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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진 Jan 31. 2021

06. 목포 문화원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민족은행, 호남은행




06. 목포 문화원(구 호남은행)


수탈과 핍박으로 고통받던 일제시대. 일본의 식민 자본에 맞서 순수 민족자본을 지키고 지역산업 발전을 위해 설립한 은행이 있었다는 사실, 여러분은 알고 있었나요? 

목포의 옛 구도심에는 목포 문화원이라는 곳이 있는데요, 예전에는 이 곳이 호남은행으로 불리었던 곳입니다.

당시 호남지방은 풍부한 농산물과 죽세공, 지물 등의 특산물을 산출하면서 '국내 최대의 보물창고이다'라는 지칭이 있을 만큼 산업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자금을 관리해줄 금융기관이 현저히 부족했지요. 물론 일제시대에도 은행들은 있습니다. 조선은행과 조선 식산은행 등 특수은행들이 있었으나 일본 감독관들의 감시 아래 조선인들이 바라는 보편적인 금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에 보통 상업은행이 필요하다고 느낀 호남의 부호이며 유지인 현준호, 김상섭, 김병로 등이 중심이 되어 당시 자본금 150만 원으로 은행을 설립했고, 1933년 7월에는 동래 은행(東來銀行)까지 합병하면서 영업지역을 경상남도까지 확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본금을 200만 원으로 늘려가며 대은행으로 발전했지요.


하지만 이를 좋게만 보고 있을 일본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1928년, 신흥행령을 발포하고 민족계금융기관에 대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 금융정책을 강화하면서 민족계은행 통합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호남은행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자 운영을 계속 고집하며 운영을 해오다가 조선총독부가 일본인들의 자본도 거절하고 직원 또한 일본인은 채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빌미로 1942년 5월 동일은행(東一銀行)에 강제 합병을 당하게 됩니다.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네요. 열심히 회사를 키워놓으니 애먼 일본 총독부가 가로챈 셈이니 말이죠. 그래도 호남은행을 지켜온 사람들은 이에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듬해인 1943년 10월 호남은행이라는 이름 대신 조흥은행 목포지점으로 새롭게 출발하며 민족계 은행으로 그 계보를 이어가게 됩니다.  

일본의 식민정책과 강압에 굴하지 않고 지역사회와 조선의 농어민들을 위해 은행을 설립하고 투쟁한 설립자들의 이야기 참 멋지지 않나요?


지금의 목포 문화원 건물은 1929년 11월에 지어진 것으로 지금의 정문에는 현대적 간판이 걸려있지만 그 안에는 예전에 음각된 '주식회사 조흥은행 목포지점(株式會社 朝興銀行木浦支店)'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중에 조흥이라는 두 글자는 호남이라고 적혔던 것을 나중에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호남은행의 설립자였던 현준호 선생이 간판의 글자 중 포(浦) 자의 점획 하나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현준호 선생이 말했다고 합니다. 


'일제로부터 우리가 독립하면 찍겠다!'  

'목포지점이 자리 잡고 번창하면 찍겠다!' 


몇 가지 말들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아쉽게 현준호 선생은 그 말들을 지키지 못한 채 점획은 지금까지 비어있다고 합니다. 

조흥은행 목포지점은 1965년 7월 목포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목포지역의 다양한 문화사업과 함께 취약계층들을 돕는 등 목포 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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