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본 조선의 돼지는 열등했다.
적어도 1871년이후 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서양의 영향으로 돼지고기를 햄 소시지로 접한 일본인들에게는 돼지는 아주 낯선 가축이었다.
일본 양돈사를 찾아보면 일본의 190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의 양돈업은 아주 미미했다. 1971년전에는 퇴비를 생산하기 위해서 농촌에서 돼지를 키우는 지역이 있었지만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한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았다. 1905년경에도 일본인들은 돼지고기를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한 건 다이쇼시대 (1912년~ 1926년)다. 일본에서도 공업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도시노동자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쇠고기의 부족현상이 나타나고 그래서 먹기 시작한 육류가 돼지고기다. 돈가스, 카레라이스, 고롯케등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대표 돼지고기 요리들은 1920년대 대유행을 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도 버크셔를 보급하고 재래돼지와 누진 교배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1920년대부터다. 아마 1920년대부터 고기생산이 양돈의 시작점이라고 보면 된다.
1920년대 이전 아니 그 이후 상당기간 돼지 사육의 주목적은 퇴비를 만드는 채비동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신문을 살펴 봐도 돼지 사육 목적에 채비동물이라는 걸 이야기하는 신문기사가 많다.
황교익의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 음식 안내서 209페이지에
1921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는 마침내 조선돼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 음식 안내서 209페이지
라고 하지만 1935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도 조선 돼지 실험한 것이 나온다.
1930년대 버크셔와 잡종 보급율이 30%정도 1942년에는 70%정도 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니 1927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하나 실려 있다.
참고로 권업모범장 보고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실험의 결과 제국주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문물이 우수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퇴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배분량이고 다음이 오줌량일거다. 이 실험에서 오줌량의 측정에 미흡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배분량만으로 보면 평균 체중 150kg 의 버크셔에서 1일 3.8kg 평균 체중이 41.3kg 인 재래돼지에서 1일 1.5kg 이었다고 한다. 버크셔는 체중 kg 당 25.3g, 재래돼지는 체중 1kg 당 36.3g의 똥을 생산하는 결과가 나왔으니 적은 돼지의 퇴비 생산량이 버크셔보다 우수했다. 사료 작물이 부족해서 잔반, 겨, 간장찌꺼기, 술지게미, 두부찌꺼기, 채소 부스러기등이 주 사료였던 조선의 농가에서는 덩치가 커서 많이 먹는 서양의 돼지보다 소형종인 재래돼지가 더 우리 환경에 잘 맞는 돼지였다. 아마 이 실험에서 버크셔의 성적이 우수하게 나왔다면 버크셔의 보급 속도가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실험은 얼마든지 자신들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칼럼니스트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사실을 왜곡하면 안된다.
1921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는 마침내 조선돼지가 보이지 않게 된다.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 음식 안내서 209페이지
이 문장 역시 읽는 사람은 1921년이후에는 권업모범장에서 조선돼지 연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물론 1921년 권업모범장 보고에만 보이지 않은 거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일제는 지속적으로 버크셔의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1930년대 들어서는 양에 비중이 커서 돼지 연구 자료가 빈약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1970년대 이후 크게 번진 요크셔가 외래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면서 반사적으로 검기만 하면 토종이라는 관념을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 음식 안내서 210페이지
이 문제도 좀 너무 주관적이다.
1975년 향문사에서 발행된 돈이라는 책 이책은 거의 우리시대는 교과서 였다.
