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선화 봉사 고려도경속 고기 이야기

선화 봉사 고려도경속 고기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거의 모든 음식학책 심지어 한우협회등 고기 관련 단체 용역을 주어 연구한 연구 보고서에도 우리 민족의 육식 생활에 대해서 거의 이런 식을 이야기 한다.
“ 고려 전반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고려왕들은 여러 번에 걸쳐 소 도축금지령을 내리고 금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에 준하는 자자형(刺字刑)을 내려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시대에 우금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고려도경』에 따르면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 한우마당(http://www.ihanwoo.kr)

 고려 도경은 1123년(인종 1)에 송나라의 사절 서긍(徐兢, 1091∼1153)이 고려에 사행을 다녀왔다가 지은 책으로, 본래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외국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12세기 고려의 모습과 고려인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







서긍은 고려인이 도축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고 했는데 서긍이 표현한 것처럼 산 돼지를 불에 던지고 뭉둥이로 때려 잡는 도축법은 중국에도 로마에도 돼지를 맛있게 잡아 먹는 방법이었다. 한나라때 무덤의 조각에 개, 소, 돼지를 도축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개를 잡을 때와 돼지를 잡을 때 똑같이 뭉둥이를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로마에서도 돼지를 뭉둥이로 때려 잡았다고 하니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는 도축법이 돼지를 도축전 스트레스를 받게 해서 근육을 맛있게 만들어 도축직후 맛있게 요리해 먹었던 거다. DFD 이상육은 지금처럼 도축후 유통을 할 때는 부패가 쉬워지는 문제점이 발생하지만 도축하자 마자 고기를 요리해 먹었던 옛날에는 발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대량 도축을 하고 동물 복지도 신경을 쓰기 때문에 뭉둥이로 패서 돼지를 잡을 수 없다.
이같이 고도의 도축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인들이 어설픈 도축법을 가졌다고 폠훼한 송나라 사신 서긍의 서술도 문제가 있지만 고려도경의 도축편을 근거로 우리 민족이 고려초기에 육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그걸 ctrl-c 해서 ctrl-v 하는 후대의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고려도경 8권 인물편에 수태사상서령 이자겸편에  “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당대의 권력자 이자겸의 집에 고기 선물이 수만근이여서 고기가 썩어 나갔다는 것인데 권력자에게 귀한 고기를 선물했던 고려시대의 육식생활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최초의 방자구이에 관한 기록도 고려도경에 있다. 고려도경 제21권 조례 방자편에 “평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이것이 지금의 로스구이의 원조격인 방자구이를 말하는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 방자조에도 방자라는 하인은 박봉이라 채소 등이 급여될 뿐이어서 간혹 윗사람이 먹다남긴 고기찌꺼기를 비록 조금 변질되어 냄새가 나도 달게 먹고 집에 가지고 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고려도경의 이자겸편이나 방자편에 나오는 고기 이야기를 볼 때 고려초기에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는 희박한다. 그런데 왜? 이같은 주장이 정설로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주장은 1978년 고이성우 교수의 고려이전한국식생활사연구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은데 그의 저서속에서 주장한 고려 전기 육식문화 위축설은 아마도 그 당시에 식품사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도 반박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공부를 한 고 이성우 교수의 이력으로 짐작해 보면 이성우 교수의 연구의 많은 기초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우리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마 고려도경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오랜 연구도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일본인들은 일제 강점기 1200년동안 육식을 하지 않아서 왜소한 자신들 모습에 비해 기골이 장대한 조선인들의 모습에서 열등감을 가졌을 거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 우리민족의 육식문화는 몽골 침략자들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역사를 전공한 정통 역사학자가 아니라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식생활사는 역사연구를 하는 분들의 관심을 가져주길 부탁한다. 
아마 몽골 침입이후 지배 계급의 쇠고기에 대한 인기는 몽골의 영향이 컸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14세기부터 쇠고기를 즐겼다면 이는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를 개발하였던 것처럼 쇠고기 육식 문화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전시키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더 하기로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고려시대 돼지와 돼지문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