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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진 Feb 21. 2021

07.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 동아약국

목포 5·18 민주화 투쟁의 산실





07.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 동아약국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과 시민들을 군인들이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목도한 광주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시위대를 결성해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시민을 보호해야 할 군부와 경찰들이 오히려 폭도로 몰아 총질을 하고 진압을 하고 있으니 말도 안 되는 참상이 벌어진 거죠.

계엄군의 발포로 수많은 광주시민은 쓰러져갔습니다. 친구, 연인, 가족, 이웃, 그리고 어린 학생들까지 계엄군의 총칼 앞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매체에서도 이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고 군부에서 광주의 모든 통신과 도로를 차단하며 고립무원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끔찍했을까요.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어느 한 곳도 보도하지 않은채 침묵하고 있고, 세상에서는 이러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말이죠.

이런 군부의 학살에 시민들은 시민군을 편성하고 맞서 싸웠지만 일반시민이 온갖 중화기들로 무장한 군대를 이길리는 만무했습니다. 이에 일부 시민은 참혹한 현상을 알리고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목포로 진입해 '군부와 시민의 전쟁'을 알리게 됩니다. 이 소식은 금세 목포 시민들과 인접한 지역까지 알려지며 분노한 사람들이 목포역으로 모여들었고, 어느새 인원은 수 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당시 목포지역 재야 지도자인 안철 선생이 운영하던 동아약국과 집은 민주주의 인사들의 집결지로서 전두환과 신군부 퇴진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던 투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이후 목포시민 민주투쟁 위원회가 결성되고 안철 선생은 위원장으로 추대됩니다. 이렇게 항쟁지도부를 갖추게 되면서 목포의 5·18 운동은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찌 보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저 거저 생긴 것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흘린 피와 땀으로 쌓인 결과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의 노고 덕분에 우리는 지금을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니요.

그렇게 민주화 투쟁의 역사 속 산실로 쓰이던 동아약국은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몇 해전 손혜원 의원 측이 매입으로 논란이 되었던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지면서 더 유명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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