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육의 근현대 소비와 수출의 시작


식육의 근현대 소비와 수출사


식육 마케터 김태경 Ph.D


역사적으로 중국은 돼지고기를 선호했고 한국은 소고기를 좋아했다. 중국은 저량안천하(猪粮安天下)라고 해서 돼지고기와 식량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돼지고기를 그만큼 많이 먹는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밥의 쇠고깃국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집 메뉴판에서 볼 수 있는 음식 중 육(肉)자가 들어가면 돼지고기 요리를 말한다. 탕수육, 동파육 등 육자가 들어간 음식은 돼지고기로 만든다. 반면 라조기, 깐풍기, 기스면 등 기(鷄) 자가 들어가면 닭고기 요리다. 닭을 뜻하는 계(鷄)를 중국에서는 기라고 읽는다.


중국은 집집이 돼지를 키웠다. 집을 뜻하는 한자어인 가(家)는 돼지를 뜻하는 해(亥)가 들어가 있다. 그만큼 많이 길렀고 많이 먹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현대에 와서도 세계에서 돼지고기를 제일 많이 먹는 나라이다. 삼겹살의 시작 김태경/연승우저 팜커뮤니케이션 2019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는 육식이 성행하였다고 다들 생각하지만 필자는 좀 다른 견해를 가진다.


생각보다 우리민족이 다문화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나 부여의 북방계는 돼지고기에 대한 선호가 신라나 벽제의 한수 이남 보다 더 높았다. 1909년 조선 총독부의 각도별 돼지사육 두수를 인구대비로 나누어 보면 한수 이북지역이 돼지를 이남지역보다 두배 더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생산지가 곧 소비지였으니 한수 이북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이남 사람들보다 더 선호했다는 걸 말해 주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된다.


흔히 조선시대 돼지고기 소비가 많지 않았다는 근거로 이야기하는 책이 음식디미방 조선시대의 식품 조리서는 주로 남성에 의해 한문으로 쓰였고, 중국의 문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경우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 여중군자(女中君子)로 불릴 정도로 덕망이 높은 여성이, 오랫동안 가정에서 실제로 만들어왔거나 외가에서 배운 조리법 백여 가지를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것도 많은 여성들이 쉽게 읽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한글로 정리한 책이 있었다. 1670년(현종 11년)경에 정부인 안동 장씨라 불리던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이 남긴 『음식디미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음식디미방 [閨壺是議方] - 1670년경 (음식고전, 2016. 10. 17., 한복려, 한복진, 이소영)


의 요리수가 돼지고기 요리는 두가지뿐인데 개고기 요리는 열가지가 되는 것을 보고 조선시대에는 돼지고기를 잘 안 먹었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음식 디미방은 안동지방의 양반가의 요리책이다. 돼지는 민중과 여인의 농가 부업이었기에 역사서나 요리서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역사는 가난한 민중과 여인에 대해서는 늘 인색하다.


조선의 돼지는 작았다.


조선 시대에 사육한 돼지품종은 대부분 흑돼지로 한반도의 기후에 적응하고 번식력도 좋았지만 극소형종으로 체구가 너무 작았다는 단점이 있다. 재래돼지 체구는 22.5kg부터 몸통이 큰 돼지도 고작 32.5kg 정도로 작아서 고기로 쓰기에는 부족했다. 삼겹살의 시작 김태경/연승우저 팜커뮤니케이션 2019


농사에 필요한 비료를 만들고 농가 부산물을 청소하는 채비동물이고 청소동물이었다.


조선반도에 서양종 돼지가 처음 들어 온 건 1885년이다. 고종이 만든 농무목축시험장에 미국으로부터 8마리의 돼지가 들어 온다. 1902년까지 무럭무럭 잘 자랐다. 어느날 일본에 의해서 독살 당하게 된다. 그리고 1903년 일본이 다시 요크셔와 버크셔를 가져 온다.


일제 강점기에 저술된 조선농업발달사에 1903년 일본에서 서양종 돼지를 수입한 기록만 남아 지금도 네이버등에 1903년이 서양종 돼지가 수입된 해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일본은 생산성이 좋은 요크셔를 식민지 조선 농민에게 보급해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백색종인 요크셔에 대한 조선 농민의 반감이 커서 흑돼지인 버크셔를 1920년대 본격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한다. 그 당시 산업화가 되어 가던 일본 농촌에 일손이 달렸다. 조선우는 당시 부림소로 세계최고 였다. 지금으로 말 하면 성능 좋은 트랙터였다. 또 1920년경에 일본은 경제가 성장하고 육식량이 늘어 쇠고기 부족현상이 나타난다. 조선우는 쇠고기로의 가치도 매우 높았을거다. 한편으로 다른 해석을 하면 일본이 본격적으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한 것이 1920년경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돈가스, 고로케, 카레 라이스등 일본의 대표적인 돼지고기 요리가 대중화 되는 시기가 1920년경이였다. 일본에서 돼지고기의 소비가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에서의 돼지 개량을 장려한다. 일제 강점기 150만두의 조선우를 강제로 이출해 간 일본은 버크셔와 조선의 재래돼지 교잡 장려에 성공한다. 1942년 해방 전까지 식민지 조선의 70%의 돼지가 버크셔와 재래돼지의 누진 교잡종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래돼지는 거의다 이 당시의 교잡종 돼지를 의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의 인구가 2배로 늘어난다.


