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더는 진리
출국을 위해 도착한 일요일 아침 7시 인천공항은 정말 날 놀라게 했다. 이렇게 여행 가는 사람이 많다고? 다들 코로나에 눌렸던 마음이 폭발해 버린 듯이 여기저기 여권과 캐리어를 들고 바쁘게 자기 비행기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4박 5일간의 일본 스키여행. 스키나 보드를 타시는 분들에겐 겨울 일본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곳이라 시즌에는 숙소가 가득 차고 비용도 많이 비싸다.
이번 여행은 언니네 커플 협찬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인당 3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내 기준에선 결코 싸지 않은 여행이었다. 이혼 후 처음으로 가는 해외라 설레기도 했다. 거기다 일본은 스린이인 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설질을 가지고 있다. 몇 미터나 쌓인 자연설이 가진 매력이라니. 넘어져도 아프지 않아요. 꺄르르 꺄르르 오히려 웃음꽃이 피어난다. 거기다 정말 넓은 산 그 자체이기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탈 수 있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나는 신경안정제를 연거푸 먹은 뒤에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언제 즘 안 무서워질까. 웃음을 띤 승무원들이 부럽다. 이륙 후 조금은 안정 고도에 올라 여권을 살펴본다. 나의 여행은 2018년, 2019년에 끝나 있었다. 2024년. 5년 만의 해외여행이었다. 이혼하고 난 후 딱 끝났었군. 그땐 그래도 그 사람 덕분에 이곳저곳 많이 다닌 편이었지. 사실 일본 스키여행에 맛 들리게 한 것도 그 사람 덕분이었다.
그러나 항상 여행 가서 생각했던 것. 어딜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 나는 그렇다. 마지막에 그 사람과 갔던 미국여행은 정말 마음이 힘들었었고 기억에 남는 일도 없다. 이번 여행 또한 같이 가는 사람이 참 중요하구나 깨닫는 여행이었다. 생각보다 언니네랑 안 맞네?를 깨닫는 순간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저 돈을 협찬받아서 간 거면 바닥에 찰싹 엎드려서 기어 다녀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근데 자꾸 모난 나의 마음이 날 힘들게 했다. 매 순간순간 짐이 되지 않으려고 신경 쓰이게 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보니 진이 빠져버렸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도 먹자고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비참함이 느껴졌다.
첫날 스키장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어쩌다 내가 줄이 혼자 떨어져 혼자 계산을 하고 자리로 왔는데 알고 보니 언니 남자친구분이 한꺼번에 계산을 하려고 하셨었나 보다. 언니는 나보고 돈 많다며 야박을 줬다. 그럼 그 오빠를 찾아가서 제 것도 좀.. 이랬어야 하나.. 생각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물며 이번 여행을 위해 산 캐리어가 생각났다. 주변에 빌리려고 해도 28인치 사이즈는 다들 없길래 캐리어를 샀는데 그것도 왜 꼭 필요하냐고 구박 아닌 구박을 하는 바람에 언니 눈치를 보며 산 캐리어. 내가 돈을 벌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는 루저로 보이는 것이 계속 족쇄처럼 날 따라다녀서 괴로웠다.
여행자체는 정말 좋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겨울의 일본 눈 그리고 맛있는 삿포로 클래식 음식들. 그냥 그런 모난 부분들이 자꾸 나를 스스로 찌르고 그들의 호의와 은혜에 온전히 감사하지 못하는 아직도 고개 빳빳한 나를 본다. 그리고 다음엔 꼭 혼자 돈을 모아서 내 돈으로 오리라 다짐해 본다.
도대체 돈이 뭘까. 며칠 전 봤던 소공녀 영화가 떠오르는 순간이 많았다. 한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주장할 때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근거와 뒷받침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재력이나 능력이겠지. 그런 게 없는 사람의 주장이나 견해는 편협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주제에 나불거리는 개똥철학일 뿐이다.
저녁을 먹으며 술 한 잔을 하며 어쩌다 나온 전남편 이야기에 그 사람은 밥과 수저까지 놓지 않은 상태면 절대 식탁에 앉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자 난 일제히 같은 소릴 들었다. 왜 그 밥과 수저를 놓지 않았냐 가장 일류는 그걸 놓고 자신이 할 말을 다 하는 여자가 일류고 가장 가장 삼류는 나처럼 와서 수저라도 좀 놔주면 안 돼?라고 하며 징징거리다 밥 차린 수고도 인정받지 못하고 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영업에서도 똑같은 거라고 가장 일류 영업은 간이로 쓸개도 다 내놓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물론 사업적인 고객에게는 그렇게 하는데 부부관계는 사업적인 게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인간적 관계라고 생각하기에 그건 같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그들은 같은 문제라고 말했다. 난 나에 대한 핑계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십 년이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그 남자의 태도에 우리의 관계에 너무 화가 났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들의 말이 맞다 내가 수저를 놨으면 되는 거였구나 하고 이야길 마쳤다.
아무래도 언니네 커플과 전남편과 나 이렇게 같이 갔던 루스츠였기에 계속 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이야기하기 싫었는데 자꾸 말을 꺼낸 내 잘못이다.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아서 그러니. 그냥 나 이렇게 힘들었어요 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는데 결국 못난 건 나 자신.
루스츠 스키장의 지도이다. 지도를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아니면 나 같은 스린이 들은 필사의 에이자를 그리며 내려오다 허벅지가 터지기 예사이다. 검정>빨강>초록 순으로 상급 중급 초급으로 나뉘는데 결코 저걸 믿어선 안 된다. 무슨 기준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저 중에 초록이로 내려오다 욕을 욕을 했다. 길도 좁고 경사도 심하고 일본 스키장에서 보기 드문 낭떠러지 그물도 설치되어 있었다. 얼마나 무섭고 다리가 아프던지… 스키를 잘 타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맨날 구석에 처박아놓기만 하던 나를 반성했다.
아무튼 내 나름의 이번 여행의 목표는 사실 전남편으로부터의 온전힌 독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