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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돼지 사육은 매우 중요한 일

조선시대 돼지 사육은 매우 중요한 일     

국가 차원에서 중시되는 제례(祭礼)와 빈례(賓礼)에 많은 수의 가축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서 축산은 매주 중요하게 여겨졌다. 가축 가운데 역축(役畜)으로 사용되던 소와 말이 중요했지만, 제례의 희생물과 사신(使臣)의 식용으로 널리 사용된 양과 돼지 역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여야 하는 중요한 가축이었다.

가축은 통상 소, 말, 양, 닭, 돼지, 개를 포함하며, 이를 육축(六畜)이라 했다. 이들 중에서 소와 말은 역축이라 했으며, 역축의 기능을 하지 않는 다른 가축은 잡축(雑畜)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잡축에 관한 기록은 왕조실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잡축 중에서 돼지는 제례와 빈례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면서 왕이 사는 궁궐에서 키웠다. 돼지는 단순한 식용뿐 아니라, 제사와 손님 접대를 위해 사육한 것이다. 잡축은 소와 말에 비해 큰 관심을 가지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건국 직후부터 나라에 필요한 잡축을 사육하는 기구를 두고 특별히 관리했다. 기구는 사육 목적에 따라 이원화되었는데, 이러한 잡축을 사육하는 기구로는 제례용 희생물로 가축을 기르는 전생서(典牲署)와 빈례용 가축을 기르는 사축서(司畜署)가 있었다. 전생서는 나라의 제향에 쓸 양이나 돼지를 기르는 일을 맡은 관아로서 세조 6년(1460)에 전구서를 전생서로 변경한 것인데, 이는 고종 31년(1894)에 폐지했다. 한편 사축서 역시 잡축을 기르는 일을 하던 관아인데, 세조 12년(1466)에 예빈시(禮賓寺)의 한 분장(分掌)인 분예빈시를 독립시킨 것으로 영조 때 호조(戶曹)에 예속했다 . 

그런데 건국 초에는 나라에서 쓰는 잡축은 사육기구를 구분하지 않고 전구서(典廏署)에서 일괄 사육했다. 전구서는 태조 1년 (1392)에 설치되어, 축양(畜養) 즉 가축을 양육하는 일을 맡았다. 전구서의 인적 구성은 종7품의 영(令) 1명, 종8품의 승(丞) 2명, 그리고 사리(司吏) 2명으로, 5명이 축양을 담당했다. 전구서에서 사육하는 가축은 소, 양, 염소, 돼지, 닭, 오리, 거위였다.

사실 조선의 전구서는 고려의 전구서를 답습한 것이다. 고려 말기에는 전구서가 제례에 쓸 희생물을 관장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궁중에서 제수용 가축을 관리하던 장생서의 역할을 통합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구서에서 기르는 가축에 제례용 희생물인 소, 양, 돼지와 빈례용으로 쓸 잡축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볼 때, 전구서는 고려 말 전구서의 역할을 이어받아 총괄적으로 잡축을 사육하는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식용으로 쓸 소와 말을 기르는 사련소(司臠所)가 있기는 했다. 사련소는 도축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역축이라서 도축을 금지한 소와 말을 빈례나 잔치에 제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들 가축을 사육한 것이지, 정식 축양기구는 아니어서 여전히 잡축 사육은 전구서에서 담당했다. 이처럼 건국 초기 잡축사육은 전구서에서 담당했지만, 태종 때 제례와 빈례 절차에서 유교적 의례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가축을 구분할 상황이 되었다. 이에 따라, 제례용 희생물은 전구서에서 전담하고 빈례용 가축은 다른 부서에 맡겨 기구를 이원화하여 재편되어갔다.

조선시대 돼지는 농촌과 농업생산 환경에 적합한 가축이었다. 우리나라 재래돼지는 극소형 품종으로 사료 소비량에 비해 단위 증체량이 적어서 살찐(肥腯) 돼지로 키우려면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런 이유로 제례용 돼지는 당저(唐猪) 즉 중국에서 수입한 돼지를 사용했다.
 