1909년 소의 사육두수는 628,142두였던 것이 1940년 1,740,390두로 늘어난다.


돼지 역시 1909년 576,428두였던 돼지는 1940년 1,320,230두로 늘어난다.


도축두수는 소는 1909년 167,396두 돼지는 115,004두 1940년 소의 도축두수는 302,925두 돼지는 544,814두 대략적으로 사육두수와 도축 두수를 감안하면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는 소의 경우 부림소, 일소였기 때문에 한 6년쯤 키웠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돼지의 경우는 도축두수가 사육두수보다 현저하게 적게 나타나서 돼지고기 소비가 적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도 있지만 소는 국가에서 통제를 해서 상당히 정확한 도축두수를 일제 강점기에도 알 수 있었다. 돼지의 경우는 농가에서 자가 도축을 하고 상업적인 유통소비의 형태보다 추렴등 마을의 관혼상제때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통계가 매우 부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1940년만큼의 소,돼지 사육두수를 남한에서 회복한 것이 1970년대인 걸 보면 해방이후 혼란한 시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역사속에서 축산 기반 역시 상당한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 되고 논농사가 중심인 남한에서의 소는 부림소, 역우, 일소로의 기능이 최우선이 되어야 했다. 당시 남한내 50만두의 소가 있었다. 한해에 30만두의 일소가 필요했고 한 20만두씩 잡아서 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년만 열심히 잡아 먹으면 일할 소가 부족한 형편이어서 도시근교에서 돼지와 닭의 사육을 장려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 양계산업과 양돈산업 발전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1948년 남한 정부가 수립되자 마자. 바로 양돈, 양계 장려 정책을 발표한 걸 보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우의 일소와 고깃소로서의 이런 야누스적인 이중성은 1970년대까지 아니 1980년대까지도 늘 고민되어 온 문제였다. 1970년대 경제가 성장하면서 쇠고기의 소비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지만 소는 일년에 송아지를 한 마리만 낳을 수 있고 도축을 하기 까지 최소 18개월이상 사육을 해야하기 때문에 수급상에 문제가 생겨서 1976년 쇠고기 파동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처럼 수입육을 마음대로 수입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돼지고기는 냄새가 심해서 쇠고기보다 인기가 없었다. 경제성장과 일본 수출에 힘입어 1970년대 양돈업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양돈기술의 발달로 냄새가 덜 나는 돼지고기를 생산 할 수 있게 되면서 급등한 쇠고기의 자리를 돼지고기가 대신하게 된다. 당시 쇠고기의 요리는 로스구이가 인기였는데 그 쇠고기 로스구이에 고기만 돼지고기 삼겹살로 대체가 되어 오늘날 전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삼겹살 구이가 시작된다.


1970년대말 1980년대에 시작된 삼겹살 구이는 지난 40년간 우리나라 육류 소비의 대표가 되었다.






양돈산업 변천사.jpg










돼지와 돼지고기 수출의 시작


우리나라의 양돈업은 1970년대 초까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아니 그 이전부터 시작된 부업농의 개념에 약간의 전업규모 농장으로 유지되어 온다. 1950,60년대 현대화된 서구의 양돈기술은 제주의 이시돌목장 임피제 신부에 의해서 제주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육지에서 1973년 용인 자연농장 양돈장이 기업적 양돈업의 대표 농장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1960년대에도 규모있는 양돈장의 조성이 이루어졌지만 그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이런 영세 규모에서도 돼지와 돼지고기 수출이 이루어진다.


아마 해방이후 수출은 우리에게는 지상과제였다. 농산물의 수출은 원재료가 다 국산이니 보세 가공업 규모였던 경공업 수출에 비해서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돼지가 그 선두에 선다.


홍콩으로의 돼지 수출은 1959년 10월 초 500두, 10월 27일 580두, 12월 18일 470두의 실적을 올렸다. 당시 홍콩 생돈 수출은 외화 획득은 물론 국내 양돈업도 크게 활성화시켰다. 많은 업체들이 생돈 수출사업에 경쟁적으로 참여하면서 과잉 경쟁에 따른 손실을 보는 일도 빈번했다. 홍콩에서는 우리나라의 돼지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 돼지보다 품질이 우수해 높은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홍콩은 아시아에서 돼지를 가장 많이 수입했으며 아시아 돼지 무역량의 92%를 점유했다.



.


돼지 수출에서 냉동 돼지고기 수출로 전환


생돈 수출이 진행되던 중 지육을 수출할 수 있는 냉동 인프라가 구축 되면서 1960년대 들어 돼지고기 수출이 가능해졌다. 냉동 돈육의 수출은 수출업자에게 생각지도 못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데 돼지를 도축한 후 돼지머리, 족, 내장, 꼬리, 돈피, 돼지털 등 부산물이 수출업자의 몫이 되었기 때문이다.


