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생활 겨우 두 달
베트남에서도 설날(뗏)은 가장 큰 명절이다. 명절에 서울이 한가한 것처럼 뗏 연휴 동안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도 한산했다. 도로를 가득 메웠던 오토바이도, 따갑게 울리던 경적 소리도 잠시 'MUTE'모드.
그러니 한국의 설(베트남의 '뗏')에는 하노이에 올 일이 아니다. 문 닫는 곳이 많아서 시내에 갈 곳이 없다. 관광객이 많은 호안끼엠 호수 주변은 뗏 메뉴를 따로 만들어서 평소보다 훨씬 비싸게 판다.
뗏 전까지 나는 하노이가 1년 내내 흐린 날만 있는 줄 알았다. 12월에 도착한 후 계속 흐린 날만 봤으니까. 그런데 연휴 동안 맑고 푸른 하늘도 볼 수 있었다. 하노이에 오고 처음 보는 화창한 날씨. 그러니 며칠간의 여행으로 한 나라를 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을까.
하노이의 겨울 날씨
12~2월은 하노이의 겨울이다. 기온은 보통 10~20도이지만 20도를 훌쩍 넘는 날도 꽤 있다.
겨울에는 맑은 하늘 보기가 어렵다. 흐리고 비 오고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이다.
하노이에서 겨울을 보내려면 두꺼운 겨울 옷, 전기장판이 필요하다. 겨울에 여행 온다면 겨울 점퍼를 꼭 챙겨 오기를.
나 또한 하노이 생활 이제 겨우 두 달이다. 더구나 아직 하노이를 벗어난 적도 없다. 그러니 길고 긴 이 나라 베트남을 어찌 감히 평하리. 감히 베트남이라는 말을 쓰지는 못하겠다. 하노이라고만 한다.
보통 1회 요금이 7 천동(약 350원). 현금만 가능하고 환승이 안된다. 갈아탈 때마다 요금을 또 내야 한다.
하지만 한 달 20만 동(약 1만 원)이면 하노이의 시내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바로 버스 정기권.
내가 하노이에서 제일 잘한 일은 이 버스 정기권을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구글 지도로 목적지를 입력하고 버스 노선을 확인한 후 버스를 이용하면 하노이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다.
베트남은 유교 문화권이라 연장자에 대한 배려가 있다. 특히, 버스에 연장자가 타면 젊은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난다. 심지어 나도 여러 번 자리를 양보받았다. 어느덧 자리 양보받는 나이가 되었나 서럽기도 하지만 일단 앉아서 가니까 좋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한국인인 나도 하노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인상적이다. 그 외국인이 한국에서 받은 느낌을 이제 충분히 알겠다.
그러나 하노이에서의 버스 이용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덜컹거리는 버스, 기사가 끊임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 승하차하는 도중에도 움직이는 버스. 승하차 시 위험한 경우가 많이 있아서 조심해야 한다.
아, 버스에서 기사랑 이야기하면서 나물 다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하노이 버스에는 안내원이 있고 현금으로 요금을 받는다. 요금(7/8 천동)을 내면 버스표를 준다.
잘못 내린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한 하노이 기찻길.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분주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건 곧 기차가 들어온다는. 의미. 승무원의 발길이 분주해지고 관광객들도 들떠 있었다. 나도 기다려보기로 했다.
5분쯤 지나니 기차가 들어왔다. 사실 그 날, 나는 호찌민 박물관을 찾아가던 길이었는데 버스에서 잘못 내려서 걸어가던 중에 우연히 발견한 기찻길이었다.
역시'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줄 수 있다'.
9번 45번(그 외에도 많이 있겠지만 내가 탄 버스 위주) 타고 가다가 기찻길이 보이면 근처에서 내려서 찾아가라. 하노이에서는 버스 정류장에 이름이 따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베트남어를 못하지만 하노이에 잘 적응하고 있는 이유.