제례용 돼지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돼지로     

국조오례의서례(国朝五礼儀序例)에는 33종의 제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제사 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연중 174차례로 매달 15차례가 시행되는데 비정기적인 제사까지 포함하면 그 횟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돼지는 모든 제사에 희생물로서 한 번에 1~5마리 정도를 썼는데, 이틀에 한 번꼴로 제사에 사용됐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대량으로 사육해야만 했다. 조선 후기 학자 황윤석의 유고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의하면, 제사에 이용된 돼지의 수는 정기적인 제례에 334마리, 비정기적인 제례 201.5마리 등 총 535.5마리를 썼다. 1808년(순조 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총 521마리가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조선 후기 1년 동안 제례에 사용된 돼지의 숫자는 521~535.5마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재래돼지(위)와 당저(아래) 모습        

재래돼지
당자

자료 : 두산백과사전     

조선에서는  중국의 우량종을 도입했다. ”

중국에는 토산종 돼지만 100여 종 이상인데, 조선에서 수입한 당저는 동북, 화북 지방에 있었던 민저(民猪, min pig)라는 품종으로 추측된다. 민저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몸길이가 수컷이 148cm, 암컷 141cm, 어깨높이는 수컷 86cm, 암컷 87.5cm, 몸무게는 수컷 195㎏, 암컷 151㎏이다. 머리는 중간 크기이고 주둥이는 곧다. 귀는 크고 처져 있으며 허리는 평평하다. 털빛은 검은색이고, 털은 굵고 길며 거칠다. 발육은 느린 편이고, 춥고 건조한 기후와 열악한 영양 섭취에도 잘 견딘다. 질병 저항성이 강하고 번식력이 우수하다. 고기에 기름이 많지만, 맛은 좋다. 도체율(屠体率)은 72.2%, 살코기 비율은 46%, 등 지방 두께는 32mm이다. 생후 3~4개월이 지나면 첫 짝짓기를 할 수 있는데, 한 배에 15~16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이는 중국 돼지품종 중 화북형(華北型, North China Type)에 속한다. 화북형은 동북아 지역의 돼지로 사육 기간이 길고, 방목하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 체구가 웅장하며, 가죽이 두껍고, 털이 거친 것이 특징이다. 이 품종이 제례용으로 적합했다.

조선에서는 중국산 돼지와 재래돼지를 구분하여 키웠다. 제사에 쓰이는 중국 돼지가 재래돼지와 섞여 잡종이 태어나다 보니 몸집은 작고 살이 찌지 않아서 제사용으로 합당하지 않게 되자 품종을 보존하려는 조치였다. 당저가 축사 밖으로 벗어나 재래돼지와 섞이는 경우가 발생하여 당저의 특질을 상실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면 중국에서 다시 당저를 들여와서 품종을 유지했다. 당저는 다른 품종과 교잡할 때 후대에 양호한 결과를 가지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우수한 당저를 선발하고 이를 종돈으로 이용하면 재래돼지를 개량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에서는 우량종 보존에만 힘쓴 것이다.

품종의 특징상, 전구서에서 가장 사료값이 많이 드는 품종이 당저였고, 이는 곧 전구서의 재정 부담을 가중했다. 사료 공급을 위해, 전구서에서 돼지를 키우는데 필요한 사료는 경기도민이 공물로 바치게 했다. 경기에서는 전구서의 돼지 사료로 생초(生草), 곡초(穀草)와 함께 사료를 끓이는 데 필요한 땔나무를 공물로 바쳤다. 경기 고양 현에는 돼지 사료 농장까지 설치되는 등 당저의 사육을 위해 경기도가 바치는 사료의 양은 상당했다. 

당저가 워낙 번식력이 좋다 보니 전구서와 예빈시(礼賓侍)에서 돼지를 키우는데 필요한 쌀과 콩의 양이 상당했다. 결국 태종 대와 세종 대에는 당저의 일부를 외방으로 보냈는데,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전구서에 암퇘지 508마리가 있사온즉, 그 어미 돼지의 수효가 너무 많사오니, 그중에 크고 살이 쪄서 새끼를 많이 번식시킬 만한 300마리만 골라서 남기고 나머지 200마리는 자원하는 자에게 시세대로 팔아서 집집이 두루 기르게 하여 번식시키지 않는 자가 없게 하여, 늙은이를 보양하고 선대를 제사하는 소용에 갖추도록 하게 하소서.”하는 청에 따라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사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돼지와 같은 잡축을 민간에게 기르게 하여 제사나 노인 봉양에 도움이 되는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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