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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고기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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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우리 양돈의 모습

한국에서 농업이 시작된 이래 돼지 사육은 농업의 중요한 일부였다. 1947년 돼지가 소비하는 곡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축 후 부산물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돼지 사육이 성행했다.

한국의 토종 돼지는 검고, 크기가 작고, 몸무게가 약 50 파운드 정도이다. 돼지는 지방이 거의 없지만 “아주 건강했고, 돼지고기는 맛이 좋았다.” 일제 시기에 버크셔와 요크셔 품종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토종 돼지보다 사료가 더 많이 필요하고, 한국인들이 고기가 너무 기름지다고 생각해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일제 통치가 끝난 무렵 이들 개량종에 대한 수요가 점차 늘어났다- 미군정의 한국 축산 보고서중


50파운드면 22.6kg 이다.

미군정시절 한국 축산에 대한 보고서에 양돈 부분이 조금 나온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도축 후 부산물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돼지 사육이 성행했다 두내장에 족발등 부산물을 살코기보다 더 좋아했을까?  미군에 볼 때 도축후 부산물을 이용하려는 목적이라고 했을까?

우리가 머리고기,순대, 족발등의 돼지 부산물을 좋아하는 것이 돈육 수출 부산물이 아니라 원래 부산물의 맛을 더 좋아했던 것 아닐까? 제주도에 말내장을 말고기보다 더 맛있다고 하는 것처럼 아마 당시 고기는 냄새가 나서 그렇게 선호하고 좋아하는 식재료가 아니라 그냥 잔치등 축제 음식으로 삶아서 나누어 먹었던 음식이고 일상속에는 순대국이나 족발, 머리고기등 부산물의 인기가 더 있었을까?


우리의 재래 돼지는 30kg 미만의 아주 작은 돼지였다. 그 돼지는 지방도 적었다.

내가 아는 일제 강점기 누진교배의 기록과 미군정의 기록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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