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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돼지와 돼지문화

식육마케터 김태경 미트 소믈리에 , 한돈 스토리텔러

고려는 태조 왕건에 의하여 A.D.918년 건국하여 제34대 공양왕 4년 (1392)에 이르는 475연간 한반도에 군림한 왕조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민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온 불교와 인간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 도덕률을 지배해 온 유교는 고려에 그대로 계승되어 실학 및 축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축산의 성쇠를 이해하는 데에서 그것이 연유한 사회 문화적인 영향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불교가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라 할 만큼 심각하므로 고려 시대에서는 국교화한 불교와 유교가 실학 내지는 축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고려 시대에 내려오면 선사시대나 삼국시대에서처럼 축산이나 가축에 얽힌 설화나 고사 같은 것이 흔하지 않다. 다만 고려 초에 도읍을 물색할 때 돼지와 관련된 고사가 있다.

고려사의 첫 대목 고려세계(高麗世系)는 시조 왕건의 건국 위업을 담았는데 거기에 돼지가 수도를 잡아 준 내용이 있다.

신라말 명궁 작제권(作帝建)이 서해 용왕을 도와준 일로 용궁에 초대받아 갔다. 용녀에게 청혼하여 성사되었다. 아내 용녀가 말한 대로 용왕에게 돼지를 달라고 해서 얻어 지상으로 나와 귀국을 하였다. 돼지가 1년 후 우리에 들어가지 않아서 “네가 여기가 싫으면 가고 싶은 데로 가라. 내가 따르겠다.”라고 하였더니 송악산 남쪽 기슭에 가서 누었다. 그곳이 새 집터가 될 것 같아서 작제건은 이사하였다. 작제건과 용녀 사이에 용건이 태어나서 그 용건의 아들이 왕건인데 그가 돼지가 잡아 준 집터를 궁궐터로 잡았으니 개성 연경궁(延慶宮) 봉지전 자리이다. 위대한 고려 건국 시조의 조상 이야기에 수도를 잡아 준 용궁 출신 돼지가 의미하는 바는 고구려 유리왕의 교시와 같다. 작제건의 돼지는 하늘을 뜻하는 희생 되지가 아니고 바다를 뜻하는 가족 형성 돼지이다. 작제건은 아내 용녀도 얻고 용녀 덕분에 돼지도 얻고 그 돼지 덕분에 집터도 얻었다. 작제건은 신라 변방 백성이므로 바로 국가 건설이나 군왕의 통치나 국민 수의 증가를 행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손자인 왕건이 건국하여 영토를 정하고 인구를 늘리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수도를 정하는 위대한 사업을 할 기틀을 제공하였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는 고려건국신화를 보면 작제건의 돼지는 왕건의 돼지가 된다. 처음 백성의 돼지는 후에 군왕의 돼지가 된다. 용궁에서 온 신비한 돼지가 조부 작제건과 손자 왕건을 하나로 묶어 준 것이다. 돼지 출신지가 하늘이 아니라 용궁으로 바뀌었을망정 건국과 수도 정하기라는 국가 대사를 좌우한 것은 고구려와 같다. 고구려 둘째왕 유리왕도 사실은 건국 초기이므로 건국 시조라 해도 된다는 면에서 돼지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보다 늦게 나오거나 고려 시조 왕건보다 앞서 나오거나 관계없이 건국신화의 한 몫을 긍정적으로 담당하였다. 작제건이 명궁이라는 것은 고주몽이 명궁이라는 것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유리왕 또한 부왕 고주몽 곧 동명성왕에 못지않은 명궁이라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바이다. 국가를 상징하는 돼지가 고구려와 그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처한 고려에 계속 등장함은 고구려 건국과 고려 건국의 긴 시차 속에서도 돼지가 우리 민족에게 신성시되고 친밀한 동물이었음을 말해주는 의미가 있다. 

