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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면 까야지요

by 생각만 하다가

“대리님, 그럼 저는 선발대라 지금 출발할께요.”

“그래, 행사 준비물들은 잘 챙겼지? 기념품과 도시락은 수량 확인 했나? 현수막은 입구에 잘 보이게 걸고, 중간 휴식 장소에 대기하는 직원은 생수와 간식 잘 세팅하고.”

“네, 그럼 출발하면서 삐삐 주시면 입구에 대기하고 있을께요.”


25년 전 어느 토요일, 부서 단체 산행 행사를 준비하던 김대리님과 홍사원의 대화내용이다. 휴대폰도 흔하지 않던 시절 삐삐(무선 호출기의 그 시절, 액정화면에 ‘2626’ (이륙이륙)으로 숫자가 찍히면 지금 출발했다는 뜻이었다.)로 출발 사인을 통보해 주면, 선발대로 출발했던 직원들이 입구에 도착할 일행을 맞을 도열을 하기로 한 동선이었다. 그 때는 주5일 근무나 주 40시간 근로 등이 시행되기 전이라 토요일 오후 2시까지 근무를 했었는데, 본부장님의 과단성있는 결정에 따라 1시간 근무를 유예하고(대체로 12시부터 점심 1시간 후 초과 근무 1시간으로 구성된) 정오를 기해 우르르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서너 시간의 등산 후 선발대가 준비한 산자락 어느 음식점에서 닭볶음탕에 소주를 곁들여 장기자랑과 상품 수여식, 그리고 본부장님의 마치는 말씀과 만세 삼창(만세 삼창은 그 당시 어느 모임, 어느 단체에서나 엔딩 이벤트였던것 같다)을 끝으로 행사 대단원의 막은 내려졌는데, 이 대단한 행사는 이름하여 “ㅇㅇ본부 추계 단합대회”였다.


요즘 20,30대의 회사원들은 TV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서나 전해 듣던 회사 단합 대회가 과연 실제로 산등성이에서 이뤄졌다는 것도 놀랍겠지만,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단합을 위해 전 직원이 주말 시간을 바쳐 산악 등반을 하는 모습도 상상해 보지 못한 모습일 것 같다. 이 행사를 위해 선발대가 치밀하게 동선을 짜고(심지어 등반을 미리 해보기까지 하는) 준비물을 준비하며, 한편으로 직원들은 장기자랑을 위해 퇴근 후 틈틈이 개인기 연습을 했다. 행사 당일 우천 시를 대비한 플랜 B까지 준비했던 우리는 퇴사 후 이벤트 회사를 차려 보자라며 자기 계발에 대해 심각히 논해 보기도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사무실 내에서의 업무 뿐 아니라, 행사 진행, 사회, 장기가 될만한 각종 개인기 등등 다양한 “업무 외 능력”보유자들이 일년에 두 세번의 행사 후 혜성처럼 발굴되곤 했다. 더욱이 본부장님의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꽤 재주가 많구먼” 혹은 “고생했네. 새로운 모습을 봤구먼” 등과 같은 훈훈한 말씀이라도 들은 직원이라면 곧 다가올 승진 인사에 혼자만의 기대와 꿈으로 싱숭생숭해지기 일쑤였다. 가까운 미래에 차릴 이벤트 회사의 연습 게임인 셈 친다거나, 숨겨둔 나만의 실력(?)발휘로 한 계단 신분 상승을 꿈꾸거나 하면서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단합 대회를 맞이했고, 한 발 한 발 산등성이를 오르는 발 밑에서는 각자의 욕망이 이글거리곤 했다.


