문화사 속에서 찾아내지는 못했으나, 오히려 그 답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식육 문화사 속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본고는, 필두 저자가 대만과 일본의 식육 문화를 비교하고 설문 조사를 수행한 결과, 일본에서 축산 부생물이 활용되지 않고 폐기되는 요인을 식육 문화사라는 관점에서 밝힌 것이다. 다만 활용한 서적과 기존 연구는 이미 쓰인 2차 자료이며, 그 안에 완전히 새로운 발견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방대한 2차 자료를 수집·정리한 결과, 개별 문헌·자료만으로는 그려낼 수 없었던 에도 시대까지의 일본 식육 문화사를 독자적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은 본 연구의 큰 성과라고 확신한다. 또한 제5장의 중국어 문헌에 근거한 부분은 일본 국내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문헌이나 연구 성과에 기반하여 새로운 지견을 제공하는 것이며, 이 점 또한 본고의 성과로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향후 과제를 언급한다. 서두에서 말했듯, 본고가 제시한 연구 성과는 일본 식육 문화사 가운데 에도 시대 말기까지의 범위에 한정된다. 필자는 메이지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는 범위에 대해서도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메이지 이후의 역사와 함께, 본고가 다룬 내용, 더 나아가 뒤에서 언급하는 설문 조사까지 종합한 해석은, 본지를 포함하여 다른 장에서 발표하고자 하며, 이를 첫 번째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동물의 내장은 적어도 전전(戦前)까지는 폐기되지 않고 활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이 필자의 연구에서 밝혀졌으나, 전후(戦後) 어느 시점에 어떤 경위로 폐기되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명확히 하지 못했으므로, 이 점을 향후 과제로 위치 짓고자 한다.
둘째 과제로는, 서두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필자가 2015~2016년 및 2020~2021년에 일본 국내의 식육 처리 사무조합, 식육센터, 축산식육공사, 시·현, 공영 도축장 병설 식육시장 등을 대상으로, 축산 부생물 자원의 폐기율 및 지역별 이용 실태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 설문 조사에 근거하여 각 지역 식육 처리장별로 부생물 부위마다 서로 다른 폐기율 등을 통계적으로 처리하고, 그 분석 결과를 제시하는 일이 두 번째 과제이다³).
요약: 총괄부는 (1) 금지령 이전의 도축·혈액 인식, (2) 불교+신도의 케가레가 ‘출산·죽음·피’에 대한 금기를 법제화해 혈액 폐기로 이어졌을 가능성, (3) 중국과 달리 일본 본초가 식물 중심으로 굳어져 내장 활용이 약화된 점, (4) 피혁·군수 체계가 한정적 유통망을 만들었음, (5) 금지 속에서도 ‘약식’ 명목 등으로 제한적 섭취가 있었음, (6) 류큐는 별도의 식육 체계를 형성했음을 정리한 뒤, “내장 폐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에도 이전이 아니라 메이지 이후(특히 전후)**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향후 과제로 설문 데이터 분석을 제시한다.
이번 도축장 및 야생 조수(鳥獣) 처리장에 대한 면담 조사와 관련하여, 현장 담당자 여러분과 관계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번 심사(査読)에 참여해 주신 레퍼리(심사위원) 선생님들로부터는 건설적인 의견을 받아, 원고를 완성본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셨다. 이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동물의 “죽음” 또는 “피”에 대한 “케가레(穢れ)” 관념이 일본의 식육 문화와 본초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에 주목하여, “케가레” 관념이 제도상 또는 귀족·무가 사회, 그리고 서민의 생활 속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침투해 왔는지를 기존 문헌과 연구에 근거해 제시한다. 덧붙여 기존 문헌과 연구 가운데에는 “케가레”를 “부락 문제” 및 “피차별” 문제와 관련지어 논한 것이 적지 않다. 다만 “부락 문제”와 “피차별” 문제는 본고의 목적과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필요 이상의 언급은 삼가고자 한다.
본 절에서는 많은 지명이 제시되는데, 그 대부분은 국회도서관 소장 문헌에 근거한다. 다만, 부락문제연구소 편(1978)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도치기현립도서관과 오이타현립도서관에는 소장되어 있다.
“呂·小泉·石田(2024)”로서 2024년 2월에 게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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