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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 마수리 Sep 01. 2017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공간'의 생산성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카페


카페 2층, 구석진 자리를 2년간 찾아들었다.


가장 싼 커피를 시키고 노트북 전원을 연결하고 바깥 풍경을 본다. 버스와 전철이 몇 대 지나고 나면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쓰다만 논문을 다시 쓴다.  쓴 커피를 마시는 과정이 수십 번 반복된 뒤 드디어 한 편이 완성되었다. 더 이상 진척이 없어 답답할 때, 열심히 써갔지만 번번이 퇴짜 맞고 어떤 방향으로 써야 할지 막막할 때 짐을 싸들고 숨어들었던 곳.

그 커피집이 아니었으면 당시의 좌절과 암담함을 이겨내고 논문을 끝낼 수 있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실험실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어른이 되면서 나에게 밀어닥친 그 모든 어리둥절하고 달갑지 않은 일들(세금 신고, 자동차 보험, 자궁경부암 검사 등)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 상관도 없어진다. 전화가 없는 그곳에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아도 마음 상하지 않는다. 문은 항상 잠겨 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바깥세상이 실험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험실은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내 실험실은 도피처이자 망병지이다.

                                                                                                미국 식물학자 호프 자런이 쓴  <랩 걸> 중에서


 '치타델레' - 몽테뉴 성 안에 있는 작은 탑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 그가 명저인 <수상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치타델레'라는 고독과 성찰의 공간 덕분이었다.


유복한 귀족 집안의 몽테뉴는 인생에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딸, 동생,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판사를 그만두고 책 1천여 권을 들고 치타델레를 찾아들어가 10년간 스스로 유배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몽테뉴는 자신을 관찰하고 돌아보기 위해 치타델레에서 혼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수상록>은 그렇게 탄생했다.


오솔길 - 철학자의 길


독일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괴테, 베버, 헤겔, 포이어바흐 등 하이델베르크에 살았던 철학자들의 산책길을 조성해놓은 곳이다. 몇몇 관광객은 칸트의 산책길을 기대하고 가는 경우도 있지만 칸트가 걸었던 길은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 있다.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프크에서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칸트는 같은 시각, 같은 길을 평생 동안 걷고 또 걸었다. 몸이 약했던 칸트가 장수하며 독일 철학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오솔길을 걷는 산책의 힘이었다.

다윈, 루소, 볼테르, 칸트, 키에르케고르도 모두 산책 애호가였고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도 산책 회의를 즐긴다고 한다. 루소는 생애 마지막 산책을 끝내고 아내와 아침을 먹은 후 사망했다.


그 외, 일본 교토에 니시다 기타로 교수가 걸었던 '철학의 길', 덴마크 코펜하겐에 키에르케고르가 거닐던 '철학자의 길'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칸트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방랑자 루소


젊은 시절 루소는 노마드적인 여행을 즐겼고 언제든 멈추고 떠날 수 있는 도보 여행을 좋아했다.

그의 책 <고백>에서 "나는 걷지 않고는 사색할 수 없다"라고 고백도 했다. 자유롭게 걷다가 어디서든 멈추어 들판의 경치,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 선술집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겼고 생제르멩의 오솔길을 걸으면서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도 집필했다.


인생 중반부터는 목적 없이 떠나는 방랑 여행보다 작가로서 여행했다. 마음을 따라 움직이는 여행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일'이 돼버린 것이다.


1762년, 8년 동안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가난과 굴욕을 겪은 루소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즐겼던 방랑과 여행에 대해서 편지에 이렇게 썼다.  "여기저기 떠도는 삶이 주는 고통과 이에 수반하는 많은 상황들이 주는 고통은 내 모든 시간을 갉아먹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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