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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똘 May 14. 2020

나를 잘 돌보기 위한 노동, 청소

손을 타면서 생기는 따뜻한 에너지들


1. 고시원 방 한 칸, 매일 저녁 걸레질하던 날들


5년간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했다.

졸업 후 본가로 내려갔고, 6개월가량이 지난 뒤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서울은 이전과 달랐다.

늘 기숙사 혹은 쉐어하우스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던 나에게 고시원 생활은 너무 다른 환경이었다. 소속 없는 취준생 신분이라는 것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고시원 방에서 보내는 첫날 저녁,

낯설고 생소한 느낌에 티비를 틀었다.

티비에서는 어벤저스가 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마블 영화의 영상과 소리에 기대어 낯섦을 몰아냈다.


그 티비와 함께 나를 달래주었던 친구가 '청소'였다.


고시원에 사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저녁 작은 방바닥을 정성스레 닦았다.

매일 닦는데도 매일 먼지가 훔쳐지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말이다.


방바닥을 닦는 일은 어떤 의식과 비슷했다.

그저 방바닥을 빈틈없이 꼼꼼히 닦는 것에 열중하는 시간 속에는,

작은 내 공간을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 그 안에 사는 나를 소중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있었다.


노란 장판을 닦아나가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쌓일수록 낯설던 공간도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갔다.

외출 후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안도감,

내 영역이 주는 포근함이 커져갔다.


그 경험을 통해 내 품을 들여 내 것을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그게 나에게 무엇을 주는지 아주 조금, 느끼게 되었다.



2. 첫 원룸, NPC와 친해지기


6개월 간의 고시원 생활 후 원룸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본격적으로 이사하기 전, 여러 번에 거쳐 이사 갈 장소를 쓸고 닦았다.


1차, 2차, 3차, 4차까지 청소는 끝이 없었다.

(이전에 살던 분... 방을 거의 방치하고 2년 사신 듯...)


신발 벗고 들어가기엔 찝찝한 방에, 다이소에서 구비한 새 욕실용 슬리퍼를 신고, 고무장갑을 끼고, 물걸레와 정전기포를 챙겨 들어갔다. 열심히 1차 청소를 마치고 둘러본 원룸 방은 휑-하고, 낯설고, 왜인지 딱딱해 보였다.

고시원이 익숙한 친구 느낌이었다면, 원룸은 NPC*같이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형식적이고 데면데면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루는 바닥을, 또 하루는 화장실을, 다른 하루는 주방, 그리고 창문, 옷장, 문고리 등등...


전에 살던 분이 집을 워낙 지저분하게 써서 원래 내 성격보다도 더 꼼꼼하게 이전 입주자의 흔적을 지워갔다. 침대와 책상 배치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며 조금씩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갔다.


원룸 방에 내 손이 닿아갈수록, 낯선 공간을 '내 공간'으로써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점점 생겼다.

애를 쓸수록 애정이 커져갔다. 고시원에 살 때보다 빠르게 공간에 정이 들었고, 그때보다 더 많이 내 공간에 무엇이 필요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3. 내 공간에 뭐가 필요하지? 뭐가 있으면 좋을까?


기숙사나 쉐어하우스에 살 때는 공간의 심미성이나 청결함의 기준이 높지 않았다.

본가에서 지낼 때도 '내 방'이랄 게 없이 자랐기 때문에, 잠자는 곳은 머리 뉘일 수만 있으면 되었고 공부하는 곳은 책상만 있으면 됐지 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내 공간'이 생기니 생전 없다고 생각했던 욕망과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아닌가.


휑-한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나가면 좋을까?

자취생이라면 다들 깔고 있을 오늘의 집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물어도 보며 조금씩 집을 채워나갔다.



그중 첫 번째는 앉은뱅이책상(식탁).


하루는 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후후 불어 먹고 있는데, 방바닥에서 허리 굽혀 이러고 있는 것이 왜인지 처량하게 느껴졌다. 방바닥에 이것저것 벌려놓고 밥을 먹는 게 지저분하기도 하고, 앉은뱅이 식탁 고거 뭐 얼마나 한다고!라는 생각에 가장 첫 번째로 구입한 물건이다.


이것저것 열심히 찾아보다가 원목 느낌의(진짜 원목은 너무 비싸기도 하고 무거울 것 같았다.) 가벼운 소재로 만들어진 것을 샀다. 그냥 작은 앉은뱅이 식탁 하나일 뿐인데, 내가 '필요'를 느끼고 이것저것 비교하고 찾아보며 산 것이다 보니 '그냥'물건이 아니라 '소중한' 내 물건으로 느껴졌다. 내가 잘 사용하는 걸 볼 때면 문득 나에게 뿌듯한 마음이 든다.


옷을 걸어둘 수 있는 접착식 고리, 남들 다 사용하는 국민 협탁 쓰기 싫어서 열심히 찾아보고 산 원형 나무 협탁 그리고 튤립이 그려져 있는 규조토 발매트 등도 식탁과 비슷한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는 물건들이다. 공간을 채워감에 따라 느끼게 되는 풍성한 일상을 경험해보니, 나를 돌보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구나 싶다.






'청소'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긴 했지만 결국 그 청소를 시작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나의 마음과 노력이 담긴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가치'인 것 같다.


'내가 담긴 무언가'들이 뿜어내 주는 따뜻한 에너지.

내가 쏟은 에너지가 또 다른 에너지로 나에게 다시 와 닿는 어떤 순환, 말이다.


요새는 작은 청소 습관들을 익히려 하고 있다.

출근 전 아무리 바빠도 3분 정도 내어 이불을 정돈하고 바닥을 쓰는 일,

설거지한 그릇을 아무렇게나 놓는 게 아니라 가지런히 놓는 일,

씻은 후 바로 머리카락을 치우는 일,

옷을 아무렇게나 두지 않고 걸어두는 일 등...

엄마의 잔소리로 매번 들어왔던 일인데, 이제야 정말 실천하려 하는...ㅎ


작은 습관이 가져오는 꽤나 큰 차이를 몸소 느끼며, 더 효율적으로 내 공간과 나를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지..!





*NPC :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 플레이어에게 퀘스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도우미 캐릭터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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