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멀지만 가까이 있다
옆 집에는 노부부가 산다. 한 번도 부인은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만 종종 복도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뿐이다. 몇 번이고 만나 뵐 때마다 인사를 건넸지만 할아버지의 눈은 무심하게 먼 곳을 향할 뿐이었다. 나는 마치 자신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고요가 내리는 밤이 되면 옆 집의 큰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다. 할아버지와 여성의 고함 소리. 할아버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듯했다. 그래서 주로 할아버지의 떼쓰는 듯한 고함으로 가득하다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지곤 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오전과 밤에 보행기를 밀고 산책 겸 나가셔서 일층에 앉아계셨다. 그게 아마 할아버지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여름인데도 러닝셔츠 위에 보푸라기가 가득한 스웨터 잠바를 걸치고 밤에 커다란 랜턴을 한 손에 쥔 체 힘겹게 보행기를 미는 그 모습은 마치 늙음의 형상화라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제 저녁에 아파트에 주차를 하고 내려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주차되어 있는 119구급차가 보였다. 보통 주택가에서 비상벨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빨간 불만 돌아가는 구급차를 보면 난 ‘누군가 죽었구나’ 생각을 한다. 아버지의 죽음 때 본 집 앞의 구급차가 선명하게 기억에 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때 난 죽음이란 참 조용하게 진행되는구나 깨달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해당층에 내려 집에 들어가려는데 구급차의 주인공이 그 옆 집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응급용 시트가 옆 집 현관문에 와 있었고 집 안에서는 응급대원의 다급한 추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할아버지!!! 그래서 토하셨어요?? 설사하셨어요??”
응급대원의 간곡한 질문에도 내 귀에 들리는 건 “으으으으…..”하는 작은 짐승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뿐이었다. 더 이상은 모르겠다. 난 집에 들어왔고 옆집은 그날 이후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요양원 같은 곳으로 가신 걸까. 아니면 돌아가신 걸까. 벽 하나를 두고 이렇게도 다른 삶이라니. 아니면 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옛날에 우리 동네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 동네는 정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골목골목이 두서없이 짜여 있는 곳이었다. 동네 골목은 늘 어둡고 습했다. 거기에 오래되어 이가 맞지 않아 이쪽저쪽으로 을씨년스럽게 기울어져 있던 한옥 나무 대문들. 바람이라도 불면 끼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에서 하얀 손이 금방이라도 나올 듯했다. 난 늘 그 골목을 뛰어다녔다. 그 하얀 손에 잡힐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골목이 더 무서워질 때가 있었으니 바로 근조등이 달릴 때였다. 그때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많아서 누군가 돌아가시면 집 앞 대문에 노란 큰 근조등을 달아놓았다. 근조등의 색은 묘하게 무서웠다. 붉으면서도 노란듯하고 주황빛도 돌며 왠지 그곳에 죽음이 존재하는 듯한 두려움이랄까.
요즘은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당연시되었지만 문득 옆 집 할아버지의 생사가 궁금한 나로서는 근조등의 존재가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죽음이 무섭다기보다는 누구에게나 늘 곁에 있는 존재로 인식이 되어서일까. 아무쪼록 평안하시길 빈다.
구연동화 반에서 읽었던 동화책.
“내가 함께 있을게.”가 생각나는 날이다.
*여기서 ’나‘는 죽음이다. 죽음은 절실한 친구이자 내 생의 마지막까지 동행해 주는 절절한 동행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