통계에 따르면 1973년말 현재의 총 두수 159만두 중 버어크셔종이 32만두로서 20%를 차지하고 요오크셔종이 약 10만두 햄프셔종이 9.6만두로서 각각 6.4%,6.0%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 듀오록종 . 랜드레이스종, 폴란드차이나종, 체스터화이트종등 군소 품종이 약간씩 존재하고 나머지의 대부분은 재래종을 기초로 한 잡종들로서 제1~2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돈 P17
일본은 1950년대이후 중요크셔를 50%이상 사육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요크셔가 주력 품종이 된 년도는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랜드레이스종을 많이 키웠고 1980년대 와서는 삼원교잡이 되었으니 우리나라에서 재래 돼지가 흑돼지라고 인식된 건 1980년대 이후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마 1970년대까지는 재래돼지, 서양돼지 이런 구별도 별로 없었을 거다. 재래 돼지 복원 사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이후였으니 1970년대의 요크셔종이 크게 번졌다는 건 일본식 사고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문제을 다시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정리하면 1950년 전쟁으로 남한에 돼지가 156천두 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등의 원조로 다양한 품종의 돼지가 농촌에 보급되었으며 이시기부터 백색종의 돼지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도로 적어야 한다.
1950~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는 다양한 돼지 품종을 사육했다.
공장식 축산이 본격화되면서 삼원교잡중이 주류를 이룬다.
돼지란 가축이 거의 만년을 인간과 함께 살면서 각 시대별로 역할이 좀 달랐다.
지금은 오직 고기를 생산으로 돼지를 키우지만 옛날에는 고기만 얻기 위해서는 돼지를 키우는 것보다 사냥을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였을 수 있다.
돼지는 소나 말과 양과는 다른 가축화 과정으로 가축이 된다.
돼지는 비둘기나 쥐처럼 자신들 스스로가 사람들의 정착지로 내려와서 먹이를 찾고 사람과 친숙해진 가축이 되었다.
돼지의 처음 사육 목적은 거의 모든 가축과 같이 제례의 재물이었다.
다음에는 퇴비나 기름을 얻기 위한 목적 그리고 최후의 목표가 고기였다.
가축화된 동물들은 단순히 하나의 목적으로 가축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개도 사냥에 이용되었지만 고기로도 먹었다. 가축의 영어 LIVESTOCK 살아있는 창고라는 뜻이니 가축 최후는 죽어서 고기를 공급하는 것였지만 그런 가축을 살아 있을 때의 용도에 따라 가치가 달랐다.
우리 농촌에서 돼지를 많이 키웠던 것은 소는 양반의 가축이여서 사육에 부담이 많이 되었다. 돼지는 우리 농가 부산물로 채비 생산을 목적으로 한두마리정도는 키울 수 있었던 환경이었다. 조선시대 농서를 보면 소는 곡물을 먹이는 사료법이 있지만 돼지 사료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것이 돼지는 농가 부산물을 먹거나 개들처럼 스스로 먹이를 해결하기도 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돼지 이야기를 찾아 보면 채비동물, 청소동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처음에 채비라는 단어를 몰라서 무진장 고민했는데 채비란 퇴비를 만든다는 뜻이다. 청소동물이란 잔반, 겨, 간장찌꺼기, 술지게미, 두부찌꺼기, 채소 부스러기등 인간이 섭취할 수 없는 것들이 주 사료로 이용했다.
인류 학자 마빈 해리스의 주장처럼 돼지가 사람들과 먹이 경쟁을 했다는 건 불과 돼지사육 100년내의 역사였다. 아니 독일의 경우는 감자가 보급되고 밀등을 돼지에게 먹여서 겨울나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산업혁명 전후부터 돼지에게 곡물을 먹여서 대량 사육을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재래돼지가 열등하다는 표현보다는 돼지 사육의 목적이 달라져서 서서히 도태되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말이 그말이 되겠지만 재래돼지의 부활에 노력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새로운 맛을 찾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좀 아쉬운 표현인 것 같다.
생산성의 맛보다 차별화된 맛을 찾는 탐식, 미식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시대 재래돼지의 깊고 진한 맛을 찾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베리코돼지의 특별한 맛에 감동하는 건 이베리코 돼지가 재래 사육 방식으로 키운 스페인의 재래돼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재래돼지도 조선시대식으로 사육하면 이베리코 이상의 맛 물론 이베리코와 차별화된 맛이겠지만 새로운 맛을 경험하게 해 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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