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꼬리만 한 월급이란 말이 있다.
30년 전에도 있었고 인공지능이 열심히 일해 주는 2024년 현재에도 있는 말, 쥐꼬리(요새는 내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사이버머니라고도 함). 30년 전에 쓰던 말 중에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단어들도 많다. (가령, 가사일을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식모, 미국/일본산 제품을 팔러 다니는 보따리 아줌마를 가리키는 미제 아줌마, 일본 이모, 고고춤을 추며 남녀간에 만남을 성사시키는 고팅과 같은 지금 세대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그 시대상을 반영했던 단어들 말이다). 하지만, 직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받는 급료를 꾸며주는 “쥐꼬리만 한”이란 말은 매우 적은 상태를 나타내 주는 누가 들어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이며, 사장부터 신입 직원에 이르기까지 무릇 매 월 월급을 주 수입원으로 삼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더매치(이것도 더 이상 쓰지 않는 표현인데,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의 줄임말) 직장생활의 고충과 확 때려 치고 싶은 내적 갈등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범시대적인 단어로 이보다 정확한 풍유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쥐에게 있어 꼬리는 인간이 폄하하듯 하찮고 시시하지만은 않은 것이, 몸의 균형을 잡아주며, 이동 시에는 방향타의 역할을 하고, 심지어 체온을 조절해주는 기능까지 있다고 한다. 꼬리를 잘린 생쥐가 균형을 잃고 뒤뚱뒤뚱하다 어디갈지를 몰라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호시탐탐 먹이를 찾아다니는 고양이나, '에그머니' 소리치며 빗자루로 냅다 스매싱을 날릴 거리청소원은 없는지 지레 두리번거리게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월급도 직장인에게 있어, 이런 중요한 기능을 책임지고 있다. 균형, 방향타, 체온 조절이 그것이다.
첫째, 균형 감각. 말이 나와서 말인데, 월급에 '쥐꼬리'가 붙지 않았다면 과연 나같이 삼십년을 한 직장에 몸담은 장기 월급 생활자가 나왔을까 싶다. 쥐꼬리만큼이 아니라 배부르게 포식할 만한 급여를 받았다면, 아마 대번에 창업으로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겠다며 뛰쳐나가거나, 이만큼 벌었으면 됐으니 이제 자아실현을 찾아 떠나겠다며 훌훌 사표를 던졌을테니 말이다. 이번 달의 월급으로 한 열흘을 살고, 나머지 이십 일은 다음 달 월급을 기다리며 살게 만들 만큼의 애면글면한 액수 사이를 오고가는 그 균형 감각이야말로 직장 생활 연장의 수훈갑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방향타. 직장에 풍운의 꿈을 안고 들어오는 사람 중에 주어진 업무만 수십년 다람쥐 쳇바퀴돌 듯(앗. 또다시 나온 설치류 비유!)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나 조직에서 성장하고 싶어하며, 내가 이룩한 성과를 정당하게 평가받아 3년 뒤에는 대리를, 7년 뒤에는 해외 근무를, 20년 뒤에는 조직의 수장이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할 터이다. 주어진 업무만 수십년을 하기로 하고 들어온 직원이라도, 그 업무의 숙련도가 익어감에 따라 급여 인상이나 성과급같은 당근을 당근(!) 기대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직장 생활의 방향타가 되어 주는 것이 월급이다. 나보다 일을 못하는 직원이 진급을 해서 나의 쥐꼬리를 능가하는 꼬리를 덧달게 된다면 누가 그 조직을 위해 일하고 싶겠는가? 내가 한 시간이면 해 내는 일을 옆의 직원은 하루종일 하고 있는데도 그 직원과 같은 쥐꼬리를 받는다면 누가 숙련되고 재빠르게 내 앞에 놓인 일을 처리하고, 다음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월급의 크기는 내가 직장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다는 조직의 평가와 내가 앞으로 이 조직에서 나아갈 비전을 가리켜주는 방향타이며, 수십년간의 직장 생활이란 회사가 제시한 방향에 나의 방향타를 조정하고 일치시킨 결과값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체온 조절.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다. 겨울에 헐벗으면 안되고 여름에 무더우면 안되듯이, 직장과 동료는 무법 천지의 경쟁 사회에서 맹렬한 공격과 경쟁으로부터 든든한 우산이 되어 준다. 때로는 서로 간의 경쟁은 나의 역량과 자존감을 드높여 주는 어항의 메기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반면에 기업 문화라는 일정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만성적인 온도에 젖어들다 보면, 나 개인의 정체성과 독창성이 빛을 바래고 인생의 우선 순위를 헷갈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월급이 나와 내 가정의 경제적인 안정은 보장해줄 지언정, 가정의 화목과 내 개인의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말마다 험악한 산악 트레킹을 하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 땡볕에 오지 봉사 활동도 하면서 평온에 젖은 직장 생활을 환기시켜 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많은 동료들이 방향타를 수정해서 이직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야망과 조직의 성과 사이에서 균형을 잃기도 했으며, 또 회사가 주는 안온한 환경에 길들여져 퇴직 후의 인생을 미쳐 준비하지 못해 극심한 온도 차이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에게, 혹은 이직을 준비하며 갈팡질팡하고 있는 후배에게 그리고 이미 인생의 상당 부분을 한 직장에서 보내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갈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받고 있는 월급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 정리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그 월급의 끄트머리에 달려 있는 수식어 "쥐꼬리"의 가치를 환기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돌아보니, 모름지기 월급이란, 자본주의 환경에서 근로자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열매나 마찬가지라며 철저히 무게 중심을 밑으로 밑으로 낮추고 얻은 자존감의 원천이었으며 수십년 ‘쥐꼬리 타령'을 하게 한 일관성의 잣대였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도 “쥐꼬리" 타령을 구시렁대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체온 조절에는 마냥 실패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