90년대의 대한민국은 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경제 호황이 정점을 찍고 있던 때였으며, 본격적인 해외 여행 수요 증가로 항공사 매출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기업 문화적으로는 승승장구 성과를 내는 조직이 곧 권력이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시 되는 분위기였고,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혼자 아니오라고 했다가는 까라면 깔 것이지 어디서 반항이냐는 꿀밤을 얻어맞기 십상이었다. 이 즈음 강남 문화가 생겨나고 해외 유학파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직원들도 간혹 눈에 띄기는 했으나, 조직 내에서 이들의 역할은 우리 조직이 여전히 견고하며 명령체계가 잘 돌아가는 지를 알려주는 시금석 같은 역할을 해 줄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 시절의 나는 까라면 한 구석에서 마늘이라도 까는 무리에 속해 있었던지라 그 해의 단합대회에도 몇 날 며칠을 장기자랑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가무에 능하지도 않았던데다, 교육열이 높으셨던 부모님 덕분에 어렸을 때 조금 배워둔 피아노를 산등성이 닭볶음탕집까지 짊어지고 갈 수 없었던 나는 동기 두 명과 걸그룹을 결성해서 한복까지 맞춰 입고 공연을 했다. 물론 노래나 안무는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한복까지 배낭에 짊어지고 와 안쓰러운 화음과 손발이 오그라드는 춤으로 공연을 한 덕에 본부장님의 “젊은 친구들이 노력이 가상하구먼.” 대열에 다행히 합류할 수 있었다. 물론, 승진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이벤트 회사로의 스카우트 제의도 없었지만 이후 팀원 발탁의 기회가 생길 때마다 “까라면 까는 애” 즉, 조직을 위해서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가상한 직원으로 부서 이동 시에 “평판” 가산점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90년대 중반까지의 경제 호황은 97년 IMF를 겪으면서 최악의 경제 시련기를 맞이 했고, 회사도 유가와 환율의 동반 상승으로 뼈를 깎는 시기를 겪게 되면서 단합 대회나 팀웍 활성화와 같은 활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조직은 누군가 비용이나 효율성 문제를 언급하기라도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것을 축소해 나갔고, “마른 수건도 쥐어 짜는절감 정책 밑에서 직원들은 숨만 쉬며 지내는 년의 시간이 흘렀다. IMF 위기를 겪으면서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닌 , 기업은 기존의 방만했던 운영을 슬림하게 변경하고, 불필요하거나 중복되는 절차나 업무들을 개선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고, 모두가 긴축하는 속에서도 R&D 분야와 자원 활용 부분에 과감히 투자한 기업은 IMF 이후 찾아온 디지털 시대의 수혜를 맞볼 기회도 잡게 되었다. 나라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까라면 까는데 단련됐던 우리들은 실업과 파산, 가정의 붕괴 등을 겪는 와중에도 집구석에 고이 숨겨뒀던 금붙이들까지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과 기업의 각고의 노력으로 4년만에 IMF 관리 체제 종료를 이끌어 냈다(어느 나라 국민이 금이빨까지 뽑아가며 국가 경제난 극복에 벗고 나서냔 말이다).

IMF관리에서 벗어나고 디지털 경제 시대를 맞이한 이후에도 까라면 까는 문화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지만(IMF 통해 까라면 금이빨이라도 까는 한국적인 문화가 왠일인지 좋은 결과를 있음을 체험해서인지 후로도 이 관습은 쉬이 없어지진 않았다), 대동단결 단합대회 문화는 확실히 사라졌다. 중심 문화로 기업 체질이 개선된 이유도 있었고, IMF 위기를 겪으면서 개인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IMF 위기를 겪는 동안 신입직원을 채용하지 않아 장기자랑이 가능한 입사 3~4 미만의 가용 직원들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90년대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모두가 한결같이 회사의 안위에 개인의 모든 것을 걸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도 여전히 조직의 성공과 성과가 개인에게 있어 중요한 행복 잣대이긴 하지만, ‘ 안전과 행복을 배제하고서는 조직의 성공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또한, 개인의 희생이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이 기업에서도 사회에서도 자발적으로 채택되는 시대가 되었다(물론 아직 만족스럽다고는 없지만).


시절로 돌아가 단합대회에서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면 나는 또다시 일을 두고 춤과 노래 연습에 매진할 같다. 까라면 까야 되는 조직 문화에 주눅 들어서도 아니고, 승승장구 출세를 위한 아부의 발판으로 삼고 싶어서도 아니다. IMF 외환 위기와 이후에 찾아온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묵묵히 살아낸 동기들, 선배들, 동료들과 함께 박장대소하며 웃고 어울리던 그때를 소중히 추억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켜낸 소중한 가정에 대한 나의 헌신이 갸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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