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통 정신에 서양 기술을 더해 일본의 고유문화로 재해석하다는 화혼양재는 일본을 현대화할 수 있게 한 이념이다. “돈가스 한 접시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맛 읽어주는 여자 모리스타 노리코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돈가스라는 일본음식과 우리나라의 치킨과 삼겹살이 많이 닮은 것 같았는데 용기가 없어서 표현하지 못했는데 이 글을 빌려서 필자도 주장하고 싶다.
“치킨과 삼겹살은 압축성장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오롯이 담고 있다.”
돼지는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우와 쌀의 수탈을 위해 쇠고기 대체육으로 이용됐고, 더불어 비료 생산을 통해 쌀 증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양돈업은 장려되었다. 제사에 희생으로 쓰이는 가축이었지 식용으로 그렇게 인기가 있지 않았다. 아마도 조선시대에 돼지고기보다 인기가 있었던 고기는 쇠고기가 일등이고 이등은 개고기가 아닌가 한다. 조선 후기에 육식량이 늘어서 한성에 저육전 돼지고기 전문 판매점
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1920년 조선총독부는 권업모범장을 앞세워 버크셔와 재래돼지의 누진 교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해방 이전까지 전국에 70% 이상이 버크셔와 재래돼지의 교배에 의한 개량종이었다.
해방 이후 분단된 조국 남쪽에는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역우였던 소마저도 너무 부족한 형편에 해방의 기쁨으로 흥청망청 고기를 먹어되니 쇠고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난 방안이 도시 근교에 돼지와 닭을 사육하는 것이었다.
농촌에서는 돼지를 부업으로 사육했고, 도시근교에서는 전업화를 추진했는데 지금 생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도시 내 공터만 있으면 돼지를 사육해다 한다.
5.16 구데타 이후 계획 경제하의 압축 성장기에 역시 한우고기에 대한 국민적 욕구를 잠재우기 위한 대체품으로 또 외화 벌이를 위한 수출상품으로 양돈이 장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반까지 별다른 변화와 큰 성장을 보이지 못했다. 양돈업은 1970년대 중반 압축성장의 성과가 차차 나타나면서 육류 소비가 급증하게 되고 돼지고기가 새로운 수요를 감당하며 점차 산업화 되어가기 시작한다.
여기에 1971년 일본이 돈육 수입 자유화가 되면서 지리적으로 근접한 우리나라에서 많은 부분육을 수입하게 된다. 인건비가 싼 한국은 일본식 정형 방식의 학습이 가능했던 이유 등으로 일본 수출 경쟁력 확보가 가능했다. 산업화된 양돈산업은 배합 사료의 의존도가 높아지고 거세 등 과학적 관리 기술이 도입되어 돼지고기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이취가 극감 하게 된다. 또한 1970년대 대일 일본 수출을 하며 습득한 부분육 가공 기술이 확산되면서 부분육 가공장들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롯데햄과 백설햄 등 본격적인 축육햄 소시지 공장들의 건설로 육류 소비가 확대된다. 1977년 육류 파동으로 한우 소비자 가격이 두배로 인상되어 당시 유행하던 한우불고기와 한우로스구이 대신 돼지고기 삼겹살로 대체되게 된다. 이것이 지금의 삼겹살 구이의 시작이다.
우리가 삼겹살을 미치게 좋아하는 건 삼겹살은 인스턴트 라면이나 맥도널드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 우후죽순 생겨났던 냉동 삼겹살집의 서비스 형태를 잘 살펴보면 냉동삼겹살은 미리 준비해 두고 손님이 주문하면 냉동고 문만 열어서 준비된 삼겹살을 손님 테이블에 가져다주면 되는 패스트푸드였다.
역사 속에서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던 식생활 경험이 별로 없었고 로스구이로 양념 없이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건 1970년 중반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과거의 돼지고기와 오늘의 돼지고기는 확연한 맛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맛의 차이라기보다는 냄새나는 돼지고기와 냄새가 없는 돼지고기라고 구분해야 한다. 과거의 돼지고기는 잔반 사육과 비거세 등으로 이취가 심해 지금처럼 로스구이 스타일로 소금만 쳐서 먹기 거북한 고기였다. 그런 돼지고기가 1970년대 중후반 양돈기술의 발전과 산업 인프라의 확충으로 맛있는 서민의 고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양돈 농민들 노력의 결과다.
삼겹살 식당들이 왜? 1970년 중 후반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우리가 삼겹살을 좋아했을까?
1971년 일본이 돈육 수입자유화로 우리나라는 1972년 오백만 불이라는 놀라운 대일 수출실적을 거둔다. 정부는 물론이고 삼성 등 기업과 농가들이 돼지 사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상당량 일본으로 수출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부가 수출을 허가하고 통제하였다는 것이다. 국내의 물가 안정이 최우선이던 박정희 정부는 설과 추석 등 육류 소비가 늘어 가격이 인상될 조짐이 보이면 언제든 수출을 중단하고 수출물량을 국내에 유통시켰다. 1977년까지는 계절적 일시적 수출 통제였으나 1970년대 중후반 한우 등 육류 파동이 발생하자 대일 돈육 수출을 전면 중단하고 국내 물가 안정에 국내 양돈 생산 전체량을 투입하게 된다. 아마도 이 시기에 삼겹살은 서민의 대표고기가 되었을 것이다.
수출이 다시 시작된 것은 1985년이었다. 한우 불고기는 가족 외식으로 한우 로스구이는 저녁 직장 회식으로 즐겼던 1970년대 1978년 돈육과 쇠고기 가격이 모두 두배 이상 상승하게 되지만 그나마 돼지고기는 사 먹을 수 있는 가격 선을 유지하면서 한우 로스구이식당은 삼겹살 로스구이 식당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삼겹살이 유행하게 된 배경이다.
삼겹살을 지금처럼 먹기 시작했던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대일 돈육 수출은 거의 없었던 시기 시작됐다. 공동집필자의 김재민 실장이 정리해 준 것과 같이 수출용 돼지가 수출 중단으로 국내 시장에 유통될 때 냄새가 나지 않는 삼겹살이 우리 대중에 소개가 된 것이다.
삼겹살은 우리의 압축성장과 억압의 상처 속 현대화를 오롯이 상징하는 음식이다. 전통적 사회와 현대화되는 산업사회의 혼돈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게 해 준 고마운 음식이다.
아메리카의 노예였던 흑인들의 soul food가 프라이드치킨이었다면 현대 한국인의 soul food, 위로의 음식은 삼겹살 로스구이다.
삼겹살은 “우리가 남이가” 하던 시절의 종교 의례였을 거다. 용서와 화합의 역사를 만드는 밤마다의 의례였다. 영국인의 홍차를 마시고 미국인은 카페인 강한 커피를 마시면서 열심히 일해서 미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이라는 압축 경제의 성장은 삼겹살 힘으로 이룩한 삼겹살의 기적이다. 근현대 130년 힘들고 억압받고 분단되고 싸웠던 우리 민족에게 힘이고 위로였고 현대화의 에너지였다. 고향 잃은 사람들에게 향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