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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똘 Apr 07. 2020

26살, 첫 인턴

나란 사람은 왜 이리 한심한 건지!!

스물여섯 나이에 첫 인턴을 시작했다.

늦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운 좋게 들어간, 아니 그래도 내가 한 일을 후려쳐서는 안 되니까,

학교 취업팀을 오가며 자소서도 쓰고 상담도 받으며 하다가 얻은 소중한 인턴 자리.


이 자리에 있은 지도 어느새 6개월이 지났다.

6개월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글을 쓴다.





1. 전화 당겨 받는 것도 두려워했던 첫 달


내가 일하게 된 곳은 대학 입학처이다.


10월에 입사했으니, 한창 수시로 바쁜 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로 온 누군가를 신경 써 줄 겨를도 없이 정말 바쁜 때였다.

바쁘게 돌아가는 고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뻘쭘하게 자리를 지켰다.



괜히 책상 정리를 하고,

모니터 높이를 이리저리 맞춰보고,

먼지도 없는데 슥슥 닦아보고,

수시모집요강을 코 박고 읽고,

전임자의 주간업무보고서를 읽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했다.



외부로 전화를 걸 때는 9를 눌러야 한다는 걸 몰라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번호를 누르고 또 눌렀고, 당겨 받을 때는 수화기를 들기 위해 손을 뻗고 수화기를 들고 별 표시를 누르기까지 엄청난 내적 갈등과 심호흡이 필요했다.(ㅋㅋ)


지금은 익숙해진 전화상담, 공문 등록, 서류 정리, 장소 신청, 장소 세팅, 접수 테스트, 우편관리, 세탁물 관리, 재고관리, 폴더 정리 같은 일까지 모두 나를 카오스로 밀어 넣는 엄청난 일들이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일 업무일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고, 직원 분들이 시키는 단순 업무들은 어둠 속 빛 같았다.


옆 자리 비슷한 또래의 직원분이 종종 이것저것 알려주려 했던 것, 또 비슷한 또래의 근로 생들과 아르바이트생들과의 소소한 대화들 덕에 조금씩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낯선 세계, 모두가 능숙한데 나만 서툴고 이방인인 듯한 느낌이 나를 엄청 위축되게 만들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뭘 해야 하는 건지, 경직된 상태로 동공 지진을 흩뿌리며 지낸 날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그 와중에 뭐라도 하겠다고 시도해본 것들이 기특하긴 하다.

프로세스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이리저리 그려보고, 일단은 내 손이 탄 내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꼼지락꼼지락 책상을 정리했던 모습, 근로 생들이 나에게 질문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 돈 받았으니 일 하자라고 되뇐 것, 일의 순서를 정리해보려 한 것 등을  떠올려 보면, 어리바리하긴 했지만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아주 자그마한 시도들이 모여 첫 달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같다.





2. 첫 발주의 기억


팀장님에게서 미션이 떨어졌다.

"본교 입시 고사 때 사용할 볼펜 견적을 알아와라!"


대량으로 물건을 주문하기 위해 견적서를 주고받는 일을 처음 해보았다. 얼마를 넘어가면 견적서가 어떻게 필요하다, 새로운 상품을 원하시면 방문해서 직접 보여드리겠다 등등 여러 말이 오갔다. 이전 품의서를 참고해 납품업체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가격과 기능을 고려해 팀장님께 두 가지 시안을 보여드렸다.


문제는 논술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 발주를 최대한 빨리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팀장님께서는 기능이 좀 더 향상된 펜을 원하긴 하지만 기간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 시안 중 기간 맞춰 제작되는 펜 쪽으로 급하게 발주를 넣었다. 점심시간 이전에 넣어야 기간에 맞춰 배송할 수 있다는 납품업체의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다.


내부기안 결재가 나기 전이었다.


그 과정을 몰랐던 나는

"팀장님이 기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으니까, 기간에 맞춰 올 수 있게 얼른 주문해버려야지!" 했던 것이다.

팀장님은 이미 주문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인턴 선생님은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때 후들후들 떨며 적어 두었던 메모.


1. 팔 사람 찾고

2. 파는 조건 알아내고

3. 우리 쪽 조건 확실히 하고

4. 결정은 내가 아닌 윗사람이!!★★

 




3. 나도 몰랐던 인정 욕구와 성취감


나는 내가 인정 욕구도 성취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나를 인정 해주건 말건 '어쩌라는 건지~'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일하는 공간에서 점점 스스로 뭔가 챙기고,

나름 익숙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근로 생들에게 무언가 알려줄 수도 있게 되면서,

그런 시간들이 즐겁다고 느꼈다.


이전에 내가 자잘하게 정리해놨거나 슬쩍 읽어봤거나 누군가의 대화에서 들었던 것들이 일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서류에 네임텍을 잘 붙여놓아서 잘 찾을 수 있게 만들거나, 작년 품의서를 적절히 모아 필요할 때 참고하고, 시행규칙을 훑어보며 전화상담을 조금씩 대비하는 일 등등 작은 성취감들이 쌓여가는 게 즐거웠다.


입사한 지 3개월이 지날 때쯤, 4번째 입시전형(학생 선발을 위한 면접고사, 논술고사 등)을 준비하는 중에는 일이 진행되는 것에 발맞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는데, 처음 일할 때의 보릿자루 같은 모습과 비교되어 뿌듯했다.


입시 특성상 새벽 출근, 주말 출근, 야근이 잦았고 그래서 어깨도 뻐근 눈도 뻐근 그냥 전기장판에 누워 버리고나 싶은 날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힘든 것보다 바쁘게 주어지는 할 일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걸 해낼 수 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4. 사회적 자아가 부족해


6개월이 지난 지금 나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바로 팀원들과의 관계이다.

6개월이나 지났으니 경직되어 있다거나, 뭘 해야 할지 몰라 동공 지진을 날리는 것은 아니지만, 팀장님이나 부장님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대화들을 나누는 게 어색하다.

점심시간에 침묵이 내리 앉을 때도, 나에게 무언가 질문할 때도 당황스럽다.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어떻게 대답을 할지 사회 부적응자 마냥 삐걱삐걱거린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사실 낯설고, 번거롭고, 피곤하다.

그래도 함께 살아야 하니까, 함께 일해야 하니까

사회적 자아, 사회적 페르소나를 만들어 연습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점심시간 프로젝트라는 소소한 개인 관찰과 피드백을 이어가고 있다.

점심시간의 대화나 상황을 적어보고, 좋았다면 뭐가 좋았는지, 아쉬운 건 뭔지, 다음에 어떻게 해보면 좋을지 등등... 사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막막하고..ㅎ


그래도 처음보다는 조금씩 나아진 것처럼, 남은 6개월도 더 나은 모습으로 조금씩 걸어가고, 연습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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