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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수리 마수리 Apr 02. 2017

그 병사들은 왜 발차기 경쟁을 하는가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

인도 영어 연수중,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 지대  '와가' 지역을 찾아갔다. 이곳에서는 해질 무렵,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신나는 음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병사들의 우렁찬 소리와 지축을 흔드는 행진이 있다. 그리고  발이 코에 닿을듯한, 180도에 가까운 힘찬 발차기가 있다. 서로 자기의 우월함을 과시하듯 하늘을 향해 과장된 발차기를 하면서 세리머니를 하고 국기를 하강하는 의식.

그 광경을 마하트마 간디(국민회의)와 무하마드 알리 진나(이슬람 인도 연맹 총재, 파키스탄 초대 총리)의 초상화가 내려다보고 있다.


그들은 본디 하나였다.




기원전 1500년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아리아인이 기존의 인도인을 몰아내고 인더스강을 차지했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도 기원전 327년 이 비옥한 땅을 노리고 침입했다.

1526년에는 자칭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바부르'와 그 후손들이 지배했던 무굴제국이  세워졌는데 '악바르'의 아들인 '자한기르'는 영국과의 무역이 인도를 더 부강한 나라로 만들거라 믿고 영국의 제임스 1세와 무역 협정을 맺었으며 처음으로 영국 대사를 인도에 초빙하기도 했다. 

인도와 무역 협정을 맺은 영국 상인들은 인도 동쪽 벵골 지역에서 무역  거점 도시(지금의 '캘커타')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서서히  '갠지스강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여 템스 강변에 짜낸다'.


무굴제국을 세운 건 이슬람 세력이었지만 무굴제국의 황제들은 대체로 기존 인도인들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힌두교도도  모슬렘을 멀리하지 않았다. 관리 등용에 있어서도  대체로 힌두교에 관대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타지마할'을 건설한 '샤 자한'의 아들)는 인도가 이슬람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관리도 오직 이슬람교도만 등용했고 당연히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갈등이 생겼다. 가장 강하게 저항한 세력은 북서부의 힌두 세력인 라지푸트족이었고 시크교도도 무굴제국에 강력히 저항했다. 후에 영국은 종교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시크교를 대대적으로 육성,  시크교도들은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오랫동안 인도군의 중요 구성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인도가 영국에 정복되는 중요한 순간은 플라시 전투였다. 1757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군을 매수하여  '벵골'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이로써  지배권을 확보했는데, 이 전투 이후 양국 간의 무역 상황이 역전되었다.

인도는 고대부터 가볍고 질이 좋은 '모슬린'이라는 직물이 유명했다. 영국에서의 모슬린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무역 적자가 이어지자 영국 동인도회사는 모슬린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제품에 80%의 세금을 부과하고 숙련공의 엄지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수출되던 고급 직물은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 공장에서 대량 생산(산업혁명)된 값싼 직물이 인도로 들어오게 되면서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소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또 다른 무역 적자를 맞는다. 당시 영국에서 차 마시는 것이 유행하자 막대한 은이 차 생산지 중국으로 유출되었고 영국 내에서 비판이 고조되자 동인도회사는 벵골에서 아편을 재배해서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무역 구조를 개선하려 했고 결국 아편전쟁(1839년)을 촉발했다.


벵골은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천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유한 지방이었고 위에서 살펴보았듯 인도의 역사에 빈번히 등장하는 지역이다. '세포이항쟁'후 동인도회사를 폐지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지배(1858)하기 시작한 후 영국은  거세지는 반영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슬렘이 많은 벵골지역 동부와 힌두교도가 많은 벵골지역 서부를 갈라놓기 위해 '벵골 분할령'(1905)을 발표했지만 거센 반발에 부딪혀 1911년 철회했다.


무굴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던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 그리고 종교와 카스트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시크교를 지원했던 영국. 

1919년, 영국이 법원의 판결 없이도 인도인을 체포 구금하고 언론, 사상, 집회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로울라트 법안'을 발표하자 시크교도의 본산지인 암리차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영국군은 비폭력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학살을 단행했다. 주민들은 우물로 뛰어들었고 인파에 밀려 압사한 사람까지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한 시크교도의 성전인 '황금 사원'에 난입해 시크교도들을 학살했는데 암리차르에 가면 황금사원과 더불어 '잘리안왈라 공원'에서 그 큰 우물을 볼 수 있다. 황금사원과 공원은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있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 그러나 힌두교도가 많은 인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당시 카슈미르 지역은 힌두교를 믿는 라지푸트 족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힌두교도는 소수파였고 국민의 70%는 이슬람교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 편입을 밝히자 이슬람교도들이 파키스탄으로의 귀환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인도-파키스탄 분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파키스탄은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하였다. 




<인도-파키스탄 분쟁>

1차(1947년): 모슬렘이 70%인 카슈미르 지역이 힌두교도가 절대 다수인 인도로 편입되면서 촉발.

                      파키스탄령 '아지드 카슈미르'와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로 분할 점령. 

2차(1965년): 네루 총리 사망 후 혼란한 인도 내정 틈타 아지드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 수행 과정 중 발발.

                      이듬해 소련의 중재하에 '타슈켄트 선언' 체결.    

3차(1971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갈등, 인도의 인디라 간디가 동파키스탄 지원.

                       이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           


2014년과 2016년에도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양국 정부는 이러한 영토 분쟁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일례로, 파키스탄 정부는 샤리프 총리가 총선 부정선거로 수세에 몰리던 때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슬람 단결'을 내걸고 2014년 총격전을 벌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지대인 '와가'와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에 있는 '스리나가르'에 갔을 때, 갈라진 나라, 식민의 역사, 적대적 공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암리차르에서 만난 시크교도의 긴 턱수염과 터번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 

분쟁 지역이지만 스리나가르에 가게 된다면 '달 레이크'(호수)에서 하우스보트와 시카라(수상가옥과 보트)를 체험해보기를 권한다. 전쟁터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오고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심어야 할 사과나무가 있다면 한그루 심어야 하니까.


팟캐스트 <우왕좌왕 싱글 라이프> 2화-인도 겉핥기

http://www.podbbang.com/ch/14588?e=22344828

팟캐스트 <우왕좌왕 싱글 라이프> 5화-인도 '문화'겉핥기

http://www.podbbang.com/ch/14588?e=22355559

팟캐스트 <우왕좌왕 싱글 라이프>

http://www.podbbang.com/ch/14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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