고려 시대 가축과 관련된 직접적인 관청은 전구서(典廏署)와 장생서(掌牲署)가 있다. 전구서는 고려 목종 때 설치된 관청으로 종 7품관인 령(令)과 그 밖의 약간의 이속(吏屬)이 배치되어 가축의 사육을 맡아보고 있던 관청이다. 이 관청은 1308년 충렬왕 때 전의시에 폐합되었다. 전의시(典儀時)는 궁중의 제사와 시호(諡號:고관이 죽은 뒤에 왕으로부터 받는 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곳인데 이곳으로 전구서가 합쳐졌다는 것은 곧 가축사육이라는 직무는 왕실용으로 쓸 가축의 사육을 뜻할 뿐 일반농가 축산의 장려 등과는 별 관련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생서는 궁중의 제향(祭享)·빈례(賓禮:손님 접대)·사여(賜與:백성에게 물품을 내림) 등에 쓸 

가축

을 기르는 일을 맡았던 기관이다. 설치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문종

 때 속관(屬官)으로 영(令:종8품) 2명, 승(丞:정9품) 2명과 이속(吏屬)으로 사(史) 3명, 기관(記官) 2명을 두었다. 이 

관청

은 조선 시대에 전생서(典牲署)로 이어졌다.

고려 시대의 돼지 

고려 시대 들어 가축사육은 한층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의 가축사육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국가가 운영하는 큰 규모 목장에서의 가축사육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각 농가에서 자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축사육이었다. 국영 목장에서 사육한 말, 소, 낙타, 노새들은 전마(군마)나 물자 운반 등에 이용하였고, 농가에서 사육한 가축은 부림소(역우), 부림말, 돼지, 양, 닭, 개 등으로서 주로 축력, 고기와 알 생산에 이용하였다. 이 시대의 국영 목장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목장은, 지금의 황해남도 청단군의 용매도 말 목장을 비롯하여 황주, 청주, 개성, 광주, 봉천, 철원 등에 목장이 있었다. 이밖에 비교적 규모가 작은 목장으로는, 철산의 백량목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것은 고려 시대에 이미 큰 목장 운영에 필요한 가축사육 기술은 물론, 수의 방역과 가축우리 건설, 번식 등에 관한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시대에 국가가 운영하는 큰 규모 목장에서 사육하는 가축으로는 소나 말, 낙타 등이 나타났으나, 돼지를 목장에서 길렀다는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돼지는 주로 전국에 걸쳐 분산하여 사육한 것으로 보인다. 1150년에 제정된 가축 하루 먹이량 기준에도 돼지에 대한 자료는 없다.

『고려사』권 77 백관지 2의 전구서조에 '잡축 사육을 담당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잡축이란 당시 아무 먹이나 다 잘 먹는 가축, 즉 돼지라는 뜻이다. 돼지의 이러한 소화 생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고려사람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면서 뜨물이나 농부산물 등을 먹이면서 길렀다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농경사회 초기,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한 돼지 사육은 가정에서 아낙네들이 하는 일로 취급되었다. 고려 시대 돼지는 개별 농가에서 키워 농가 자체 소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서나 문헌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고려 초기의 육식 문화 

고려 초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고려 시대 왕들은 수차례에 걸쳐 소 도축금지령을 내리고, 이러한 금지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에 준하는 자자형(刺字刑)을 내리면서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 시대에 우금령(牛禁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가 불교 국가여서 쇠고기(육식)를 안 먹었다고 하지만, 968년 광종을 시작으로 988년(성종 7년), 1066년(문종 20년), 1107(예종 2년)까지 몽고 간섭기 이전, 이후 1310년(충선왕 2), 1352년(충숙왕 2), 1371년(공민왕 20) 등의 시기에 도살 금지령이 내려진 역사만으로도 쇠고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호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고려도경』은 외국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12세기 고려의 모습과 고려인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고려도경에 서술된 고려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서술자의 시각이 고려에 대한 서긍의 이해는 기본적으로 고려를 방문한 이방인이 중국 중심의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 따라 고려를 관찰하여 기록한 것이다.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서긍이 고려에 대해 직접 경험한 폭이 좁았다는 것이다. 서긍 스스로가 “고려에 머문 기간은 겨우 한 달 남짓이었고 고려에서 관사를 제공한 다음에는 군사가 지키므로 관사를 나선 게 대여섯 번에 불과하였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가 직접 보고 서술한 상황은 공간적으로는 바닷길을 제외하고는 개경 소재의 궁궐이나 문궐, 사우와 관부 등에 불과하였다. 그가 고려의 풍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도경이 중요한 건 당시 고려의 국왕이나 귀족층만이 아니라 백성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가치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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