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그 사람의 결혼
"나 3월에 결혼할 것 같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침착하게 좀 더 여유 있게 반응했어야 했는데. 당황해버렸다. 여자 친구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소식에 난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었다. 꼴불견스럽게도. 그 사람의 전화는 날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일 년이 안 되는 시간. 그 사이 만났던 여자들.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빨리 결혼할지는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결혼할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아기가 급한 사람이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혼하고 1년도 안되었는데 이건 너무 하잖아?
헤어진 사람을 뭐하러 배려하겠어. 이미 헤어져 남남인 사이인데.
내 머릿속에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사실 그 사람의 결혼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나와 이혼하자마자 결혼 사이트 두 개를 가입해 끊임없이 만남을 가져왔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는 바로는 지인들에게도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해왔다고 들었다. 내가 우스갯소리로 나도 그 사이트 가입할까? 금액이 얼마야?라고 묻자 그 사람은 자기는 S대생이라 할인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은 얼마일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고양이들이 보고 싶어도 가지 못했던 이유. 그 사람이 너무나 낯설어져서였다. 이혼하고 딱 한 번 고양이들을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그 30분이 3시간처럼 길었다. 숨이 답답하고 불편해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난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와서 다시는 가지 않았다. 고양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 숨 막힘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의 책상에는 그 당시 사귀던 여자가 준 손글씨로 써준 성경말씀 엽서가 놓여있었다.
더 아이러니 한 건 그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부동산 관련 서류를 전해주며 폭풍눈물을 흘리며 오열한 날이 그 여자를 만난 날이란 것이다. 그 사람은 서류를 주며 '그래도 가장 힘든 순간마다 자기가 함께 있어줬는데...'라며 눈물을 쏟았다. 나 역시 눈시울이 붉어져 '울지 마, 괜찮아.. 괜찮아'라고 위로를 해줬었다. 내가 뭐라고. 그리고 내심 걱정이 되어서 잘 가고 있나 전화를 해보니 그 사람은 김포라고 했다. 내가 김포에 왜 갔냐고 묻자 그 사람은 뭔가 일이 있어서라고 얼버부렸지만 난 소개팅이 있구나 직감했다. 그리고 책상 위의 그 성경말씀은 그 김포녀가 준 선물이었다.
아무튼 그 뒤로 몇 명을 더 만났다 헤어졌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다 '모가디슈'가 개봉했을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여자와 그 영화를 보러 간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난 아직도 모가디슈를 보지 않았다. 아니, 못 보겠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이 여자랑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여자분이랑 사귀기로 했냐고 묻자 그 사람은 얘는 그냥 동성친구 같다, 서로 이상형 이야기하며 논다,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지만 22년을 그 사람을 곁에 뒀던 내 직감은 이 여자구나 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여자랑 결국 그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보다 어린 여자랑 결혼할 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갔지만 아무튼 그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솔직히 엄청 괴롭지는 않았지만 예의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혼한 사이에 예의는 무슨 예의. 지나가던 사람이 웃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나에게는 1년이란 시간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임신이라도 한 걸까? 별의별 생각이 나를 건드리며 성가시게 했다. 그냥 미웠다. 뭔가 그 사람은 승자이며 나는 패자인듯한 느낌이 날 사로잡았다. 괴로웠다.
22년간 알아왔던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 사람의 편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실컷 같이 살며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나이 먹고 결혼한 지 22년이 지난 후에야 아기를 갖고 싶지 않다고 폭탄선언한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고 그 사람은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아기를 갖기 싫어하는 아내를 둔 피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의 결혼 소식에 그 사람의 관계자들은 모두 기뻐하며 축하했고 나는 천하의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저런 여자는 조금도 배려할 필요가 없어. 저런 여자는 조금도 위할 필요가 없어. 이제 너의 행복을 찾아가. 그 사람의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흥분한 목소리의 친한 아는 동생의 전화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