돼지를 냉동하는 공정은 생각보다 여러 단계로 이뤄졌다. 돼지 부산물을 제거한 돼지 이분도체를 0~5도에서 예비 냉각한 다음 다시 –28~-30 도의 냉동실에 대략 16~24시간을 급속 냉동한다. 냉동이 끝난 냉동 지육은 –15~-18도의 냉동고에 넣어 보관하게 되는데 냉동된 고기는 몇 달 동안 보관이 가능했다. 다만 돼지고기 품질이 좋지 않아 해동이 되면 쉽게 부패하게 된다.


대일 full set cut meat수출기 (1969년~ 1979년)


우리나라의 일본으로의 돼지고기 수출은 1968년부터 시작됐으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수출 실적은 1971년까지 일본 전체 수입량의 0.35%~1.53%로 미미 하였다.


1971년 10월부터 일본의 돈육 수입이 자유화되고 일본은 자국의 돈육 가격 안정을 위해 수입관세의 감면제도가 실시되면서 대일 수출 물량도 급격히 늘어난다. 1972년 3802톤 578만 9천 달러 어치 수출하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렸다. 1973년에는 1819톤 379만 5천 달러 어치 수출로 전년에 비해 다소 부진하였다.


이에 대한 중요 원인을 살펴보면 1972년에는 일본으로의 수출 여건이 조성되면서 갑자기 돼지고기 수출 붐이 일면서 돼지고기 수출 개시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별다른 생산 기반 조성도 없었고, 돼지 품질 향상 없이 농가로부터 마구잡이로 돼지를 수집에 수출하면서 품질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1973년부터는 정부가 수출 규격돈 생산기반 조성에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사육기반이나 수출을 위한 인프라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국내 사료 가격 불안 등의 원인 때문에 사육 심리는 위축되면서 수출실적의 저조를 면치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1974년에도 지속됐다.







황교익 삼겹살.jpg

대중적 오해를 풀고 가자.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2017년 알쓸신잡에 나와서 “ 불행한 역사가 있다.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키워야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것은 배변물 처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키우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안심, 등심을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삼겹살, 내장, 발, 껍데기 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라서 싸게 먹었다고 알고 있는데 1970년대 초기에 대일돈육 수출시는 삼겹살등 모든 정육이 다 수출되었다. 삼겹살이 수출에서 제외되고 등심, 안심등 일본선호부위만 수출된 건 1985년 수출부터다.


수출스펙.jpg







미래의 한돈산업


1970년대의 경제 발전으로 육류 소비가 급증하고 단연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이 가능한 돼지고기의 수요는 늘어 났다. 수출밖에 답이 없었던 독재 정권은 값싼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농업 전반에 값산 농축산물 공급을 강요했다. 가장 성공적인 산업이 양돈산업이었다. 대일 수출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같은 동아시아권이면서도 선호하는 돼지고기의 부위가 한일간에 차이가 있다는 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덕분에 양돈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산업화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구제역으로 대일 수출이 중단되면서 1990년대 대일 수출형 산업화로 구성했던 산업 자체의 위기가 오지만 삼겹살의 폭발적 인기는 양돈산업의 지속적 확장을 가져 온다. 2010년의 구제역도 잘 넘겼다. 300만두 이상을 묻었던 양돈산업은 불과 일년만에 천만두를 회복하게 된다.


문제는 소비다.


과거 분명 돼지고기는 서민들에게 값싼 육류의 공급이라는 절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소비자들이 탐식을 하기 시작했다. 가격이 비싸도 맛있는 돼지고기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 상징적인 사례가 스페인산 이베리코 돼지고기다. 우리나라는 전체 농장이 하나의 품종으로 거의 같은 사료와 사양기술로 통일된 산업구조를 가지고 생산성 중심의 양돈산업을 만들었다. 양돈산업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이 이런 구조가 많다. 돼지 한 마리를 30~40만원에 생산해서 50~60만원 받으면 행복했다.


문제는 국내산 한돈과 품질이 차별되지 않는 수입돼지고기들이 몰려 오고 있다는 거다.


2018년이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역사에서 처음으로 고기가 남아 돌아간 해가 될거다.


이제 맛있는 고기를 찾는 탐식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고기는 돼지 한 마리를 100만원의 생산비가 들어도 탐식가들은 200만원에 소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생산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생산비 개념이 아니라 맛을 추구하는 차별화된 돼지고기를 생산해야 한다.


단순히 수입 돼지고기와의 경쟁이 아니라 이제는 수입 쇠고기들과의 경쟁을 준비해야 한다.


식육의 근현대사를 정리해 보면 쇠고기에 대한 욕구가 컸던 우리가 돼지고기로 급격히 소비가 확대된 건 가격 문제였다. 또 하나 로스구이라는 독특한 육류 소비형태, 직화로 구워 소금 양념으로 먹는 육류 소비 형태가 삼겹살의 인기를 견인해 왔다, 그러나 점점 양념육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 수입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된다. 이런 새로운 소비 패턴의 변화를 유심히 봐야 할 때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삼겹살의 시작 박찬일 세프 추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