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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 토종 한우의 우수성


재래 토종 한우의 우수성




가축은 농가가 경제적 행위로 사육한다. 따라서 재래 가축이 그 자체로 충분한 실용성을 갖추고 있는 동안에는 보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지만 일단 실용성을 잃기 시작하면 사라지게 된다. 


한우는 토종 가축으로 산업화된 전세계에서 보기 드문 경제적 가치가 있는 품종이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쌀, 소, 양잠, 면화등을 수탈해 갔다.


식민지에서 모든 자원의 경제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불량한 재래종에 개량종 수컷을 교배시켜 재래종을 개량하는 누진교배법을 이용했다. 조선의 재래 돼지는 버크셔와 누진 교배를 통해서 개량되었다.




일제 강점기 생우 150만두를 수탈해 갔던 일본이 왜? 한우에 대해서는 누진 교배로 개량하지 않았을까?


가축의 개량은 영국의 산업 혁명시대인 170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영국은 당시 산업혁명을 통해 도시가 급격히 발전하고 노동자들의 육류 소비량이 급증하게 되어 가축개량에 힘을 쏟았다. 


18세기에 다양한 품종의 소 크기와 무게는 현저하게 증가한다. 물론 중요한 것는 크기보다는 무게였다. 1710년 영국소의 평균 도체 무게는 약 370파운드 (168kg)였다. 생체 중량으로 약 320kg 정도였다고 한다. 개량을 통해 1795년에 평균 도체 무게는 약 550 파운드 (250kg) 생체중으로 약 500kg 으로 커졌다. 


당시 일본, 중국의 소들은 영국의 소보다 작았다. 반면 조선의 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였다. 조선의 소는 키가 146~150cm에 이루고 무게는 약 330kg 까지 나갔다.


개량이전의 와규는 역용종으로 검은색 털, 체격이 작았다. 암소의 몸길이는 116cm, 몸통 길이 137cm, 가슴 폭 36cm, 머리 길이 45cm 정도로 매우 작다. 


당시의 극동에서 소의 역할은 고기보다 일소로써의 노동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의 소는 건강하고 활동성이 큰 것이 특징으로 달구지에 660kg 정도의 짐도 쉽게 나를 수 있으며, 산을 넘거나 물살 센강을 건널 때는 그 어떤 가축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다. 말들이 쉽게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곳에서 조차 소들을 쉽게 장애물을 피해나겠다. 발이 빠른 조선우들은 속도가 장시간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능력에서 말에 뒤지지 않았다. 이런 조선우의 특별한 외양과 능력을 어느 역사 학자는 오키나와에서 물소를 도입하여 교배 개량한 결과라고 이야기하는데 조선소와 물소는 이종이라 교배가 되지 않는다. 설혹 교배가 되어도 노새처럼 후대 번식이 불가능하다.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기 이전부터 조선소에 대한 많은 조사 연구를 했다. 그 결과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인 조선우에 대한 개량을 진행하지 않았다. 


원래 와규는 역우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데 메이지 유신이후 여러 이유에서 와규의 역육겸용으로 개량이 진행되었다. 


역육겸용종을 개량의 목적으로 삼은 결과, 종우(種牛)를 길러 육생산 능력을 부여하게 되었으나, 이 때문에 본래의 와규의 장점을 상실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첫째, 역우에게 요구되는 유순함이 줄었고 둘째로 동작의 기민함이 떨어졌으며, 셋째로 종전보다 몸집이 커졌고 넷째로 가격이 상승하였고 다섯째 육질이 저하되었다. 그 결과 일반 농가에서 키우는 와규의 개체 수도 감소했다. 역우로서의 장점이 줄어든 와규가 조선우로 대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로써 역우의 부족을 보완할 수 있었다. 즉 일본의 와규의 역육겸용종으로 축우 개량 정책이 역우로의 가치가 컸던 조선우를 개량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즉 역우 일소였던 일본의 순종 와규를 고깃소로 개량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우가 순종 와규(純和牛)를 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우와 순종 와규(개량이전의 와규)는 먹을 것에 까다롭지 않고 다소 거친 사역 환경에도 잘 견딘다. 


또한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가축에 대한 사육이나 취급 방식은 일본인보다 훨씬 능숙했다. 


일본에서는 소를 부릴 때 말로 전달하지 않고 보라 채찍을 드는 야만적인 사역법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반면 조선에서는 말로 소를 사육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이 조선우를 수탈해가면서 여러 자료에 조선어로 소를 부리는 법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에서 수탈되어 간 소들이 일본어로 부리면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해서 였을까?




사육에 사용되는 사료를 예로 들자면,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는 평소에 짚만 먹이고 여기에 쌀뜨물을 약간 섞어주는 정도였다. 아무리 잘 줘야 보리나 호밀을 4~5홉 섞는 게 고작이고 사역 시기가 되면 그 분량을 2~3되로 늘리는 정도다. 건초 등을 먹이는 것이 가장 좋을 테지만 반드시 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섬유질의 소화능력이 뛰어난 소는 말에 비해 먹이의 질이 조금 떨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 우사 또한 마구간처럼 세심하게 청소할 필요도 없고 체질이 강건하고 발굽이 단단하여 말을 취급하던 종전의 방법과 비교하여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도 없었다. 일본은 말도 농사에 적극적으로 이용해 왔었지만 중일 전쟁, 이차 세계 대전기간에 말들은 군용으로 전선으로 착취되었고 그 빈 자리를 조선우가 대신하게 된다. 


그 이전 일본에서도 산업 혁명이 일어나 도시가 발전하면서 농촌의 젊은 인력이 공장의 노동자로 도시로 이주하거나 군국주의 일본 군인이 되면서 부족한 농촌의 일손은 조선우로 대체 하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우역이라는 무서운 소 전염병이 있었음에도 조선우를 생우로 수탈해 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소의 흑사병이라고 불린 우역은 1911년 일제가 부산에 설치한 우역혈청제작소에 근무하던 카키자키 치하루에 의하여 1917년 완성되었다. 1931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우역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았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개량을 거치지 않은 순수 토종 소는 2종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미시마규다.


야마구치현 아부군, 동해에 떠 있는 외딴 섬 미시마섬에 미시마규(見島牛)라고 불리는 순수 와규가 천연기념물로 보존되어 왔다(쇼와 3년에 미시마규 산지로서 국가 천연기념물로 인정).


미시마규는 역용종으로 검은색 털, 체격이 작고(암소의 몸길이는 116cm, 몸통 길이 137cm, 가슴 폭 36cm, 머리 길이 45cm 정도로 매우 작다) 늦게 성숙하고, 피부가 얇고 털이 좋으며, 육질은 근섬유가 가늘고 지방교잡이 많은 매우 질 좋은 마블링이 있는 고기가 된다. 또한 매우 강건하고 항병성이 강하다. 성격이 순종적이고, 거친 음식에 잘 견디며, 작지만 힘이 강해 자동차 사용이 어려운 미시마 마을에서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메이지 시대에는 시마네현에서 씨수소를 들여와 미시마 소의 개량에 힘썼지만, 태어난 송아지의 체격이 너무 커서 험준한 미시마에서의 사역에 적합하지 않고, 사육 관리에 어려움을 느껴 결국 그 계통을 모두 도태하고 순수한 소만 남겼다고 한다.


또한 현재는 미시마 소의 정액을 홀스타인 암컷에 수정한 씨수소가 미란우라는 이름으로 생산되고 있다. 육질이 우수하고 도체 수율이 높으며, 순수종 간의 교배로 육질 편차가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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