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잘하고 있어.
이상한 일이었다. 눈을 뜬 건 새벽 6시.
미친듯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정말 너무나 오랫만에-몇 십 년 만에 실연이란 감정이 동반된 그리움이었다. 그렇다. 난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보고 싶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패배감이고 뭐고 당장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만나고 싶었다. 깊은 가슴속에서부터 밀려오는 사무치는 그리움. 과외가 끝나고 멀어지던 뒷모습을 향해 팔이 아프도록 손을 흔들던 어린 날의 순수한 그 사람만을 향한 마음. 그런 것들이 마구 몰아쳐 날 덮쳤다.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잠을 청했다. 이럴 땐 그 사람이 결혼한 상태라는 게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이미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을 테니까. 난 그랬을 테니까. 나이를 먹어도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내 감정에 허우적거리는 못난이니까.
겨우 잠을 청해 무사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자고 일어나도 마음이 휑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보고 싶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인데. 씁쓸한 입맛이 돌았다. 그리고 항상 저 옷장 구석 밑에 밀어 넣고 있는 생각이 스믈스믈 기어 나오고 있었다.
나 괜히 이혼했나? 그냥 그렇게 살 걸 그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떠올라버린 생각은 나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울적해질 대로 울적한 내 맘과는 달리 현실에서 할 일들은 초라할 대로 초라하고 하찮았다. 재활용쓰레기를 버려야 했고 건조기에 빨랫감들을 꺼내어 정리해야 했으며 묵은 음식물쓰레기를 드디어 버려야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집안일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것과 다른 하나는 화장실 머리카락을 치우는 것이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다른 집안일은 잘 도와주지 않았지만 두 가지만은 처리해 주던 그 사람이 떠올랐다. 오늘 진짜 왜 이래. 나에게 짜증이 났다.
손도 대기 싫고 눈길도 주기 싫던 음식물 쓰레기를 큰 맘먹고 버리고 나자 신기하게도 내가 대견해졌다. 그리고 엄마와 점심을 먹기로 해서 엄마네 집으로 향했다. 부대찌개를 해서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던지다가 마음을 돌처럼 누르고 있던 질문을 결국 엄마에게 던졌다.
“엄마는 내가 이혼한 거 후회스러운 생각 든 적 없어? 그냥 참고 쟤가 조금만 더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 안 들어? 왜 이혼해서 저렇게 사나 그런 생각…”
웬 청승. 질문하면서 눈물이 나려는데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나는 엄마가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냐며 그래도 벌어진 일이니 어쩌겠냐 이런 식의 대답을 할 거라 생각했다. 최근 내 주위 지인들이 ‘너 괜히 이혼한 거 같아. 그래도 그 사람만 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라고 심심치 않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그 질문에 당당히 ‘당신이 그 사람과 살아보고 이야기하쇼’라고 말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내심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졌나 하는 생각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가족들의 날 향한 지나친 염려도 저런 생각에 한 몫을 했다. 그래서 당연히 엄마도 지인들과 같은 의견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엄마의 단호한 대답에 순간 놀랐다. 그리고 내 평생 엄마가 이렇게 멋있어 보인적은 없었다. 엄마는 약하고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강하고 능동적인 사람이었구나.
“그놈은 싹수가 노란 놈이야. 그리고 너무 자기밖에 모르고 배려가 없어. 계속 살았으면 네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
엄마의 말에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난 듯했다. 기억이란 시간이란 미화시키는 힘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자꾸 과거를 미화하고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있었구나. 엄마말대로 생각해서 홀로 서기로 해놓고 내가 지금 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서 계속 곁눈질을 하다 보니 다른 선택지에 대한 미련이 눈덩이처럼 커져버렸구나.
엄마에게 저런 질문을 하면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덮어놨던 말인데 물어보길 잘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용기백배까지는 아니지만 다시 혼자 서리라 조용히 웃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와인도 한 병 사 와서 마시며 이런 나를 자축했다. 그래.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어. 내가 살고 싶어서. 나로 살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말자. 사람들은 내가 아니고 내 상황에 대해 1도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어. 자꾸 약해지고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에 속지 말자. 지금 여러 가지로 힘든 건 이해하지만 결국 내 인생이고 내가 버텨내야 할 것이지 다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이 상황을 견뎌내 줄 수는 없어. 만약 그렇게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시 나는 그 사람에게 종속되어 그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가야 할 거야.
뭔가 정리가 된 것 같다. 이 년이 넘은 시간에도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는 마음은 다잡을 필요가 있어서 이렇게 다시 한번 쌓고 짓고 안아주기도 하고 다독거려줘야 하는구나. 툴툴 털고 일어나자.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거지. 그렇지만 너무 깊이 빠지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 난 거대한 자유의 존재다. 이 자유의 축복을 잊지 말자.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도 누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