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등교, 나는 출근을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 집 건너편 빌라에 다리가 불편하신 아주머니가 계신다. 우리가 나가는 시간에 그분도 센터로 가시는 듯, 건강해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매일 아침마다 와서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가신다. 매번 두 분을 바라보며, 그냥 몸이 불편하신가 보다, 도와주시나 보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문득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두 다리가 멀쩡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건강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를 느끼는 죄스러운 마음과 더불어,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들은 누군가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새삼 크게 다가왔다. 몸은 건강하지만, 아니 건강해 보이지만 아프고 힘든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아프기 전에, 불편해지기 전에, 돌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스인 조르바 책에서 죽음을 앞둔 과거 매춘부였던 여자에게(매춘부란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사람들이 한 명씩 와서 '당신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 바란다.'는 식의 인사를 하러 온다.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평소에 잘 만나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 하다가 갑자기 큰 병을 앓아 병원에 입원을 한다거나, 혹여 잘못되어 죽게 되면 그제야 그 사람을 찾아가 인사를 한다. 미워했던 마음, 싫어했던 마음들을 미안해하면서 그저 빨리 낫기를, 혹은 좋은 곳에 가서 편안하게 살기를 빌어준다.
그러기 전에, 서로 멀쩡히 살아 있을 생전에, 아프기 전에 서로 돌봐주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아픔이 죽음이 다가와야 그 사람이 온전히 그 사람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만 할까.
순서가 잘못됐다는 생각이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당장 나부터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아니 내 가족, 친구들부터 제대로 돌봐줘야겠다. 몸은 건강한지, 마음은 평안한 지. 잘 지내고 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어졌다.
아침 등굣길 아들에게 물었다.
"저렇게 몸이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들은 누군가 돌봐주잖아. 너희들은 엄마가 돌봐주고. 아빠도 엄마가 돌봐주고. 그런데 엄마는 누가 돌봐줘?"
순간 아들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돌봐주고 있잖아."라고 오늘 아침 둘이서 한판 신나게 벌인 레슬링 이야기를 한다. 그게 엄마를 건강하게 해주는 거라고. 엄마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교육시켜 주는 거라고.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엄마는 그런 돌봄보다, 엄마 마음을 돌봐주는 사람이 좀 있으면 좋겠다. 사는 게 많이 힘들진 않냐고, 잘하고 있다고, 지치지 말라고, 괜찮다고. 진심으로 물어봐주는 사람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