첫째, 근무하는 곳이 대학의 한국어학과라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딜레마이기도 하다. 베트남어 공부를 게을리하는. 그러나 베트남어 공부를 놓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구글 번역기. 완벽하지는 않지만 급할 때 의지할 수 있다.
셋째, 구글 번역기로 해결이 안 될 때 어김없이 나타나는 구세주가 있었으니 바로 영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
말도 안 통하고 번역기로도 뜻이 전달이 안돼서 애먹을 때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하노이에도 그만큼 영어 구사자가 많다는 얘기.
만약 내가 한국에서 똑같은 상황의 외국인을 본다면 선뜻 나서서 도와줄 수 있을까?...
이놈의 영어는 정말 '애증'이다.
이렇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다짐한다. '선하게 살자'.
넷째, 하노이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 미딩, 중화 거리 등. 롯데센터(마트) 하노이점은 꼭 한국에 있는듯하다. 거기에는 한국어를 하는 직원도 있다.
다섯째, 날씨.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나는, 살을 에는 한국의 겨울 날씨가 힘들었다. 거기에 비하면 하노이의 겨울은 견딜만하다.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은 없으니까.
아! 그러나 하노이의 여름도 견딜 수 있을까? 미친 듯이 덥다는데...
여섯째,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
마트에서 한국 식재료, 한국 음식과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김치도 판다. 그리고 곳곳에 시장이 있어서 채소도 쉽게 살 수 있다. 거의 집에서 밥 해 먹는다.
정신없이 지낸 두 달.
현지 적응 교육을 받고 현지어 공부를 하고 긴 설 연휴도 보내고 이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지금부터는 나를 재정비할 시간이다.
한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역할, 봉사단원으로서의 역할, 개인적인 커리어 개발과 진로 탐색, 국제개발협력 분야 공부, 놓을 수 없는 책 읽기, 그리고 베트남어 능력 인정시험.
문득, 두렵다. 여기에서도 한국에서와 똑같은 고민과 조바심이 있다는 것이. 미래를 위한답시고 공부하고 돈을 모으고 자기 계발을 하고.
서서히, 다녀간 흔적을 남겨야 하고 2년 후에는 손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기 시작한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계백 장군 아내의 말이 떠오른다.
아가리는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랑이는 가죽땜시 디지고 사람은 이름땜시 디지는 거여! 이 인간아!
영화 <황산벌> 중에서
하노이에서 제일 많이 하는 베트남어가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와 '저는 베트남어를 못합니다.'이다. 현지인들이 나를 베트남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길도 물어보고 버스에서 말도 거는 것이다. 같은 동양인이고 체구도 비슷해서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하노이에 물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럽에서는 괜히 주눅 들고 눈치 보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영어를 못하면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그런 점에서는 편하다.
한 번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할머니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말인지 몰라 역시 '나는 한국 사람이고 베트남어를 모른다'라고 했는데 가지고 있던 사과를 주셨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먹을거리는 경계해야 한다는데 그 자리에서 그냥 먹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별 탈 없다.
나는 백설공주가 아니었다.
도로를 점령한 오토바이들을 보면 역동성이 느껴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밀려드는 오토바이 행렬 때문에 길을 건널 때는 식은땀이 날 때도 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어마어마한 경적 소리, 길이 막힐 때 체증을 피해 인도까지 점령하는 오토바이, 보행자들은 인도에서조차 편하게 걸을 수 없다.
한 번은, 녹색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 좌회전하는 차가 나한테 삿대질을 하면서 지나갔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길을 걷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있다.
노상 방뇨.
차와 사람이 다니는 큰길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름 티 안 나게 한쪽에서 일을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확 티가 난다.
베트남에서 알게 된 건데, 이곳에서는 한국인 남자를 보면 현지처가 있냐고 물어본단다. 베트남 유부남들이 '애인'을 두는 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 남자들이 이곳에서 베트남 여성들을 '애인'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서인지 선과 후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한국 남자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그렇게 물어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